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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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전율
2023.04.23.
용서…….
채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두 글자가 설원의 가슴을 후벼파는 듯했다.
평생 단 한 번이라도 그가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 일이 있었을까.
그게 하필 자신이라는 게, 아프면서도 더없이 혼란스러웠다.
빠르게 번지는 눈물 탓에 더는 그의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냉정해지리라 결심한 게 채 오 분도 되지 않았다.
지금 눈물을 먼저 떨구면 그 결심이 무색해질 터였다.
해서 설원은 애써 다급히 이 대화의 마무리를 지었다.
작별 인사를,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이거, 돌려줄게요.”
설원의 손바닥에 올려진 물건을 따라 채하의 시선이 느릿하게 내려왔다.
여린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은, 이 방으로 오기 전에 미리 빼둔 결혼반지였다.
퇴색된 의미는 아랑곳없이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다이아 반지.
채하는 잠시 말없이 그것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잠시 후, 곧고 기다란 손가락이 설원의 손바닥을 향해 뻗어왔다.
한데 그는 예상과 달리 반지를 가져가지 않았다.
“이건 그냥 가져가.”
반지를 가져가는 대신, 채하는 설원의 손을 곱게 접어 반지를 꼬옥 쥐여주었다.
그 뜻밖의 행동에 설원은 말을 잃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꼭 눈동자에 생채기가 난 사람처럼, 그는 시리디시린 눈으로 설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작별 선물이라 생각해. 어차피 내 손에 있으면 상처만 남길 테니까.”
작별 선물…….
손안에서 느껴지는 반지의 감촉이 왜인지 아팠지만, 여기서 더 설왕설래할 기력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반지를 그대로 쥔 채 설원은 둘 사이에 남은 마지막 용무를 꺼냈다.
본디 그녀를 이곳에 돌아오게 만들었던, 가장 큰 이유를.
“……어머니의 유서는요?”
“그건 내일 정 비서를 통해서 주도록 하지.”
“정 비서님이요?”
“그래. 당신 떠나기 전에 늦지 않도록 전하라고 해둘 테니, 걱정하지 마.”
“……알겠어요.”
제 어머니의 유서를 왜 정 비서를 통해서 준다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돌려받기만 하면 될 문제였다.
설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채하는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 역시 마찬가지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서로의 마지막 인사였다.
8년이라는 계약 결혼에 종지부를 찍는.
“부사장님.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아닙니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데요. 그것도 엄청 많이요.”
업무 보고차 들어왔던 정 실장이 채하의 안색을 살피며 우려를 표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건만, 역시 대를 이어 주변을 돌봐주는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내 가까이 다가온 정 실장이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부사장님. 이마가 벌겋습니다. 보아하니 열도 있는 모양인데, 병원에 가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됐습니다. 병원은 무슨.”
“그치만……!”
“정말로 됐습니다. 그보다, 지시한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아아, 그게 말입니다.”
정 실장은 여전히 우려 가득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인내심 있게 채하는 그의 보고를 기다렸다.
설원이 떠난다고 해서 진실을 파헤치는 일까지 끝나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슬픔과 원통함을 풀어주기 위해선 아직도 먼 길이 남아 있었다.
“당시 카지노 CCTV는 다 돌려봤습니다. 그런데 워낙 오래된 데다 사물함 안쪽까지는 촬영이 안 되어서 파악이 어렵더군요. 게다가 그놈 말대로 잃어버린 날짜를 특정 지을 수가 없어서…….”
“뭐 예상은 했습니다. 일단 계속 놈이 입을 열도록 하세요. 애초에 도둑맞았다는 말을 순순히 믿을 수는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이어 정 실장은 해열제를 사 오겠다며 부사장실을 나갔다.
약으로 해결될 리가 없는 문제였으나, 말릴 여력도 없어 그냥 두었다.
“하아…….”
그가 나가자마자 채하는 책상에 몸을 파묻었다.
힘없이 축 늘어지는 몸만큼이나 마음도 하릴없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한 이후부터 뇌리엔 오직 설원과 우주의 얼굴만이 맴돌았다.
놓을 수도, 보낼 수도 없는 존재.
하지만 어떻게 붙잡을 수가 있겠는가.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꾹 참던 설원의 눈망울을 떠올리면, 무력하고 또 무력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해서도 안 되었다.
민설원의, 세상에 하나뿐인 제 아내의 상처가 너무도 깊어서.
그 상처를 더 덧나지 않게 하려면 그저 놓아주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가 살아 돌아온 뒤로 두 번 다시 이별은 없으리라 여겼는데, 여전히 이별이 남아 있었다.
이토록 잔혹한 이별이.
*
겨우 캐리어 하나에 짐이 전부 들어갔다.
그나마도 대부분 우주의 것들이고, 자신의 것은 거의 없다 해도 무방했다.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잠기는 것을 확인한 뒤 설원은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까지가 잎새 어린이집 마지막 등원이었기에, 이제 우주를 데리러 갈 차례였다.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음에도, 친구들과 인사 잘하고 오겠다며 씩씩하게 나선 아이가 안쓰러워 설원은 괜스레 캐리어를 아이인 양 쓰다듬었다.
그 안에는 어젯밤 우주가 손수 곱게 접어 넣은 호랑이 옷과 호랑이 머리띠가 들어 있었다.
아이에게도 작별 선물이 되어버린 것 같아, 생각만으로도 입안이 썼다.
그때였다.
대문 쪽에서 익숙한 발소리와 함께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나오셨군요. 작은 사모님.”
“……정 비서님.”
캐리어에 머물고 있던 시선을 올리자, 거기엔 어젯밤 채하가 말한 대로 정 비서가 서 있었다.
반가워해야 할지, 서글퍼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설원은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세조차 엉거주춤했지만, 정 비서는 그런 것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늘 그랬듯 너그러운 얼굴을 하고서 그가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부사장님께서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유서를 전해드리라기에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떠나시는 겁니까?”
“……네. 그렇게 됐어요.”
“어쩔 수 없지요. 세상일이 뜻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니.”
연륜이 담긴 그의 눈빛에 설원은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왜 이리 좋은 사람들의 곁을 떠나야만 하는 건지, 떠나보내야만 하는 건지.
제 운명에 이제는 한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저, 어머니 유서는…….”
“아. 그렇죠. 그걸 드리러 왔죠. 여기 받으십시오.”
“……?”
곧바로 유서를 꺼낼 줄 알았는데, 정 비서의 손에는 다른 것이 들려 있었다.
보통 크기의 별다른 특색 없는 열쇠였다.
왜인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을 하고서, 그가 설원에게 그 열쇠를 건네주었다.
의아한 나머지 설원은 열쇠를 받아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만 끔벅거렸다.
유서를 달라고 했건만 왜 대뜸 열쇠를 주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정 비서가 말을 이었다.
“그건 저기 보이는 저 별채 열쇠입니다.”
또르르, 설원의 눈동자가 정 비서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갔다.
정원 가장 안쪽에 자리한 자그마한 건물이 언제나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채하가 절대 들어갈 생각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라던 별채.
어리둥절해하는 설원에게 정 비서가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유서는 저 안에 있습니다. 부득이하게 열쇠를 제가 갖고 있어서 말이지요.”
“……그렇군요.”
그래서였나. 정 비서를 통해 전해주겠다는 이유가 아마 이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왜 이 별채 열쇠를 채하 본인이 아닌 정 비서가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설원은 묻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권채하의 세상에서 빠져나가야 할 때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야 할 때.
한데 그런 그녀의 결심에 정 비서가 대뜸 제동을 걸었다.
“작은 사모님.”
“네?”
“그동안 끼고 계셨으니 묻는 말이지만, 혹시 결혼반지의 베젤 부분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반지요?”
듣고 보니 어젯밤 반지를 돌려주려 뺐을 때, 뭔가 위화감을 느끼기는 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와 채하가 네 번째 손가락에 다시 반지를 끼워주었을 때도, 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다.
‘베젤이 휘어 있다.’고.
“아, 네. 조금 휘어 있었던 모양이에요. 원래대로 해놓았다고는 했었어요.”
그때는 다른 신경 쓸 게 태산이라, 그 말을 유심히 듣지는 않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하긴 했다.
그렇게 비싼 반지의 베젤이 휘어 있을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일부러 압력을 가한 게 아니면.
‘잠깐…… 일부러라고?’
생각이 어딘가의 끄트머리에 닿자마자, 정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부사장님 가슴에 난 상처를 보신 적 있습니까?”
“상처…… 요?”
왜일까.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묘하게 불안하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더는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 그러나 반대로 반드시 알아야 할 것만 같은 예감.
그랬다. 눈앞에 단단히 잠겨 있는 저 별채의 문처럼, 무언가 숨겨진 진실이 설원이 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 비서는 바로 그것을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습니다. 상처요.”
“그건…….”
차마 모른다고 할 수가 없었다.
서로의 품에 빈틈없이 맞닿았을 때 느껴진 그 이질적인 감각.
창 너머 내리쬐는 햇빛 아래 선연했던 흔적을,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그녀였다.
채하의 가슴에 있는 그 상처가 제 것처럼 아팠던 설원이었다.
“표정을 보니 아시는 모양이군요. 하긴 모르실 수가 없겠죠. 계속 아물 새도 없이 덧나기만 했던 상처니까요.”
“……네?”
표정을 감추는 것도 잊고 설원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순간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다.
작고 뾰족한 것에 여러 번 찔린 것 같았던 그 상처…… 설마…….
“그 상처는 부사장님께서 직접 낸 상처입니다. 작은 사모님이 그렇게 떠나신 후, 두고 가신 결혼반지의 베젤을 휘어 트려서 목걸이로 거셨죠. 그러고는 자기 가슴을 매번 찔렀습니다. 작은 사모님이 떠오를 때마다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어서요.”
“그게 무슨…….”
금시초문이었다. 게다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권채하가 제 가슴에 직접 상처를 냈다고?
그것도 자신이 떠오를 때마다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어서……?
마침내, 본질적인 의문 하나가 설원의 가슴 한가운데 동동 떠올랐다.
동시에 꼭 재촉하는 것처럼 정 비서가 그녀의 손 쪽으로 열쇠를 내밀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부사장님은 작은 사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사모님께서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부사장님이 얼마나 괴로운 시간을 보냈는지, 제 부족한 말솜씨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죠. 그래서 이 열쇠를 드리는 겁니다.”
“…….”
“열어보세요. 직접 문을 열고, 부사장님의 진심을 확인해 보십시오. 그 후에도 떠나시겠다면, 전 붙잡지 않겠습니다.”
홀린 듯 설원은 그 열쇠를 받아들였다.
바로 두어 발짝 앞에, 회벽이 칠해진 별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요 몇 달간 늘 봐왔던 건물임에도 왜인지 무척이나 낯설었다.
떨리는 손으로 설원은 열쇠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돌아갔다.
마침내 문이 열린 순간, 설원의 등줄기에 강한 전율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