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악마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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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악마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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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악마의 속삭임
2023.04.09.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번쩍이는 외제 차 한 대가 불쑥 설원의 앞을 막아섰다.
이어 천천히 내려가는 창 너머로 한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백사라. 허영주가 설원 대신 늘 제 며느리처럼 끼고 다니는 여자.
그런지라 설원은 그녀를 익히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마주친 일 또한 빈번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차림의 그녀가 싱긋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민설원 씨.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다 알 수 있죠. 그쪽 집안일이 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
희미한 불쾌감을 애써 억누르며 설원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허영주와 마찬가지로 못마땅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왔기에, 제 속을 긁으러 왔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에는 반응하지 않는 게 제일이라는 걸, 설원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한데 백사라는 곧바로 정곡을 찔러왔다.
“돈, 필요하지 않아요? 치료비가 많이 들 텐데.”
어쩐지 지금 설원의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면 착각일까.
뭐가 됐든 아군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지라 설원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쪽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네요.”
그 대답에 백사라가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추켜올리곤 설원을 살피듯 뜯어 보았다.
늘 그랬듯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시선이었다.
“민설원 씨. 우리 터놓고 얘기해볼까요?”
“뭘 말인가요?”
“그쪽이 나타나기 전에, 내가 반쯤은 권채하 씨의 약혼자나 다름없었다는 사실. 잘 알고 있겠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죠?”
이제야 뭔가 대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느낀 설원이, 잔뜩 경계심을 세웠다.
백사라가 빛나는 제 손톱 끝을 어루만지며 그런 설원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손톱에 달린 큐빅만큼이나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민설원 씨가 권채하 씨와 조건부 결혼을 했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뜻밖의 선포에 설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놀랄 거 없어요. 어머님께서 저한테 직접 말씀해주신 거니까. 지금은 분가했다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한집에 살았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비릿한 웃음이 그녀의 입술 위로 떠올랐다.
“뭐, 어떻게 알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죠.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더 중요한 타이밍이랄까.”
“앞으로……라고요?”
“그래요. 이제 며칠 후면 그 계약 결혼, 끝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보아하니 이미 내막을 다 알고 온 모양새였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으나, 백사라는 충분히 흡족한 듯 미소를 흘렸다.
“설마 계약도 끝나는 와중에 몰염치하게 어머니의 치료비를 더 받아낼 생각은 아니겠죠?”
“아…….”
그제야 설원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챘다.
문득 3년 전, 채하에게 위자료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에게 금전적인 보상 따윌 더 바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원의 그런 마음을 일부러 자극이라도 하듯, 백사라는 날카롭게 추궁해왔다.
“뻔뻔스럽게 아무 사이도 아닌데, 어머니를 그 병원에 계속 모실 생각도 당연히 없을 테고요? 아무리 채하 씨가 그러라고 한다 해도 사람이 양심상 그러면 쓰나.”
“나는…….”
둘 사이의 계약 기간이 끝나도, 그와 상관없이 어머니를 치료해주겠다 했던 채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위독한 상황에서도 그 말이 유효할까.
아니, 애초에 그 약속이 지금도 유효할까.
불안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설원의 안에서부터 바깥까지 짙게 드리웠다.
반면 백사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민설원 씨 어머니를 쫓아내려고 온 게 아니니까.”
“네?”
“나는 그쪽한테 좋은 제안을 하러 온 거예요.”
“좋은…… 제안?”
“그래요. 당신 어머니, 내가 살려주죠.”
영문 모를 그녀의 말에 설원은 얼이 빠졌다.
어머니를 살려준다니, 심 원장조차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 어머니를 무슨 수로…….
길게 생각할 새도 없이 백사라는 빠르게 설원의 틈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실로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나랑 친한 의사 중에 희귀병에 해박한 사람이 하나 있어요. 외국에 오랫동안 있다가 중요한 VIP 수술 몇 건을 집도하러 잠시 귀국했죠. 그쪽 어머니 같은 면역성 질환을 주로 다뤘고요.”
“면역성 질환…….”
“그래요. 민설원 씨가 만일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특별히 그 의사에게 어머니 수술을 부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수술 같은 걸 할 수 있는 상태가…….”
“그래서, 그냥 저대로 죽도록 두고 보겠다는 건가요?”
설원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무엇을 재고 따지고 있단 말인가. 어머니가 생사를 오가는 이 와중에.
“흐음. 못 믿는 모양인데, 그 의사는 비슷한 질환 수술 성공 경력도 이미 많아요. 국내에 안 알려져서 그렇지. 어떡할래요? 워낙 바빠서 정해진 수술들만 끝내면 곧장 외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기회 같은 거 없어요.”
초조함에 목구멍이 바짝 조여와 설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어머니는 가망이 없을 터였다.
어머니를 살릴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좋아요. 뭘 해야 하죠?”
마치 미리 준비해 온 것처럼 그녀가 요구 사항을 명확히 전달했다.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잔인한 선언이었다.
권채하의 곁을 떠나라는 것. 그것도 아예 죽은 사람으로 위장해서.
“왜 그렇게까지…… 알잖아요. 어차피 며칠 후면 우리 계약은 끝나요. 권채하 씨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될 거고…….”
“아뇨. 당신, 아이를 가졌잖아요. 그나마 아직 채하 씨한테 말은 안 한 모양이지만.”
벌써 그 사실까지 귀에 들어간 건가.
백사라의 눈이 묘하게 빛나는 것이 무척이나 불길해, 설원은 아직 나오지도 않은 배를 슬며시 어루만졌다.
그 어색한 손길을 백사라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그 아이, 내가 채하 씨와 재혼할 때 당연히 걸림돌이 될 거 아니에요?”
재혼……. 왜일까.
가슴이 더 아플 수 없을 만큼 이미 아프다고 여겼는데, 그 말을 들으니 통증이 두 배가 되는 것만 같았다.
휘청이는 설원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백사라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성적으로 한번 생각해 봐요. 계약일 뿐인데, 덜컥 아이가 생겼다고 하면 채하 씨가 과연 반가워할까요? 게다가 어머님 반응은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을 테고.”
“…….”
반박할 수 없어 설원은 애꿎은 입술만 달싹였다.
슬프지만, 그것이 진실에 가장 가까울 터였다.
인정받지 못하는,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
하나뿐인 소중한 제 아이를 그런 식으로 세상에 나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히 떠나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쪽 어머니는 수술을 마치는 대로 적당히 시기를 봐서 그쪽한테 보내줄 테니까. 그저 숨어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정말…… 살려주는 거죠?”
“하아. 어지간히 못 믿네. 의심되면 그냥 가만히 저 상태로 죽게 두던지.”
백사라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리자 설원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떠날게요. 채하 씨 곁을 떠날 테니까……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제발…….”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요.”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설원의 눈가에 눈물이 그득히 고였다.
곧 백사라의 입가에서 잔인한 선고가 흘러나왔다.
‘어머니를 살려주는 대신 채하를 떠나 멀리 사라져라.’
그야말로 심장을 헤집는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평소엔 지극히 현명한 설원이었지만, 목숨이 일각에 달린 어머니 앞에서 판단력은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으려 했던 것이, 설원의 불찰이라면 불찰이었다.
*
“이봐. 차는 다 준비 끝났겠지?”
“……지시한 대로 했어요. 블랙박스는 진작 떼갔잖아요. 시킨 대로 제 옷가지랑 가방을 평소처럼 넣어놨고요.”
“좋아. 그럼 우리가 차를 밀고 올 동안 얌전히 숨죽이고 기다리셔.”
“알았어요.”
유독 인상이 더러운 남자와, 그가 데려온 똘마니들의 시선을 피해 설원은 몸을 숨겼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반지를 뺀 바람에 허전해진 네 번째 손가락을 문지르며 그녀는 애써 한숨을 삼켰다.
CCTV 하나 없는 인적 드문 방파제.
그 아래로 설원의 하얀 차가 추락하고 나면, 차의 주인인 그녀 또한 바다에 함께 추락한 것으로 여겨지리라.
이후엔 아마도 으레 이런 일이 그렇듯 실종 처리가 될 터였다.
마음에 걸리는 게 없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어머니의 목숨 앞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설원 자신이 진짜로 죽는 것도 아니었고, 어머니도 무사히 수술을 마치면 제 곁으로 돌아올 터였다.
권채하. 그와의 계약 기간이 며칠 빨리 끝나버리는 것뿐.
그것은 그에게 별문제도 되지 않을 게 자명했다.
어차피 설원이 살아서 곁을 떠나나, 죽어서 떠나나 중요한 일은 아닐 테니까.
백사라의 말대로 두 사람이 재혼하고 나면 민설원이라는 존재는 그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힐 것이었다.
그냥 모든 것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미련은 없었다. 없어야만 했다.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으며, 설원은 멀리서 제 차가 바다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꼭 그 장면이 권채하의 세상에서 제가 사라지는 것만 같아, 와중에도 가슴이 시렸다.
차를 밀어버린 똘마니들을 제외하고, 인상이 더러운 남자 하나만이 설원의 곁에 남았다.
그의 역할은 설원을 백사라가 지정한 장소까지 인도하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곳에 숨어 있다가 어머니를 만나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설원은 순진하게 생각했다.
들판이 있는 고향에서 어머니와 꽃을 만지며 아이를 키울 거라고.
하지만 환상은 빠르게 깨졌다.
인적 드문 시간에 이동하기 위해 새벽이 되도록 몸을 숨기던 중이었다.
보고를 하러 간 건지, 남자가 도통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나간 설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남자가 담배를 피우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선 믿기 어려운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그새 죽었다고요? 알겠습니다. 핸드폰은 이미 압수했으니 절대 외부 소식을 듣지 못하게 주의를……. 엇?”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남자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마주했을 때, 설원은 세상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실감했다.
떨리는 목소리가 설원의 입술을 타고 흐느낌처럼 새어 나왔다.
“누가…… 누가 죽었다는 거예요?”
“아. 그게. 흠. 뭐냐.”
“누가…… 누가 죽었냐고요! 묻잖아요! 핸드폰, 당장 내 핸드폰 돌려줘요!”
“아, 이거 이 여자가 귀찮게 왜 이래! 저리 가!”
“말해! 누가 죽었어! 누가 죽었냐고!”
메아리처럼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이미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 지옥이 아닐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친 듯 오열하며 설원은 계속 외쳤다.
김선화, 수선화처럼 곱고 강인했던 제 어머니의 이름을.
끝내 져 버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을 어머니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