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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후회했어, 미치도록 (77/111)


77. 후회했어, 미치도록
2023.04.26.



 


“이게…… 대체…….”

더 이상의 말은 이을 수가 없었다.

설원의 입술이 벌어진 채 그대로 멈춰버렸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장면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눈앞의 광경을 믿기가 힘들었다.

단순한 창고일 거라 여기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애초에 평범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사당.

가장 먼저 언어로 떠오른 것은 그 단어였다.

두어 평 남짓한 이 공간은 마치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소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 대상은 설원, 바로 그녀일 터였다.

정 비서를 뒤로하고 설원은 홀린 듯 안으로 발을 디뎠다.

오랫동안 문이 잠겨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정성스러운 손길로 잘 관리된 느낌이었다.

곱게 칠해진 회벽은 차가우면서도 깔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천장에 전구가 달려 있었지만, 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정원 쪽으로 터 있는 작은 창문 덕분에 내부는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빠르게 안을 살피니 구조는 단순했다.

문을 중간에 두고 한쪽에는 나무 탁자가, 반대쪽에는 간이 소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탁자 위에는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전부 그녀에게는 익숙한 것들이었다.

당연했다. 모두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설원의 손끝이 느릿느릿 그것들을 더듬었다.

가장 먼저 닿은 것은 탁자 한가운데 놓인 설원의 사진이었다.

아마도 권채하가 얻을 수 있었을 유일한 사진인 증명사진.

이 딱딱하게 굳은 사진 속의 자신은, 이곳에서 몇 번이나 그를 반겨주었을까.

가벼이 헤아리기엔 제가 없던 세월은 꽤 길었다.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사진 옆으론 그녀가 두고 간 산모 수첩이 보였다.

허영주에게 한번 도둑맞은 뒤 장롱 속에 깊이도 숨겨놓았던 것이었다.

그 바람에 급히 떠나면서 정작 설원 자신도 잊어버린 물건이기도 했다.

이것을 채하가 발견했었구나.

새삼 우주의 존재를 그가 빠르게 알아챘던 일이 떠올랐다.

역시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시선을 옮기니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한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제가 사라지던 날 차 안에 넣어뒀던 카디건과 가방, 머리끈까지…….

가짜 유품이나 다름없는 것을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모아두었다니 그저 말문이 막혔다.

집착을 넘어선 집념이 설원의 손끝에 닿는 물건으로부터 전해져 왔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깊은 슬픔도.


“대체 왜…….”

맥없이 중얼거리던 설원의 눈에 문득 탁자 맨 귀퉁이에 놓인 또 다른 물건 하나가 들어왔다.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투명한 유리 돔이었다.


“……뭐지? 이게 왜 여기에…….”

안을 들여다보자 거기엔 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들어 있었다.

시커먼 빛깔에 바싹 말라 있긴 했으나, 무척이나 소중히 간직한 듯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기다란 줄기 같은 것을 따라 옆으로 무언가가 달려 있는 형태였다.

모양 때문일까.

아주 희미한 꽃향기가 나는 것도 같다고, 문득 그런 생각이 가슴을 스쳤다.

본능적으로 설원은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아 보았다.

방금 맡은 희미한 향기가 건조한 공기와 섞여 묘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틀림없었다. 이것의 정체는 하나뿐이었다.


“……꽃?”

그랬다. 유리 돔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꽃과 그 줄기였다.

한 송이 정도 될까.

부케 같은 걸 이렇게 말려서 보관하는 방식은 그간 일하면서 많이 봐 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곱게 말렸다기보다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썩어버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시들지 않기를 바랐으나 결국 시들어버린 애달픔이 이 유리 돔 안에서 느껴졌다.


“…….”

설원이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돔 뚜껑을 열어 그 꽃잎 몇 장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것들은 곧바로 그녀의 손안에서 순식간에 바스러져 버렸다.


순간 설원은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그 순간 알았다.

이 꽃은 은방울꽃이었다.

처음 채하와 만나던 날, 제가 넘어지며 실수로 그와 부딪쳐 떨어트렸던 꽃.

……설마 눈앞의 이 꽃이 그때 그 꽃인 걸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분명 그러리라는 확신이 가슴에 스미고 있었다.

그가 이전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 ‘은방울꽃’이라 했던 연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꽃이 아니던가.

점점 더 믿을 수가 없었다.

권채하라는 남자가, 이런 꽃 한 송이에 그렇게 깊은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저마저도 잊고 있던 은방울꽃의 의미를, 그가 이토록 절절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니.

어쩐지 몸이 휘청이는 바람에 설원은 저도 모르게 간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파는 생각보다 딱딱했다.

안에 소파를 놔둔 걸 보면 오래 앉아 있었던 게 아닐까 짐작하며, 설원은 정면을 응시했다.

뜻밖에도 이 자리에서는 바로 창문이 보였다.

물끄러미 창 너머를 바라보던 설원은, 또 다른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여기선 정원이 아주 잘 보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보이는 시야는 바로 설원이 늘 꽃을 만지던 곳이었다.

정확히 그녀가 정원을 가꿀 때의 동선, 그만큼의 시야각이 창 너머에 펼쳐져 있었다.

대체 이 장소의 근본적인 의미는 뭘까.

이것을 풀어줄 사람이 아직 바깥에 있다는 것이 떠올라 설원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다급한 손길로 별채의 문을 열었다.


“정 비서님…….”

“이제 좀 믿어지십니까?”

기다렸다는 듯, 너그러운 정 비서의 얼굴이 그녀를 반겼다.


“……이곳은 채하 씨가 만든 건가요?”

“그렇습니다. 작은 사모님이 그렇게 떠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사장님이 이 별채를 만들었죠. 여기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덜 괴롭다 하시더군요.”

“…….”

“하지만 결국 제가 여기를 잠갔죠. 왜인지 아십니까?”

정 비서의 질문에 설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리가 있겠는가.

이 문을 열고 난 뒤 알게 된 권채하는, 제가 원래 알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한없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정 비서가 진실을 털어놓았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이 작은 공간에 틀어박히는 날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날도 늘었지요. 특히 작은 사모님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엔 이 안에서 내리 술을 마셨고요.”

“결혼기념일…….”

“네. 허 여사님께서 사람을 보내 부숴버리겠다며 소란을 피운 일도 있었을 정도죠. 그 이후론 아무도 이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했습니다. 저조차도요.”

이게 뭐라고, 이 작은 공간 하나가 뭐라고.

설원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다 작년 결혼기념일이었죠. 이 안에서 이틀인가를 뜬 눈으로 새우더니만, 결국 혼자서 차를 타고 양양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몸을 던지려고 했죠. 작은 사모님이 떨어졌다던 바로 그 방파제에서요.”

“아…….”

나지막하면서도 깊은 한숨이 설원의 입가에서 터져 나왔다.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권채하가 자신을 따라가려 했다니, 정작 그녀는 진짜 죽은 것도 아니었거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제가 여길 잠그고, 열쇠를 맡아두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 하나 죽겠다 싶었거든요. 직접 보셨으니 제가 드리는 말씀이 과장이 아니란 건 잘 아실 겁니다. 부사장님은 장장 5년을 작은 사모님을 그리워하며 사셨습니다.”

툭, 하고 기어이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를 위해 수절했다는 말은 진실보다 더한 진실이었다.

너무 농도 짙어 질식할 것만 같은 진심이, 이 정원 안쪽에 이토록 비밀리에 숨겨져 있었다.


“부사장님의 진심을 사모님께서 부디 알아주셨으면 했습니다. 지금 작은 사모님을 보내는 심정은,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일 테니까요.”

목이 메어와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가짜 죽음 앞에서도 이토록 힘겨워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를 보내주겠다 했다. 용서해달라 했다.

쏟아지는 눈물 사이로 정 비서가 묵직하게 마지막 한마디를 건넸다.


“어머님의 유서는 탁자 아래 서랍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제부턴 온전히 작은 사모님의 선택이니 저는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그저 이 늙은이가, 보다 못해 한 말씀 드린 것뿐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

해가 지면 정원에는 알록달록 예쁜 조명이 들어왔다.

우주가 캠핑에 다녀온 뒤로 조명을 달고 싶다 졸라서 장식해둔 것이었다.

초가을의 바람이 부는 저녁.

어김없이 오늘도 정원에 반짝이는 불빛들이 켜졌다.

그리고 그 끝에는 그녀의 남편, 권채하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민설원…….”

그의 귀가를 확인한 설원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하가 돌아오는 이 순간까지, 별채 안을 떠나지 못하고 내내 기다렸던 참이었다.

임무를 모두 마치고 돌아가는 정 비서에게 그녀는 부탁을 하나 건넸다.

오늘 저 대신 우주를 데리러 가서 그의 집에서 재워 달라고.

세쌍둥이 손주들이 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라며 정 비서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 덕에 설원은 지금까지 혼자서 오롯이 앉아 채하를 기다릴 수 있었다.

별채 안의 그녀를 발견한 그가 단걸음에 이쪽으로 다가왔다.

떠나지 않은 사실에 놀란 건지, 아니면 별채가 열렸다는 사실에 놀란 건지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미묘했다.

이윽고 채하가 설원의 앞에 와 마주 섰다.

비처럼 흘린 눈물 탓에 촉촉이 젖은 눈망울로 설원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굳이 설명을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이 안의 것들을 보고도 모른다면, 눈과 가슴이 존재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막상 시선을 마주하자 그는 체념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들켰네. 내가 얼마나 민설원이라는 여자한테 미친놈인지 말이야.”

“채하 씨.”

“다 본 건가? 무섭다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저 장소는 나한텐 중요한 곳이야.”

“……알아요.”

들릴 듯 말 듯 설원이 속삭이자, 채하는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마를 천천히 쓸어올리며 한숨을 뱉었다.


“유서만 꺼내서 전해주랬더니, 엉뚱한 짓을 하셨군.”

“정 비서님을 탓하지 말아요. 정 비서님이 아니었으면 난 영영 몰랐을 뻔했어요. 당신이 이런…… 이렇게까지 나를…….”

“그래. 그리워했어.”

너무도 순순히, 채하가 털어놓았다.

어떤 가감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그리고 후회했어. 미치도록.”

“……채하 씨.”

채하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에게 몸을 붙였다.

곧 이를 악문 듯 억눌린 음성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당신,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게 뭔지 알아? 후회하는데, 후회의 대상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시곗바늘을 돌리고 싶은데 내가 신이 아니라는 거. 미칠 것 같은데 미치지도 않는다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덤덤하기 그지없음에도 꼭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눈빛 또한 강건하기 짝이 없음에도 당장 눈물을 떨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채하가 비스듬히 얼굴을 기울이며 설원의 이마를 향해 입술을 내렸다.

애처로운 숨결을 타고 더없이 애처로운 고해가 이어졌다.

어느새 울먹임이 가득 섞인, 거칠면서도 애타는 숨결이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했다고 말하지 못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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