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 죽어도 못 보내 (74/111)


74. 죽어도 못 보내
2023.04.16.



“엄마. 엄마!”

“응. 우주야. 왜?”

우주의 노란 원복을 정돈해주며 설원이 다정스레 아이를 바라보았다.

잠을 설친 저와는 달리 푹 잘 잤는지, 통통한 두 뺨이 유독 사랑스러웠다.

한데 왜인지 말간 눈빛에는 묘하게 근심이 서려 있었다.

곧 우주가 오물오물 작은 입술을 열고 그 근심의 이유를 드러냈다.


“응~ 엄마. 대왕 아빠랑 싸웠어요?”

“……뭐?”

흠칫 놀란 설원이 등 뒤쪽을 힐끗 살폈다.

아침에 일어난 뒤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던 채하가, 무심히 넥타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원래 엄마가 대왕 아빠 리본 묶어줬잖아요. 엄청 엄청 사이좋게요! 그런데 왜 오늘은 안 묶어줘요?”

“아…….”

평소와 다른 작은 변화도 감지한 걸 보니, 역시 아이의 눈은 속이기 어렵단 생각이 들었다.

어색함을 들킬까 봐 일부러 아침 식사도 엇갈리게 한 그녀였다.

최대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태연한 척했는데 이런 데에서 티가 나다니.

그렇다고 이제 와서 채하의 넥타이를 매어 주는 일 따윈 할 수 없었다.


“오늘은 대왕 아빠가 직접 묶고 싶대.”

“으응~.”

설원의 대답이 신통치 않았는지, 우주가 빤히 채하 쪽을 쳐다보았다.

왜인지 그는 혼자 잘 매던 넥타이를 비뚤게 매어놓은 채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순식간에 우주가 쪼르르 채하를 향해 달려갔다.


“대왕 아빠! 우주가 해줄게요.”

“아…….”

채하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무릎을 대고 바닥에 앉았다.

그런 그의 넥타이를 우주가 자그마한 손으로 반듯하게 해주는 것을, 설원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눈길을 돌렸다.

지금은 저렇게 누가 봐도 다정한 부자의 모습을 보는 것이 힘겨웠기에.

대왕 아빠와 여기서 백 년을 함께 살고 싶다던 우주의 바람은, 아마 이뤄지지 않을 터였다.

이루어줄 수 없을 터였다.

아이를 향한 다정하기 그지없는 채하의 음성이, 설원의 귓가에도 사뿐히 내려앉았다.


“자, 그럼 가자. 꼬마. 대왕 아빠가 태워다줄게.”

“응! 우주 대왕 아빠랑 어린이집 갈래요!”

“…….”

그가 우주의 손을 잡은 채 설원을 힐끗 보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저 말없이 거실 창을 향할 뿐이었다.

녹음으로 가득했던 정원은 어느덧 가을의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계절이 모르는 새 이미 성큼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여름은 끝났다.

그저 잠시 한여름 밤의 좋은 꿈을 꾸었던 것뿐이라고, 설원은 자신을 다독였다.

꿈은 꿈일 뿐. 이번만큼은 뿌리내리지 말고 바람이 되리라고.

*



“어라?”

잎새 어린이집의 쉬는 시간.

등원 버스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앉아 있던 재윤의 시야에 문득 우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동글동글 앙증맞은 그 실루엣을 보자마자 입가가 절로 둥글어졌다.

한데 재윤은 금세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들과 그네를 타고 시소를 타는 것을 좋아하던 우주가, 왜인지 혼자서 어린이집 뜰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게다가 평소의 밝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의기소침한 분위기였다.

의아해진 재윤은 냉큼 차에서 뛰어내려 우주에게로 다가갔다.


“우리 우주, 혼자서 뭐 해?”

“……재윤 아빠!”

우주가 고개를 들자, 작은 손에 꼬옥 들린 나무 막대기가 보였다.

그 나무 막대기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우주가 그려놓은 그림을 보는 재윤의 마음이 일순 따끔했다.

나란히 바짝 붙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남녀.

그것은 누가 봐도 설원과 채하의 모습이었다.

‘부부’, 혹은 ‘부모님’이라는 제목을 붙이면 딱 좋을 듯한 그런 그림.

이런 걸 그리면서 아이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니, 얕은 시기심보다 걱정이 앞선 재윤이 얼른 키를 낮추고 앉았다.


“우리 우주,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으응~.”

시무룩하게 우주가 나무 막대기를 든 손을 떨어트리며 고개를 떨궜다.

그러다가 곧 다시 얼굴을 들고는 재윤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재윤 아빠. 우주랑 엄마 데리고 섬으로 갈 거예요?”

“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재윤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당황하는 저를 보며 더욱 궁금해졌는지, 우주가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이제 우주한테는 대왕 아빠도 있잖아요. 그런데 우주가 섬으로 돌아가면 대왕 아빠하고는 못 만나는 거 아니에요?”

“아. 그게…….”

“친구들은 다 엄마랑 아빠랑 한집에서 같이 산대요. 우주는 여기 와서 엄마랑 대왕 아빠랑 같이 살고 있으니까……. 그럼 대왕 아빠가 우주 아빠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너무도 순수한 의문이었지만, 진실을 꿰뚫는 그 물음에 재윤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마 눈앞의 이 아이는 자연스럽게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 듯했다.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는 동안 우주가 접한 환경은 본디 이 아이가 누렸어야 할 평범한 가족의 그것이었을 테니까.

재윤이 답하지 않자, 우주는 마치 긍정을 요구하기라도 하듯 쫑알거렸다.

그것은 전부 아이의 순수한 바람이 가득 담긴 궁금증이었다.


“엄마랑 대왕 아빠는 드레스 입고 사진도 찍었어요. 그거 하면 부부라고 어른들이 그때 그랬어요. 재윤 아빠. 부부는 결혼한 거 아니에요? 맞죠?”

“…….”

“그럼 부부는 같이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재윤 아빠.”

“갑자기 왜 그런 게 궁금해. 우주야?”

다정하게 묻자 우주가 다시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쭉 내려간 작은 입꼬리가 어쩐지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엄마가 대왕 아빠랑 우주랑 오래오래 같이 살기로 약속했는데, 둘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웃지도 않아요. 싸웠나 봐요.”

싸웠다…….

뜻밖의 이야기에 재윤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단호하게 채하를 택한 설원이었는데.

어쩐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어 재윤은 직접 확인해보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설원이 채하의 곁에서 행복하다는 전제하에서였다.


“우주야. 오늘 엄마가 데리러 온다고 했니?”

“네. 엄마 오늘은 꽃집에도 안 간다고 그랬어요. 우주 데리러 온다고요.”

“그렇구나. 알겠어. 이따가 엄마랑 얘기해볼게.”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우주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에 슬며시 어린 기대감을, 재윤은 애써 외면했다.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우주가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였으니까.


 

*



“설원아!”

“……재윤 씨?”

제 이름을 힘차게 부르는 목소리에 설원은 퍼뜩 몽롱하던 의식에서 깨어났다.

내내 생각에 잠겨 있느라, 하마터면 어린이집 앞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일찍 왔네. 아직 끝나려면 멀었는데.”

“아…….”

설원이 멍하니 잎새 어린이집 지붕에 달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우주가 나오려면 20분은 더 기다려야 할 듯했다.

텅 빈 집에 있는 것이 못내 불편해 평소보다 훨씬 서둘렀더니, 하원 시간을 한참 남겨두고 도착하고 말았다.

휘휘 손을 흔들던 재윤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싱겁게 웃어 보였다.


“뭐, 나야 좋지. 안 그래도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재윤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것을 꺼내 내밀었다.

작은 리본 매듭이 달린 종이 상자였다.


“이게 뭐예요?”

“생일 선물. 지난번에 못 줬잖아. 어머니랑 아버지는 나중에 섬에 돌아오면 주신다고 전해주래.”

“선물…….”

그랬었다. 불과 얼마 전에만 해도 꿈 같은 생일을 보냈던 그녀였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행복한 날은 손꼽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픈 기억만 하나 추가했다는 기분이 들어 서글퍼졌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걸까.

이마 위로 재윤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원아. 역시 섬으로 돌아가지 않을래?”

“…….”

“힘들면 무리하지 마. 말했잖아. 나는 네가 힘든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 우주랑 네 자리는 언제나 있으니까 섬에서 평화롭게 예전처럼 살면 돼.”

“재윤 씨…….”

“그리고 우주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 섬으로 돌아가면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해 주고, 나도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할게.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가자. 너랑 우주가 아픈 일 같은 거 절대 없게 내가 보호해 줄 테니까. 응? 설원아.”

진심이 묻어나는 재윤의 말에 설원은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정말로 그런 것일까. 섬으로 돌아가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저를 모함하고 해하는 사람들을 더는 마주치지 않고, 우주에게 혼란을 주지 않고, 제 마음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일도 없이.

권채하라는 남자를 이제 두 번 다시 보지 않고, 정말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는…….”

머뭇거림을 느낀 재윤이 참지 못하고 잇새로 감정을 표출했다.


“설원아. 너 힘들잖아. 권채하 때문에 이렇게 아파하잖아! 지금 네가 얼마나 부서질 것 같은 눈을 하고 서 있는지, 알기나 해? 네 이런 모습 보는 거,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남의 가정일에 오지랖은 여전하군.”

“……!”

불쑥 끼어든 낮은 음성에, 설원과 재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게도 거기에 서 있는 것은 권채하였다.

오늘은 마중을 안 올 줄 알았는데 무척이나 뜻밖이었다.

불쾌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으며, 채하가 성큼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어 잔뜩 날 선 목소리가 재윤을 향했다.


“분명 전에 경고했을 텐데. 선 넘지 말라고.”

“글쎄. 그렇게 말할 자격이 권채하 씨한테 있는지는 의문인데.”

“자격을 운운할 자격조차 그쪽한테는 없다는 걸 분명히 해야겠군.”

팽팽한 긴장이 두 남자 사이에 감돌았다.

‘전에 경고했다.’는 채하의 말에 설원은 둘 사이에 이미 모종의 무언가가 오갔음을 깨달았다.

재윤의 이마에 드물게 핏줄이 곤두섰다.

몇 년이나 재윤을 봐 왔지만, 그가 이렇게 상대를 향한 적의를 드러내는 걸 본 적은 없었다.

무어라 말릴 새도 없이 재윤이 설원의 앞을 막아섰다.

마치 권채하라는 남자의 시야에서 그녀의 존재를 숨기려는 것처럼.


“……지금 뭐 하는 거지?”

그 행동이 채하의 심기를 한없이 거슬렀는지, 그의 목소리가 분노로 낮게 깔렸다.


“나도 분명히 말하지. 설원이를 상처 주는 남자한테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어.”

“꼭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이름뿐인 남편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데. 아내도 못 지키고, 아이도 못 지키는 남편도 남편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 말이야.”

“……최재윤.”

“그만, 그만 해요.”

걷잡을 수 없이 불거지는 싸움에 설원이 제동을 걸었다.

조금 있으면 이제 우주도 나올 텐데,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아이에게 이런 장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남자는 아예 끝을 보겠다는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채하가 최종 통보를 하듯 한 발짝 위협적으로 재윤에게 다가섰다.


“비켜. 내 아내도, 내 아이도 내가 데리고 갈 테니까.”

“아니. 못 보내. 권채하 씨, 당신한테는 절대로.”

재윤 또한 절대 지지 않을 기세였다.

설원은 무언의 의지를 담아 채하를 곧게 바라보았다.

그만하라는, 이러지 말라는 뜻으로.

한데 그 시선 끝의 권채하는 전혀 다른 대응을 해 왔다.

성큼 설원에게로 다가온 그가 그녀에게 읍소하듯, 목 안에서부터 으르렁거렸다.


“민설원은, 죽어도 못 보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