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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용서해 줘 (75/111)


75. 용서해 줘
2023.04.19.


세 사람의 팽팽한 긴장을 깬 건 갑작스레 들려온 우주의 울음소리였다.

우주가 잎새 어린이집 현관에서 달려 나오더니, 설원의 다리를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엄마. 대왕 아빠. 재윤 아빠. 왜 싸우는 거예요? 네?”

“……우주야.”

“우주는 싸우는 거 싫어요.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고 싶단 말이에요.”

당황한 나머지 조금 전까지 날을 세우던 두 남자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엉엉 우는 우주를 달랠 생각도 못 한 채 서 있는 둘을 두고, 설원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저를 꼭 안고 있는 우주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기 강아지처럼 보드라운 머리카락.

손끝에 닿는 그 감각이 설원을 또다시 일깨웠다.

미세하게 흔들리려던 마음이, 그 머리카락을 만지자 거짓말처럼 단단해졌다.

어젯밤 잠 못 들고 꼬리를 물던 생각의 끝은 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지키자는 것이 아니었던가.


“우주야. 싸우는 거 아니야. 어른들끼리 얘기하는 거야.”

“……진짜예요?”

“그럼. 자, 우주는 오늘 엄마랑 가자.”

설원이 굳은 결심을 담은 손으로 우주의 고사리 같은 손을 꼬옥 붙들었다.

오늘 우주를 데리러 온 것은 갈 곳이 있어서였다.

그녀는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재윤과 채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주는 내가 데리고 돌아갈게요. 두 사람도 일 보세요.”

“설원아……!”

“…….”

더 대꾸하는 대신 설원은 우주의 손을 잡고 두 남자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어차피 제가 갈 길을 정하는 데에는 누구의 의견도 필요 없었다.

그녀는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자, 우리 우주 착하지. 뚝.”

“으응…….”

택시를 타자마자 설원은 우주의 커다란 눈망울에 그득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싸우는 게 아니라고 달래주긴 했지만, 아직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훌쩍거릴 때마다 작은 가슴이 들썩거렸다.

그 모습에 찢어질 듯 마음이 아팠으나 이제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도 한계였다.


“우주야.”

“네. 엄마.”

“우주하고 엄마는 섬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정말이에요? 우리 그럼 여기서 계속 살아요?”

눈물로 번져 있던 말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가슴이 더욱 짠해 왔지만, 지금은 아이에게 괜한 희망을 불어넣고 싶지 않았다.


“아니. 우주랑 엄마는 다른 데로 갈 거야. 엄마가 어렸을 때 살았던 곳.”

“다른 데…….”

충격을 받았는지 우주의 입이 벌어졌다.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설원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엄마의 엄마랑 아빠가 행복하게 사셨던 곳이야. 거기서 엄마를 낳았고, 그래서 이렇게 예쁜 우리 우주도 태어날 수 있었지.”

“…….”

“미안해. 우주한테 아빠를 만들어주지 못해서. 대신 엄마랑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 응?”

“우주는…….”

“엄마가 대왕 아빠보다 더, 재윤 아빠보다 더, 2호, 3호, 4호, 5호 아빠들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이 우리 우주를 사랑해줄게.”

이런 말이 아이에게 위안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 방도가 없다는 것도.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넘치게 사랑해주겠다는, 진심뿐이었다.

제 눈에도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아 설원이 손을 눈가로 가져가려 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손보다 먼저, 자그맣고 따스한 우주의 손가락이 눈가에 닿았다.


“우주야…….”

놀란 설원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서러움에 여전히 작은 몸을 들썩이면서도, 우주는 의젓하게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제법 듬직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면서.


“울지 마요. 엄마. 우주도 엄마를 엄청 엄청 사랑해요~ 우주는 엄마하고 살 거예요.”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숨기기 힘들어, 설원은 휙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도 우주의 작은 손은 그녀의 손을 토닥이듯 꼭 잡고 있었다.

사랑스러우면서도 더없이 애틋한 위로였다.


 

*



“설원! 연락도 없이 웬일이에요. 우리 꼬마 왕자님까지 데리고?”

로라 앤 제임스의 통유리 문을 통과하자마자, 물뿌리개를 들고 있던 로라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파트타임으로 간간이 하던 일들도 최근 채하와 시간을 보내느라 줄였던 통에, 제법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제임스는요?”

설원이 두리번거리자 로라가 뒤쪽 정원을 가리켰다.


“화분에 물 주러 갔어요. 금방 올 거예요. 오, 저기 왔네요! 그, 뭐더라. 한국 속담에 뭐가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는데.”

“우주가 알아요. 호랑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와요~.”

정말로 때마침 제임스가 정원에서 이쪽 본관으로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우주를 발견한 그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번졌다.


“오오. 귀여운 베이비 왔구나.”

“네! 제임스 아저씨~ 우주 왔어요!”

기운차게 대답하며 우주가 쪼르르 제임스를 향해 달려갔다.

지난번에 제임스 부부 집에서 하룻밤을 재웠더니, 부쩍 친해진 모양이었다.

다녀와서도 집에서 꽃향기가 난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던 우주였다.

곧 우주를 목말 태운 채로 제임스가 빙글거리며 다가왔다.


“오늘도 미스터 권이랑 데이트 가는 건가? 그럼 우주는 우리가 또 맡아줄 수 있는데 말이죠.”

“……제임스. 로라.”

“으음? 틀렸나 보네.”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제임스가 우주를 번쩍 들어 기다란 통나무 테이블 위에 앉혀놓았다.

그러고는 설원과 로라에게도 앉으란 손짓을 했다.

테이블에 둘러앉자마자 설원이 지체 없이 입술을 뗐다.


“저, 우주랑 고향으로 돌아갈까 해요.”

“고향? 홈타운?”

“네. 여기서 제법 멀어서…… 자주 보긴 힘들 거예요. 그래서 인사할 겸 왔어요.”

“어머, 설원. 그럼 미스터 권은…….”

말을 이으려던 로라가 제임스의 눈짓에 입을 닫았다.

설원이 건네는 ‘인사’가 무슨 뜻인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그녀는 머쓱하게 눈을 끔벅였다.


“언제 떠날 생각이죠, 설원?”

사람 좋은 미소를 물씬 지으며 제임스가 다정하게 물었다.


“최대한 빨리 가려고 해요. 일단 근처에 가서 머물면서 살 집도 알아보고…….”

“흠. 그렇게 서둘러서?”

“……네. 사정이 좀 생겼어요.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항상 멋대로 떠나고.”

“괜찮아요. 언제든 멋대로 돌아와도 되니까.”

“제임스…….”

어른의 심각한 대화에 끼어들지 않은 채, 우주는 테이블 위의 유리 꽃병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기특했지만, 그만큼 마음도 아팠다.

얼마든지 어리광을 부리게 해주고 싶었는데.

로라와 제임스의 다정함에 또 마음이 약해질까 싶어, 설원은 인사를 서둘러 갈무리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돌아온 뒤에도 늘 잘해주셔서 덕분에 잘 있다 가요. 고향에 가서도 잊지 않을게요.”

“설원, 진짜로…… 진짜로 가는 거예요?”

결국 서운함을 참지 못한 로라가 아쉬움을 토해냈다.

그녀의 밝고 따스한 갈색 눈을 바라보며, 설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세상에는 회복되지 않는 상처도 있는 법인데.”

“……설원.”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종종 안부 전할게요. 우주야. 이만 가자.”

“벌써 가려고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설원을 따라 로라도 얼른 몸을 일으켰다.

설원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지금 제일 바쁜 시간이잖아요. 얼굴은 뵙고 인사드려야 할 것 같아서 온 거예요.”

“아…….”

“그럼 로라, 제임스. 잘 지내요. 우주야. 인사드려야지.”

“로라 아주머니, 제임스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우주가 엄청 엄청 보고 싶을 거예요.”

“오, 우리 베이비…… 어쩌면 좋아.”

우주의 말간 뺨에 얼굴을 비비며 로라가 한없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인사를 끝내고 나가는 설원과 우주를, 제임스는 멀거니 지켜보았다.

세상에는 회복되지 않는 상처도 있다는 설원의 말을 되새기면서.

맞는 말이었다. 방금 다녀온 정원에서도 확인하지 않았는가.

어떤 식물은 이미 죽어버려서 아무리 햇볕을 쬐고 물을 주어도 살아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시든 꽃을 뽑아낸 땅엔 새롭게 싹을 심을 수 있지.”

“응?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달링.”

“아니야. 그냥…… 조금 희망을 가져봤어. 자,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할까?”

그렇게 말하며 제임스는 방금 뒤쪽 정원에서 가져온 작은 화분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아주 연약하지만, 초록빛이 선명하게 갓 피어난 새싹이었다.

*

며칠 뒤 밤.

짐을 대충 정리한 설원은 마침내 미뤄왔던 일을 하기 위해 일어섰다.

비록 방은 떨어져 있지만, 채하가 잠들지 않았으리라는 건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심장의 고동을 빠르게 만들곤 했던 듣기 좋은 음성.

설원은 한번 심호흡을 했다.

기껏 가다듬고 가다듬은 마음이 행여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크 안 하고 그냥 들어와도 된다고 했잖아.”

“권채하 씨.”

“그렇게 부르지 말고 이름만 부르라고도 했고.”

읽고 있던 책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채하가 일어서서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방 안에 어른거리는 조명이 오늘따라 반가웠다.

자신의 표정을 조금쯤은 감춰줄 수 있을 테니까.


“나랑 우주는 내일 떠날 거예요.”

“……떠나?”

생전 처음 듣는 단어라도 되는 것처럼 채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지금은 그의 질문을 받을 여력조차 없었기에, 설원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 부모님의 고향으로 갈 생각이에요. 시골이긴 하지만, 섬보다는 살기 편할 거고 익숙한 곳이기도 하니까요.”

“민설원.”

“떠나야 하는 이유는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생각해요. 당신은 나를 붙잡을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애초에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다 여기면 그만이에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조명 아래 그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애써 외면하며 설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신은 나를 만나서 힘든 적 없었잖아요. 나는 지옥이었어요. 이제 더는 지옥 속에 살고 싶지 않아요.”

“…….”

권채하라는 남자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가 그녀에게 냉정했던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냉정한 순간은 바로 지금뿐이었다.

그러니 한 번쯤은 냉정해도 된다고, 매몰차도 된다고, 설원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우리 결혼은 여기서 끝내요. 당신 쪽에서 먼저 이혼 절차를 밟아주면 좋겠어요. 그게 아마 채운에 있어서 더 나은 모양새가 될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도…….”

“그런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어.”

“……어쨌든 부탁해요.”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설원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오랜 관계의 매듭을 짓는 일이 그에게도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터였다.

이윽고 아주 천천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옥이라고 했나?”

“……그래요.”

일순 그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우는 듯했다.


“……좋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내 곁에 있는 게 그토록 힘들다면, 보내줄게.”

뜻밖이었다. 무어라 더 토를 달거나 막을 줄로만 예상했다.

적어도 우주의 친권이라든가 하는 예민한 문제들을 짚고 넘어갈 줄 알았다.

한데 그는 이미 마음을 정해두었던 것처럼 순순히 그녀를 보내주겠다 했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부탁이요?”

“그래.”

눈앞의 권채하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면 착각일까.

설원이 빤히 응시하자, 그가 다시금 간곡하게 그 부탁을 건네왔다.

참으로 아프고 아린 부탁이었다.


“나를 용서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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