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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70/111)


70.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2023.04.02.



 


“없애버리자, 라…….”

“무, 물론 진짜 없애자는 건 아니었어! 민설원이 지금 멀쩡히 살아 있잖아. 응?”

몸을 부들부들 떨며 허영주가 다급하게 변명을 이어갔다.


“나는 그냥 돈만 줬지, 중요한 일은 다 걔가 처리해서 몰라! 그, 어차피 돈도 받지도 않았고! 사라가…… 백사라가 민설원이를 설득해서 죽은 척 떠나게 해준다고 했어. 그래서…… 그냥 그러라고 했을 뿐이야!”

“…….”

“진짜야! 채하야. 이 엄마 못 믿니? 내가 아무렴 산 사람을 정말로 죽이기라도…….”

“왜 그러셨습니까?”

허영주의 격앙된 음성을 가르고, 채하의 스산한 물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 속에 타오르는 고요한 분노는 당장이라도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이 설령 제 어미일지라도.


“그게…… 사실은…….”

아들의 서슬 퍼런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허영주는 울먹이며 털어놓았다.


“절대 임신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아이를 가졌다길래 너무 화가 나서 그만…….”

“하!”

예상치 못한 그 기막힌 이유에 채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허영주가 허공에 대고 두 손을 허우적대며 애처롭게 자신을 변호했다.


“지, 지금은 후회해! 뼈저리게 후회한다고! 우리 아가…… 우주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데! 내가 미쳤지. 흐어엉. 미안해. 채하야. 저렇게 예쁜 아가가 나올 줄도 모르고 나는…….”

“사과해야 할 상대는 제가 아닙니다. 어머니.”

“…….”

“예나 지금이나 크게 착각하고 계신 것 같군요. 어머니는 정말 조금도 변함이 없으세요. 조금도요.”

“으…… 으흐흑!”

결국 허영주의 목에서 끄윽끄윽 소리가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거의 통곡에 가까운 그 울음을 채하는 한없이 냉담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임신하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설원과 저는 계약 관계였기 때문에, 제 어머니가 그런 걸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정말 어디까지 자식의 삶을 휘두르려 했던 건지, 새삼 기가 찼다.

총알받이로 설원을 내세운 건 자신이었지만, 그녀는 정말 전쟁터 한복판에서 아무런 방어구도 없이 총을 맞고 있던 셈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입이 써 견딜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죠.”

“……끅! 채하야. 다 털어놨잖아. 나는 정말로 더 할 말이…….”

“이 일이 장모님의 죽음과도 관계가 있습니까?”

허영주의 눈동자가 순간 파르르 떨렸다.

곧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야말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난 정말 전혀 몰라! 나도 다 속았다고! 백사라…… 그래. 사라 걔는 뭔가 알고 있을 거야! 그것만 밝혀내면 나는 무고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 그러니까 채하야…….”

“그렇군요. 무고하시군요.”

“…….”

“제 아내를 사람 취급도 안 해 놓고, 편할 대로 싹 잊으신 모양입니다.”

아무리 모르쇠로 일관해 온 허영주로서도 차마 채하의 그 말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설원에게 임신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가끔 병원에 가는가 싶으면 반드시 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생리 일정까지도 매달 보고하라고 했던 그녀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설원이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방을 샅샅이 뒤져 산모 수첩을 찾아냈었다.

그걸 훔쳐다 백사라에게 들이밀며 이런 천박한 며느리 따윈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노발대발했던 것은…… 바로 허영주 자신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허영주가 우물거렸다.


“나는…… 나는…….”

“됐습니다. 이제 어머니께 들을 얘긴 더 없는 것 같으니까요.”

“채하야…….”

그녀를 바닥에 버려두고, 채하는 차갑게 발걸음을 돌렸다.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뒷모습 같아, 허영주는 그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밀려오는 후회가 세찬 파도처럼 가슴을 때렸지만, 모든 것은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

그 시각.

설원은 뜻밖의 인물과 마주하고 있었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사실 부사장님께서 은밀하게 부탁하신 일인데, 이건 아무래도 작은 사모님이 아시는 게 맞다고 생각되어서요.”

“심 선생님.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갑자기…….”

어스름하게 져가는 저녁의 방문자는 다름 아닌 채운의 주치의, 심 원장이었다.

설원의 어머니를 끝까지 치료해주었던 은인.

그가 오늘은 무척이나 심각한 얼굴로 설원의 앞에 서 있었다.

급히 달려왔는지 흰 의사 가운 차림까지 그대로였다.

곧 심 원장의 입에서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어머님 말입니다. 갑자기 위독해져서 저희도 그때 많이 놀랐었습니다. 사실 몇 년간 상태가 꽤 안정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의식까지 없어질 만큼 순식간에 상태가 악화되었죠.”

“……예. 그랬죠.”

바로 그 때문에 설원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백사라의 제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원은 심 원장을 응시했다.


“어쨌든 타이밍이 아주 나빴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으니까요. 게다가 작은 사모님께 그런 일이 생겨서 부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기도 힘들었지요.”

“그랬군요…….”

숨을 한 번 고르곤 심 원장이 설원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잠시 고뇌가 머무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한데 이번에 부사장님 지시로 조사를 해 보면서, 묘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부사장님께서 병원에 자주 들르셔서 어머님과 산책도 하시고 했단 얘긴 전에 드렸죠?”

“네.”

그 뜻밖의 사실에 설원도 무척이나 놀랐던 바 있었다.

왜 엄마가 그 이야기를 제게 하지 않았던 건지도 궁금했고.


“우리 병원에서 오래 근무한 간호사가 당시 정황을 기억하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주요 환자였다 보니 말이죠.”

“뭘…… 말인가요?”

설원의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려왔다.

분명 이 앞에 진실이 있는데, 알게 되는 게 두려운 것은 왜일까.

하지만 두렵다고 해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김선화 님께서 의식을 잃으셨던 날, 오후에 따님과 밖에서 산책하고 있는 걸 봤다고 합니다.”

“산책이요……?”

퍼뜩 이상한 예감이 스쳤다. 설마…….


“저는 어머니가 쓰러지셨던 날, 만난 적이 없어요. 병원에 가지도 않았고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때 허영주에게 등 떠밀려 원치 않는 자리에 심부름 비슷한 것을 갔기 때문에.

그런데 누가 어머니와 산책을 했단 말인가.


“바로 그겁니다. 작은 사모님. 제가 인상착의를 혹시 기억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꽤 상세한 답을 해주었어요. 밝은 갈색 머리에 굵은 웨이브, 그리고 명품백을 들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아주 화려한 차림새라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고.”

“……아.”

짤막한 신음이 설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인상착의는 제게 돈을 건네며 거래를 제안하던, 당시 백사라의 모습이었다.

눈물범벅이 된 설원을 의기양양하게 내려다보던 그 모습.

타인의 비극을 서슴없이 기회로 삼는 그 형형한 눈빛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았다.

순간 그녀의 몸이 휘청였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저는…… 저는 괜찮아요. 심 선생님.”

“반응을 보니 역시나 짐작이 가시는 모양이군요. 저 또한 대충 알 것 같습니다만.”

“백사라…… 백사라예요. 백사라가 어머니를 찾아와서…….”

대체 뭐라고 했길래.

뭐라고 어머니에게 헛소리를 지껄였기에, 어머니가 쓰러진 걸까.

도대체 어떤 말을 했기에 의식까지 잃은 걸까.

그것도 모르고 저는 백사라에게 속아, 어머니를 살려주겠다는 꼬임에 넘어갔다.

애초에 그 여자가 벌여놓은 무대인 줄도 모르고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그들이 설치한 덫인 줄도 모르고 냉큼 안으로 뛰어든 셈이었다.

어리석게도. 어리석게도.

채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그녀였기에, 적어도 이런 진실에 도달하는 일만큼은 없길 바랐다.

어쨌거나 허영주는 채하의 어머니가 아닌가.

제가 마음에 안 들었을 수는 있어도, 제 어머니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니.

아니기를 바랐다. 아니었어야 했다.

그러나 잔인한 진실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백사라. 그리고 허영주. 두 사람은 설원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는 것을.


“어떻게……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있을까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결국 전부 저를 몰아내기 위한 계획이었다니.”

“……이런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저도 유감입니다.”

무릎이 절로 휘청여 설원은 힘겹게 벽을 짚었다.

사랑이 피어날 새도 없이, 세상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마음을 짓밟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던 설원의 눈동자가 이윽고 어떤 결심으로 단단해졌다.


“이 이야기, 채하 씨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예? 하지만…….”

“부탁드릴게요. 선생님. 그냥 아무것도 못 알아냈다고…….”

“안 됐지만, 그럴 순 없어.”

“……!”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설원이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심 원장 역시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그곳에는 채하가 잔뜩 가라앉은 눈빛을 한 채 서 있었다.


“채하 씨…….”

“부사장님. 언제부터 거기 서 계셨습니까?”

당황한 심 원장을 향해 채하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왔다.

곧 둘 앞에 멈춰선 그가 나직이, 그러나 힘 있는 어조로 내뱉었다.


“비밀로 할 필요도, 두 번 말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다 들었으니까요.”

“아…….”

“그러니까 장모님이 쓰러지신 게, 백사라 때문이다. 이게 결론이군요.”

충격으로 파리해진 설원의 얼굴을, 채하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제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짓씹었다.

안 그래도 유독 붉은 입술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어 무서울 정도로 차분하게, 그가 상황을 정리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심 원장님. 이만 돌아가 보세요.”

“아, 저…….”

무어라 참견할 말이 없어 우물거리던 심 원장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

심 원장이 돌아간 후, 두 사람의 사이에는 처음 느끼는 낯선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본디 둘 사이에 익숙했던 침묵이었지만, 지금의 것은 공기가 아예 달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둔 것만 같았다.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벽을.

툭, 툭.


“……미안해.”

투둑. 투둑.


“민설원.”

“그만.”

“……설원아.”

“부르지 말아요. 그렇게…… 다정하게 날 부르지 말아요.”

투두둑. 결국 눈물 줄기가 범람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설원의 가슴에서 내리는 비는 그녀의 피눈물이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결코 눈앞의 남자를 용서해선 안 되었다.

눈앞의 제 남편, 권채하를 사랑해선 안 되었다.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가득 차오른 눈물 탓에 번지는 시야 너머로, 그의 모습이 흐려져 갔다.

마치 앞으로 그녀에게 있어 그의 존재가 그래야 할 것이라고 알리는 것처럼.


“나는…… 당신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고요.”

비참한 현실 앞에서, 오랫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이 결국은 폭발하고 말았다.

억지로 기워놓았던 상처의 봉합이 결국은 전부 터져버렸다.

설원은 그가 기대한 만큼 강한 사람도, 단단한 사람도 아니었다.

한낱 사랑 앞에 흔들리고 무너졌던, 그저 연약한 한 여자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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