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73/111)
73.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73/111)
73.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2023.04.12.
“아오, 이 여자가 정말!”
“이거 놔, 놓으라니까!”
상황은 점점 더 열악하게 돌아갔다.
남자에게서 핸드폰을 빼앗기는커녕 설원은 되레 단단히 손목을 붙들리고 말았다.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지만, 안타깝게도 타고난 체격과 힘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다.
“제기랄!”
남자가 여러 차례 육두문자를 내뱉은 뒤, 마지막으로 담배꽁초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침을 퉤 뱉었다.
험악하고 우락부락한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아이 씨, 일이 귀찮게 돌아가네.”
“당장 이 손 놔! 가야 해! 빨리 가야…….”
[민설원 씨.]
“……!”
갑작스레 귓가에 내려앉은 음성에 설원의 몸이 흠칫 굳었다.
남자가 저를 단단히 포박한 채로 귀에다 핸드폰을 대준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백사라였다.
제 어머니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던 여자.
“당신…….”
순간 울컥, 하고 가슴 속에서 분노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설원 자신마저 단번에 삼켜버릴 것 같은 거대한 감정의 물결이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설원이 그녀에게 캐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제발 아니기를, 제가 오해한 것이기를.
그러나 기대는 곧바로 잔인하게 산산조각 나버렸다.
[아아. 유감이네. 그렇게 됐어. 하지만 그쪽 어머니 명줄이 거기까진 걸 내가 어쩌겠어.]
“그렇게 되다니…… 무슨? 대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죠?”
[들은 그대로야. 죽었어.]
“죽……었다?”
[그래. 뭐, 엄연히 말하면 이미 옛날에 갔을 목숨을 채운 가에 기생한 덕분에 연명한 거 아닌가? 그러니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민설원 씨.]
지금 자신과 대화하고 있는 게 정말로 사람이 맞나 싶어, 어둠 속에서 설원은 눈을 연신 깜박였다.
어둠 속에서 차츰 빛에 익숙해지듯, 그제야 일의 돌아가는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다.
속았다. 저는 이 악마 같은 여자에게 속은 것이다.
어머니를 살려줄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이었던가.
애초에 수십 년을 투병했던 어머니였다.
그동안 치료를 위해 아버지의 연금도 당겨다 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다 해보았다.
수술이든 명의든 유효한 치료법이 있었다면 설원이 몰랐을 리도, 시도하지 않았을 리도 없었는데.
절망에 빠져 벼랑 끝에 몰린 나머지 어리석게도 제 발밑을 보지 못했다.
진짜 위험은 바로 지척에 있었건만.
생사를 오가는 위기에 그야말로 눈이 멀고 귀가 멀었던 셈이었다.
뒤늦은 깨달음에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사시나무처럼 몸이 떨려왔다.
제가 없는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마지막으로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토록 처참한 현실 앞에서, 설원이 해야 할 일은 응당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 결심을 꺼내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민설원 씨. 혹여나 돌아올 생각이라면 오산이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난 지금 당장 돌아갈 거예요!”
[흐응.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그쪽은 어제 오후에 방파제 아래로 차와 함께 추락했어. 이미 경찰에도 사고가 접수됐고 채운 가에도 소식이 간 지 오래라고.]
흡, 설원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사실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그녀를 막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뭐든 변명하면 그만이니까.”
[아니. 민설원. 당신은 절대 여기로 다시 올 수 없어.]
백사라가 그 말을 뱉음과 동시에 저를 붙든 남자의 손아귀에 힘이 부쩍 실리는 게 느껴졌다.
이미 둘 사이에는 이야기가 끝난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저를 좋게 데려다줄 의지가 없었으리라는 걸, 설원은 이 순간 실감했다.
[말했잖아. 당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 되었다고.]
“흡!”
순식간에 호흡이 힘들어졌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설원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마치 눈으로 보고,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희 섞인 백사라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잘 들어. 민설원 씨. 이미 죽은 어머니야 그렇다 치고, 당신 배 속의 그 아이. 지켜야 하지 않겠어?]
아이……. 그 단어에 설원은 불현듯 몸부림을 멈췄다.
그랬다. 자신의 배 속에는 지금 소중한 생명이 있지 않은가.
지금 제게 닥친 위험은 곧 아이에게 닥친 위험이나 마찬가지였다.
백사라의 협박이 연신 화살촉처럼 수화기 너머로 날아들었다.
[나는 인정을 베풀어주고 싶지만, 지금 그쪽이랑 있는 남자는 통제 불능의 망나니거든. 허튼짓을 했다간 민설원 씨와 아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지도 몰라.]
“읍, 으읍…….”
설원이 제 입을 틀어막고 있는 남자를 불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과연 단순한 심부름꾼이라기보단 위험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남자였다.
지금 여기서 당장 무슨 일을 당한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해 봐. 당신이 돌아오면 질색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이 일을 내가 설마 혼자서 꾸몄으리라 믿는 건 아니겠지? 우리 허 여사께서 얼마나 귀한 손주를 얻길 원하시는지 그쪽이 더 잘 알잖아.]
허영주…….
그 이름에 또다시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올랐다.
사람의 존재 가치를 매기는 것도 모자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까지 어처구니없는 잣대를 들이밀다니.
귀하고 귀하지 않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엄연히 이 아이는 제 손주거늘, 이런 협박을 당해야 하는 처지라는 게 기가 찼다.
[그쪽이 다시 돌아왔다간 그 아이, 절대 세상에 나올 수 없을 거야. 그러니 순순히 떠나서 얌전히 죽은 듯이 살아. 아, 이미 죽은 건가.]
백사라의 말투에는 점점 더 조롱기가 섞여갔다.
마치 입을 틀어막힌 설원이 하려는 말을 벌써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마침내 그녀가 이 일에 얽힌 진짜 속내를 드러냈다.
[내가 농담하는 게 아니란 건, 곧 깨닫게 될 거야. 감히 주제도 모르고 채하 씨의 곁을 3년이나 차지했던 대가라고 생각해.]
그 말을 끝으로 백사라와의 연결 또한 끊어졌다.
더불어 그것은 세상과의 단절이기도 했다.
이어진 며칠 간의 일들은 설원에게는 그야말로 끔찍한 악몽이었다.
남자는 그녀를 내팽개치듯 어딘가에 감금했고, 며칠 동안 코빼기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마시지 못했다.
날씨는 거의 초여름인 데다 아이를 가진 상태라 설원의 체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그곳은 그야말로 감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높은 나무 천장과 꿉꿉한 회벽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러, 입덧이 없는 그녀조차도 구역질을 참기 어려웠다.
손바닥만 한 창문 하나만이 겨우 공기가 들어오는 통로였다.
밖에서 굳게 잠긴 문은 아무리 안간힘을 써봐도 열리지 않았다.
장례식에 가지 못하게 감시를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버려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설원의 생명은 명백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배 속의 아이 또한.
이대로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아이를 살리기 위해선 도망쳐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며칠째인지도 모를 새벽.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설원은 겨우 찾아낸 벽돌로 창문 주변을 부수는 데 성공했다.
온몸에 멍이 들고 피가 흘렀지만, 마침내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설원의 몸에서 멀쩡한 곳은 오직 필사적으로 보호한 배뿐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강원도를 떠나 서해안의 작은 섬으로 향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지금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섬에 도착했을 때 설원은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재윤이 없었더라면, 재윤의 가족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들 모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렇게 설원은 작은 섬에 몸을 숨긴 채 세상에 없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다.
소중한 사람을 다시는 잃지 않기 위해, 이번만큼은 지키기 위해 아픈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닷바람은 끊임없이 불어와 세월이라는 모래를 축적했다.
배들은 끊임없이 오가며 섬 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갈매기의 날갯짓에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설원은 부둣가 너머 아득한 육지를 바라보았다.
보이지도 않는 그곳을, 그저 보고 또 보았다.
어느덧 몸의 상처는 아물고 귀여운 아기가 태어났다.
그녀의 세상, 그녀의 전부, 그녀의 우주였다.
1년, 2년, 3년, 4년, 5년……. 시간은 흐르고 풍경은 변해만 갔다.
익숙한 주변의 얼굴들은 대부분 바뀌었다.
고저 없이 차분하던 누군가의 목소리 대신, 맑고도 밝은 목소리가 설원의 세상을 채웠다.
화려한 도시의 공기는 희미해지고, 비릿한 섬의 냄새에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설원은 좀처럼 흘러갈 수 없었다.
한낱 바람처럼 흘러가길 그토록 바랐음에도, 마음은 기어이 나무가 되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녀는 같은 자리에 붙박여 버렸다.
권채하라는 땅을 떠나지 못하고.
이미 황무지가 되어버린 그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
“……내가 어리석었어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손을 잡았지만, 오히려 그 선택 때문에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어머니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오래 사는 게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한시라도 더 함께 있는 것이었을 텐데.”
설원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8년 전 계약 결혼을 택한 자신에 대한 후회와 자책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내내 그녀를 괴롭혔던 선택 또한.
“내가 욕심부리지 않았어야 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권채하 씨를 욕심내지 않았더라면…….”
슬픈 중얼거림을 끊고, 고통에 찬 듯한 채하의 목소리가 목을 긁으며 흘러나왔다.
“민설원. 그런 말은 하지 마. 당신을 욕심낸 건 나야. 그러니까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말은 하지 마.”
애처로운 부탁은 설원에게 가 닿지 못했다.
여전히 그렁그렁한 설원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마치 빗소리처럼 두 사람 사이를 적셨다.
“아뇨. 이제 채하 씨도 잘 알았잖아요. 당신 어머니가 나하고 우주한테, 그리고 우리 어머니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
“처음부터 내가 전부 잘못 생각했어요. 당신 곁으로 이렇게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니었는데. 우리는 애초에 만나지도 말았어야 할 사이였는데.”
채하의 눈빛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반면 설원의 눈망울은 눈물 속에서도 점점 단단해졌다.
꼭 그녀의 굳어지는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전 우주랑 같이 잘게요.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설원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건 떠나겠다는 뜻이냐고, 채하는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설원이 고개를 끄덕일 것만 같아서.
잔인했던 5년 전과 꼭 같이,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복도가 이렇게 길었던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 보았지만, 설원의 작은 등은 지척에 있음에도 닿지 않았다.
권채하. 그의 벼랑 끝은 아마도 이곳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