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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낯선 질투 (78/111)


78. 낯선 질투
2023.04.30.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굳이 허영주와 모두가 입 모아 말하지 않아도 채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어머니의 집착과 원치 않는 혼인을 피하기 위해서라지만, 겨우 두어 번 만난 여자와 결혼을 강행했으니.

확실히 권채하의 방식은 아니었으나, 그는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약속대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혼인 신고까지 마쳤다는 사실이 백영의 귀에까지 들어간 뒤로, 암암리에 오갔던 혼담도 쏙 들어갔다.

그쪽에서 말을 거두자 허영주로서도 별도리가 없게 되었다.

백사라와 부질없는 친분을 유지하고 말고는 채하에겐 알 바 없는 일이었다.

설원 역시 그녀가 가장 바란 것을 이루었다.

그녀가 채운 가에 들어온 바로 당일, 그녀의 어머니 김선화는 채운의 전담 병원에 입원했다.

권씨 일가만을 전담하는 심 원장에게 채하는 손수 주치의가 되어달라 당부해 놓았다.

희귀 질환 환자이니만큼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심 원장은 채하의 지시를 받아들여 최고의 의료진으로 전담반을 구성했다.

탁 트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특실에서, 설원은 어머니와 눈물로 포옹하며 안도했다.

이제 어마어마한 병원비를 걱정할 일도, 어머니가 혼자서 쓰러질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게 된 것이었다.

계약은 성립되었고, 그렇게 두 사람은 무늬뿐인 부부가 되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 예상 범주에서 흘러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었다.

다만 한 가지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아무리 얼어붙은 심장을 가졌어도, 권채하 역시 한 명의 남자라는 것을.

엄연히 마음이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

처음엔 그저 신경이 곤두선 것 정도로만 여겼다.

이를테면 결혼반지가 시작이었다.

원래는 정 비서에게 대충 아무거나 사 오라고 시키려다가, 막판에 마음을 바꿨다.

아무래도 자기가 직접 가는 편이 남들 눈에도 이 결혼이 진짜라 믿게 하는 데 도움이 될 듯했다.

해서 채하는 직접 가장 크고 빛나는 다이아 반지를 골라왔다.

하지만 설원은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 대신, 제 눈앞에서 상자를 고이 닫아버렸다.

작고 예쁜 상자가 닫히는 순간 무척이나 미묘한 감정이 그를 덮쳤다.

어쩐지 불쾌한 감각이었으나, 그는 재빠르게 그것을 가슴에서 밀어냈다.

어차피 계약인데 거기에서 반지를 끼는 것이 도리어 어색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약속대로 그 뒤론 내내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문제는 침실이었다.

아무리 표면상으로 부부라 해도 같은 방을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니, 이 부분은 배려할 필요가 있었다.

낯선 공간이 불편할 설원을 위해 채하는 침대를 내어주고 서재로 잠자리를 옮겼다.

그녀와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이 결혼에 대한 제 나름의 원칙이었다.

한데 정작 불편한 건 되레 그였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공간인지라 그녀의 사소한 움직임에도 늘 오감이 곤두섰다.

꽃을 가까이해서 그런지 설원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다.

거기에 사뿐사뿐한 발걸음, 이불을 덮는 소리, 가끔은 숨결에 실린 작은 한숨까지.

왜인지 그것들이 하나하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그래서 채하는 일에 더욱 신경을 쏟았다.

어차피 그에게는 전무직 승진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고, 덕분에 그녀의 향기가 맴도는 방에 머물 시간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약속한 대로 설원은 훌륭하게 총알받이 역할을 해냈다.

백사라와의 혼사가 무산되자 허영주의 관심은 오직 그 원인이 된 며느리를 향했다.

허영주는 항상 실눈을 뜨고 설원을 보았고, 말도 섞지 않으려 하던 처음과는 달리 노골적으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괴롭힘은 채하의 예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안산댁이 응당 해야 할 집안일들이 대거 설원의 손으로 넘어갔고, 행동에는 반은 감시나 다름없는 제약이 붙었다.

사적인 미안함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대신이랍시고 건넨 한도 없는 카드의 사용액이 0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로, 그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고 채하의 가슴에 머물렀다.


“어머, 이게 웬 반가운 손님이에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덕분에 아주 상태가 좋아요. 사위가 만나러 와주니 더 좋은 걸요?”

해사한 미소로 그를 반기는 그녀의 얼굴은 말과는 달리 야위어 있었다.

김선화. 민설원의 어머니.

저도 모르게 채하는 이 병실까지 찾아오고 말았다.

카드 대신 무언가 다른 보상을 해줄 게 없나 단지 그 생각이었는데, 정말이지 뜻밖의 행동을 스스로 해버렸다.

제 어머니가 설원을 못살게 구는 만큼, 그녀의 어머니에게 몰래 잘해드리자니.

자기가 생각해도 일차원적인 데다 우습기 짝이 없었으나, 막상 병실 문이 열렸을 때 그녀의 반가워하는 표정에 일말의 망설임은 모두 사라졌다.


“자. 얼른 들어요.”

“아닙니다. 어머님 드시라고 사 온 과일인 걸요.”

“어머님이 아니라 장모님.”

“……예?”

“장모님이라고요. 장모님. 권채하 군은 우리 설원이 남편이고, 내 사위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장모님이라 불러야 맞죠.”

“아…….”

어색한 호칭에 멋쩍어하자 그녀는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금 더 나이 든 모습이긴 하지만, 설원이 활짝 웃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어 채하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설원 어머니의 입술 끝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따라 걸렸다.

곧 그녀가 예쁜 토끼 모양으로 자른 사과를 포크에 찍어 내밀었다.


“자. 사위랑 같이 먹으면 틀림없이 더 맛있을 거예요.”

그 말대로 토끼 귀가 달린 사과에서는 달콤한 꿀맛이 났다.

이후로도 채하는 설원의 어머니를 자주 찾아갔다.

본디 설원과의 거래 조건이 어머니의 치료였으므로, 그녀의 건강에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잦아지는 방문을 합리화하면서.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채하의 잦은 방문을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계약 결혼을 한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그녀는, 채하를 진짜 사위처럼 여겼다.

설원은 절대 지어주지 않는 미소를 그녀의 어머니는 아낌없이 그에게 지어주었다.

지팡이를 짚지 않고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이라 좋다며, 설원의 어머니는 기꺼이 사위에게 팔 한쪽을 맡겼다.

몰래 장모님을 간호하러 오는 사실을 아내가 알게 되면 멋쩍다는 이유로, 채하는 설원에게는 비밀로 해달라 당부했다.

사위와 비밀이 생겨서 즐겁다며, 그녀는 또 하나의 비밀을 채하에게 털어놓았다.

채하가 처음 설원을 찾아온 날부터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다고.

사실 설원의 어머니가 사위를 바란다는 뜻을 넌지시 비쳤을 때 그 또한 은근한 기쁨을 느꼈던 바 있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날 귀가한 채하는 설원을 힐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녀도 제 어머니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까, 어울리지 않게 궁금해져서.

민설원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어머니인 김선화 여사 역시 채하가 알고 있는 부류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설원의 어머니는 그에게 늘 편안함을 선사했다.

믿음. 안정. 유대감. 그런 따스한 감정들과 함께.

*



‘뭐 하고 있는 거지?’

회사 일을 마치고 모처럼 아버지 권강호와 함께 퇴근한 채하의 눈에, 묘한 풍경이 들어왔다.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시간에 설원이 바깥에 나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가 뜰, 그녀가 결혼 선물 겸 부탁했던 자그마한 꽃밭에.

채하는 잠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왜 밝은 대낮에 하지 않고, 어두워지는 이때 꽃밭을 가꾸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리고 소박한 차림새를 한 설원은, 어디로 보나 재벌가의 작은 사모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꽃을 만지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순수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 표정에 저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 같아, 채하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그녀의 손끝으로 돌렸다.

희고 여린 손가락이 초록색 꽃줄기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는, 꽃이 뿌리내린 지반을 평평하게 다듬었다.

아주 사랑스러운 것을 어루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게다가 평소 무미건조한 눈빛은 어디로 가고, 두 눈망울이 눈부신 봄 햇살처럼 반짝였다.

그 장면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채하의 가슴 속에 생소한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선 감정.

설원의 손끝에 닿는 꽃들을 향한, 이 이상한 감정을 그는 미처 정의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안 들어가고 왜 서 있는 거냐?”

“아. 아버지.”

“설원이구나.”

“…….”

밖에서 비서와 이야기하느라 한발 늦게 돌아온 권강호가, 채하의 시선 너머에 있는 며느리를 바라보며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권강호는 갑작스레 생긴 며느리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최근에는 여러 사교 모임에도 동행하며, 자랑도 늘어놓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설원의 어머니도 저를 그리 대하고 있었기에, 채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딱히 토를 달지 않았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설원은 두 사람이 멀찍이서 보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그녀와 채하를 번갈아 한 번씩 보더니, 권강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엄마 눈치가 보여서 이 시간에 하는 모양이구나.”

“…….”

“요즘 안산댁 옆에서 집안일만 하는 것 같던데, 내가 한소리 해도 통 네 엄마가 듣질 않는다.”

“……그렇군요.”

모르던 사실도 아니건만, 꼭 처음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채하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권강호가 묵직한 음성으로 그의 마음 한가운데를 건드렸다.


“너라도 잘해줘라. 설원이가 고생이 많을 거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채하로서는 진심으로 알 수 없었다.

잘해주겠다는 부질없는 소리도, 고생이 많겠지만 그게 애초에 거래 조건이라는 대꾸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채하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닫은 채 서 있었다.

평소라면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을 권강호가, 그날은 왜인지 강하게 훈수를 두었다.


“자고로 아내란 존재는 있을 때 잘해줘야 하는 법이야. 명심하거라. 나는 내 아들이 나중에 후회하는 꼴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

“후회요?”

기상천외한 단어가 입력되자 채하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후회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3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 설원이 행여 인사 한마디 없이 이 집을 나간대도, 그는 눈조차 깜박하지 않을 것이었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답게 하는 것이라고, 그 철칙을 알려준 게 바로 아버지였다.

민설원과의 관계는 철저히 비즈니스였고.

그러나 아버지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인지라 채하는 얼른 들어가자는 말로 이 대화를 매듭지었다.

일부러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겨우 시선을 뗀 장면에 다시 눈과 마음이 가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의 말을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다.

분명 변화를 감지했음에도 제 감정을 들여다보려 하지조차 않았다.

제가 한낱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에도 질투심을 느낄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을 그 당시의 권채하는 알지 못했다.

낯설고도 낯선 ‘질투’라는 감정이 어떤 것에서 기인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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