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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혼자만의 임신 (71/111)


71. 혼자만의 임신
2023.04.05.



 
8년 전. 설원을 정말로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외로움이었다.

이름만 남편일 뿐, 남보다도 먼 존재인 권채하라는 남자로부터 기인한.

권채하는 민설원을 그야말로 없는 것처럼 대했다.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었고, 함께 식사하는 일도 없었으며, 같은 방이되 각방이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그가 마시는 공기가 그녀보다 존재감이 더 크다고 해도 맞을 정도였다.

그는 늘 정신 없이 바빴고, 설원을 비롯한 ‘집’이라는 공간을 일부러 멀리하려는 듯 보였다.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당시 채하는 죽은 형을 대신해 채운의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해야 했고, 그만큼 주변의 버거운 기대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 찾아왔다.

어쨌거나 결혼기념일.

보는 눈들이 있으니 최소한 집에는 들어오겠지 싶어, 그녀는 손수 저녁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날도 채하는 회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설원에겐 허영주의 음식 투정과 쓸데없이 돈만 낭비한다는 구박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쯤 되니 설원은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랑이나 애정 같은 감정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 대 인간의 교류를 바란 것조차도 언감생심이었음을.

권채하의 심장엔 온기 따위 없다는 것을 그녀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결혼기념일도 더 비참하면 비참했지,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나마 채하를 보좌하는 정 비서가 집으로 찾아와 그 본인이 산 게 틀림없을 선물과 축하를 건넸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설원의 마음을 더욱 처참하게 만들었다.

정 비서의 티 나는 호의는 채하가 결혼기념일 자체를 잊고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외로움에 더해 설움도 계속되었다.

채운 가에 들어와 처음으로 심하게 앓았던 밤에도, 설원은 새어 나오는 신음을 애써 참으며 혼자서 견뎌야 했다.

간호 같은 것은 언감생심 바랄 수도 없는 신세였다.

바로 옆 서재에서 잠든 남편을 깨우기는커녕, 그가 제 앓는 소리에 혹여 화를 낼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마에 물수건이라도 올리고 싶었지만,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갈 힘도 없었다.

그나마 서늘한 손으로 설원은 뜨거운 이마를 연신 쓸어내렸다.

흘러내리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겨우 아침이 되어 병원에 가겠다고 했을 땐, 허영주가 서슬 퍼런 눈으로 혹시 산부인과 아니냐며 노려본 게 다였다.

걱정 어린 시선도, 괜찮냐는 말도, 당연하게도 들을 수 없었다.

이 채운 가 안에서는 그녀는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었다.

외출 또한 채운의 작은 사모로서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한다며 온갖 제약을 받았기에, 어머니를 보러 병원에 가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상태가 그나마 안정적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설원은 채운 가를 뛰쳐나왔을지도 몰랐다.

정작 그가 없는 집에서 설원은 홀로 시들어만 갔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설원의 가슴은 제멋대로 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애초에 권채하는 사랑하지 않기엔 너무나도 근사한 남자였기에.

언제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차림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

걸음걸이조차 우아한 채운의 황태자.

채하가 가끔이나마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설원은 저도 모르게 눈으로 그를 좇았다.

누구와도 섞이지 않는 신비로운 이질감,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그는 자연스레 타인에게 자신을 각인시켰다.

설원의 눈과 가슴에도 그것은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그만의 깊은 분위기를 더하는 우드 향이 방안에 머물 때면, 설원은 꼭 어린 시절 좋아했던 들판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남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설원이었지만, 그냥 알았다.

이런 기분은, 이런 마음은 분명 사랑의 감정이리라는 것을.

그리고 또 설원은 잘 알았다.

둘 사이는 어디까지나 기간이 정해져 있는 거래이며 계약이었고, 그가 제게 마음을 줄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 것을.

채하를 볼 때마다 바람 속 들풀처럼 흔들리는 가슴을 설원은 애써 부여잡았다.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설원은 그저 이 긴긴 계약이 끝날 날만을 기다렸다.

평행선 같던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하게 된 것은 계약이 반년도 채 남지 않은 겨울밤이었다.

시린 눈을 하고 무너져내린 채하와 하룻밤을 보냈던, 거짓말 같던 그 밤.

그날, 설원은 얼음 같은 남자의 이면을 보았다.

강철처럼 단단하던 그의 마음에 나 있는 작은 균열을 보았다.

그저 차가운 줄만 알았던 입술이, 손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알게 되었다.

외롭고 괴로운 채운 가에서의 나날을 버티게 한 것이 바로 그를 향한 연정이었음을, 설원은 그의 손길로 깨닫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뒤 채하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 분가를 강행했다.

말로는 계약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냥 살자고 했었지만, 막상 둘만의 집이 생기니 좋았다.

다시 정원을 갖게 된 것도 좋은 점 중 하나였다.

이제는 어떤 꽃을 심든지 간에 뭐라 할 사람도 없어진 셈이었으니.

또한 분가를 기점으로 두 사람의 생활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채운 본가에 뒤지지 않게 커다란 집이었으나, 한 공간에 채하와 단둘이만 있다는 점은 설원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왜인지 그는 분가 전보다 집에 빨리 들어왔고, 오래 머물렀다.

게다가 방이 넘치는데도 아무 말 없이 자연스레 그녀와 같은 방을 썼다.

예전처럼 다른 방을 쓰자고 권유할 수도 있었지만, 설원은 그러지 않았고 채하 또한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채하는 설원의 예상과 정반대로 행동했다.

춥다는 그의 주장에 한 침대를 쓰게 된 후로, 두 사람은 늘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를 유지했다.

꼭 그만큼만 마음이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설원의 가슴에 싹을 틔웠다.

본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채하가 누워 있다고 생각하면,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설원은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은 어디로 가고,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는 채하의 얼굴은 순진무구한 아이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더없이 잘 빚어진 도자기처럼 날렵해,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매끄러운 이마와 코의 곡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붉은 입술에서 늘 설원의 시선이 멈추곤 했다.

멍하니 보고 있자면 괜히 제 입술도 붉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와 보냈던 겨울밤을 떠올리면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손과 입술이 권채하라는 남자를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이상했다.

한 번도 닿아보지 않았을 때는 모르던 욕망이었건만, 막상 그의 체온을 알게 되자 갈구하는 마음이 제 안에서 놀라울 정도로 커져만 갔다.

안기고 싶고, 그의 체취에 뒤섞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부끄러워 뺨이 달아올랐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이런 것이었구나.

그에게는 단지 실수였을 텐데. 어쩌면 지우고 싶은 기억일지도 모르는데.

설원에겐 그날 밤의 일이, 이 계약 결혼에 있어 단 하나 간직하고픈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추억을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었다.

그날부터 설원은 조금 다른 마음으로 달력의 날짜를 세게 되었다.

계약이 끝나기만을 바랐던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은밀하고도 은밀한 그 감정을 그가 모르기만을 바라면서.

*



“임……신이요?”

“예. 지금 3개월 정도 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아…….”

축복일까, 비극의 시작이었을까.

그 겨울의 하룻밤으로 설원은 자신에게 아이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임신이라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지만, 채하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해 올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또 두려웠다.

원치 않는 결혼에 이어 원치 않는 아이까지.

만일 아이를 지우라거나 한다면 설원은 견딜 수 없을 터였다.

어차피 계약 기간은 이제 곧 끝이었으니, 그 후에는 그녀만의 아이로 키울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혼자만의 임신인 셈이었다.

막막한 불안 속에서도 설원은 이 임신이, 채하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바보같이 행복했기에 더욱이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었다.

시어머니인 허영주가 이 사실을 알았다간, 아마 말 그대로 경을 칠 터였다.

그래서 설원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몰래 빠져나와 병원에 가는 날에는 두 배로 신중을 기했고, 어떤 내색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허영주의 레이더망을 완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다른 일에는 다소 허술할지 몰라도, 그녀는 설원과 채하의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보다 예리한 촉각을 지니고 있었다.

꼬박꼬박 같은 주기로 설원이 외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허영주는 마침내 임신 사실을 알아채고 말았다.

임신 4개월 차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예상대로 허영주가 가장 처음 뱉은 말은 아이를 지우라는 것이었다.

수북한 지폐 다발과 함께 당장 떠나라는 윽박은 덤이었다.

당연히 설원은 그 제안 아닌 제안을 거절했다.

허영주가 출신에 연연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역시나 그녀는 제가 알아낸 사실을 아들인 채하에게는 함구했다.

그 점만큼은 다행이었지만, 그 뒤에는 더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파놓은 함정이.


 

*



“어머니가 쓰러지셨다고요?”

“예. 병원 앞뜰에서 쓰러져 계신 걸 간호사가 발견했습니다. 얼른 와주셔야겠습니다.”

핸드폰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액정 화면에 여러 갈래로 금이 간 걸 보며, 설원은 어깨를 떨었다.

불길했다. 너무도 불길해 오소소 소름이 돋을 만큼.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간 설원이 마주한 현실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엄마가 의식도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오랜 투병 탓에 유독 말랐던 몸에서는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선생님. 엄마는…… 어머니는 어떤 상태인 거죠? 네?”

간절히 심 원장을 올려다보았지만, 그 역시 한낱 인간이지 신이 아니었다.

그가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환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것은 한없이 절망적인 선고였다.


“면역 수치가 거의 최저로 떨어졌습니다. 의식을 회복한다면야 어떻게든 처치를 해보겠지만, 지금은 손을 쓰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자칫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설마 이대로 그냥 손 놓고 있으란 건 아니겠죠? 네? 선생님.”

“일단은 수액을 맞으면서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어머니는…… 지금…….”

“작은 사모님께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예후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털썩, 설원의 몸이 차디찬 병원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간호사와 심 원장이 무어라 위로 비슷한 것을 건넸지만, 들리지 않았다.

힘겹게 일구어놓은 그녀의 작은 세상이, 하나하나 무너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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