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 자백 (69/111)


69. 자백
2023.03.29.



 


“형씨. 말이 좀 통하는구만! 하하하! 그래, 사람 입을 공으로 열려고 하면 쓰나. 그런데 어쩌나? 나는 선불로만 받는데…… 어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앞에 묵직한 서류 가방이 내던져졌다.

충격으로 열린 가방 안에서 쏟아져나온 지폐 뭉치를 보는 남자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도…… 돈! 돈이다! 돈이야! 내 돈! 으하하! 이것만 있으면……! 이것만 있으면, 다 만회할 수 있어! 우하하하!”

미친 듯 낄낄거리며 남자가 그 지폐를 쓸어 담으려는 찰나였다.

채하의 구두가 아주 사뿐히 그의 손등을 밟았다.

이어 싸늘한 충고가 남자의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돈을 받고 싶으면 똑바로 대답부터 해.”

이미 돈뭉치를 보고 반쯤 정신이 나간 남자는 신속한 대답을 꺼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재영 형님 지시를 받고 빈 차를 방파제 아래로 밀긴 했지만, 사람을 민 건 아니라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에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남자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일격을 맞은 남자가, 방금 저를 친 채하를 어리둥절하게 올려다보았다.


“뭐야? 갑자기 사람을 치고.”

“이건 덤이다.”

“……쳇.”

억울한 듯 남자가 자세를 바로잡고는 다시금 돈을 쓸어 담으려 했다.

그러나 채하는 곧바로 그 행동을 저지했다.


“일단 네놈도 뭔가를 내놔야 하지 않겠나?”

“내놓으라고?”

“증거. 백재영이 네놈한테 그 일을 시켰다는 증거는 어디 있지?”

“아. 하하하. 그거 말이지. 그게 말이야…….”

남자가 어색하게 두 손으로 이마를 벅벅 문질렀다.

그러더니만 줄줄이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7년 전? 8년 전이었나? 한창 재영 형님 오른팔 노릇을 하던 때인데, 갑자기 날 부르더니 바로 이만한 서류 가방을 내밀지 뭐요? 당연히 그 안에 들어 있던 건 돈이고! 사람이라도 죽이는 줄 알았더니, 그냥 빈 차만 방파제 아래로 밀면 된다잖아? 생각해봐. 형씨라면 안 하겠어?”

“미친놈.”

정 실장이 정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남자는 더욱 히죽거렸다.


“어쨌든 난 시키는 대로 강원도로 가서 차를 밀어버린 것뿐이야. 차도 더럽게 낡았드만! 그냥 폐차 좀 대신 시켜 주고 돈 좀 챙긴 게 뭐 나쁜 일이라고? 안 그래요, 형씨?”

“그래서? 네 말대로 빈 차만 밀었다면, 네놈이 내 아내 얼굴은 어떻게 알고 있지?”

순간 남자가 숨을 흡 들이켰다.

제가 내뱉은 변명의 오류를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말해 봐. 내 아내가 미인인 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지.”

채하의 차가운 눈빛은 당장이라도 남자를 베어버릴 듯 날카로웠다.


“하하…… 뭐, 그냥 잠깐 동행은 했지.”

“…….”

“아니, 형씨도 잘 알 거 아냐. 일을 시켰으면 제대로 마무리되었는지 확인은 하는 게 기본 아니겠어? 그래서 차를 밀고 여자는…… 아니, 형씨 아내분은…….”

“어떻게 했지?”

채하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에 이른 듯했다.

덩달아 긴장한 정 실장도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올 진실을 숨을 삼키며 기다렸다.

그러나 남자는 이번에도 기대 이하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게…… 놓쳤수다.”

“뭐?”

결국 참지 못하고 정 실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안 되겠군요. 부사장님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제가…….”

“자, 잠깐만! 놓친 건 사실이야.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게 일이었는데, 중간에 여자가 달아났다고!”

“…….”

그녀가 만신창이가 되어 찾아왔다는 사실을, 최재윤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던 채하는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

그 표정에 남자는 물론 옆에 서 있는 정 실장마저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곧 스산한 어조로 채하가 경고를 던졌다.


“네놈의 쓸모부터 확인하도록 하지. 쓸모가 없다면 그냥 이 자리에서 없애버려도 상관없을 테니까.”

“무, 무,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다!”

“말해. 증거는?”

남자가 결국 체념한 듯 제 패를 드러냈다.

그것은 채하가 그동안 찾고 또 찾아도 좀처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블랙박스.”

“……!”

놀라는 눈동자에 담긴 기대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남자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 차에서 블랙박스를 떼어내서 버리라고 했거든. 그래서 내가 떼어냈지. 근데 버리진 않았어. 나 같은 인간들은 살길도 반드시 마련해놔야 하는 법이라서.”

“그래서?”

“재미있는 장난을 좀 쳤지. 재영 형님 차에 잠깐 바꿔치기를 했었거든. 그 누구냐, 화려한 여동생 있잖아. 둘이서 무슨 중요한 얘길 하는지, 꼭 차에 숨어서 소곤거리길래 녹화도 할 겸.”

“제법 쓸만한 증거를 갖고 있군. 어디 있지? 지금 당장 내놔.”

이어진 남자의 결론은 두 사람을 한없이 실망하게 했다.


“……잃어버렸어.”

“뭐야? 이 자식! 너, 순 거짓말이지? 부사장님.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그냥 손봐주죠.”

정 실장이 걷어찰 기세로 다가서자, 남자가 두 팔로 제 몸뚱이를 방어하며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아니라니까! 분명히 잘 보관해 뒀는데 없어졌다고! 나도 피해자야! 그것만 있으면 백재영을 두고두고 협박하면서 크게 한탕 해먹을 수 있었는데!”

“……어디서 잃어버렸지?”

채하의 물음에 남자는 낑낑 소리를 내며 대답을 쥐어 짜냈다.


“카지노 사물함.”

하! 하는 탄식이 정 실장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할 말은 다 끝냈다는 듯 남자가 필사적으로 돈다발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 손이 가방 안에 들어간 순간, 정 실장은 서류 가방을 발로 밟아 닫아버렸다.

어억 하는 외마디 비명이 방 안을 울렸다.

남자가 벌게진 손을 붙들고 씩씩대는 동안, 채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설원의 차에 있던 블랙박스가 백재영 측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연결고리를 증명할 수는 있었다.

한데 그에 더해 계략을 꾸민 정황이 찍혀 있다…….

당시 사건에 대해 둘이서 오간 대화가 녹음되어 있다면, 그만한 증거는 더 없을 터였다.


“잃어버렸다라…….”

“아, 믿거나 말거나 진짜요! 막말로 형씨. 그게 지금 내 손에 있으면 당장 주고, 이 돈이랑 바꾸지 않겠냐고!”

“맞는 말이지.”

그렇게 말한 뒤 채하가 무심히 허리를 숙여 서류 가방을 챙겼다.

바닥에 떨어진 지폐를 한 장, 한 장 주워 담는 모습을 남자가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넋 나간 목소리로 그가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조금만 주면 안 되겠어, 형씨? 온 김에 몇 판만…….”

그의 몸부림은 채하의 손짓 한 번에 좌절되고 말았다.

문이 열리자 그가 심어둔 직원 몇 명이 일제히 등장해 남자를 끌고 갔다.

발악하는 남자의 뒤로 채하의 마지막 한마디가 내려앉았다.


“숨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니 이번엔 내가 숨겨주지. 꺼내줄 때까지 얌전히 있어. 특별히 네놈이 좋아하는 도박장에 머물게 해줄 테니까.”

 

*

폭풍처럼 몰아친 남자의 자백 아닌 자백 뒤, 채하와 정 실장은 세단으로 돌아왔다.

남자의 이야기를 토대로 미뤄볼 때 설원이 험한 일을 당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그럼에도 당장 놈의 목을 비틀 수 없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어차피 놈을 족쳐봤자 지금은 더 나올 게 없을 터였다.

백재영과 백사라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블랙박스는 이미 사라졌고, 그들 남매가 사주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도박자금 또한 전부 현금으로 전달된 데다 이미 카지노 안에서 증발해 버렸다.

하지만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진실에 거의 다가섰으니.

채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정 실장이 얼른 그의 안색을 살폈다.


“부사장님. 피곤하실 텐데 돌아갈 땐 제가 운전할까요?”

“아닙니다. 지금은 차라리 운전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예…….”

“그보다 정 실장님. 뭔가 이상한 점 못 느끼셨습니까?”

“아.”

안 그래도 언제 말을 꺼낼까 고민하던 차라, 정 실장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다른 인물 하나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도둑맞은 블랙박스도 그렇고, 옷에서 떨어진 사진도 그렇고요……. 아!”

“왜 그러십니까?”

순간 정 실장의 뇌리에 유독 마른 한 남자가 떠올랐다.

백사라와 허영주의 회동을 미행할 때 채하와 통화를 하던 중 튀어나왔던 남자.

아주 잠깐이었으나, 옷깃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있지 않았던가.


“확실한 건 아니지만, 누군가 지금 우리가 백영 쪽을 추적 중인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적일지 아군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흐음. 그쪽도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어쨌든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건 그 블랙박스의 행방입니다. 8년이나 지나서 어렵겠지만, 애써 주십시오. 정 실장님.”

“물론이죠!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그거야말로 백 씨 남매를 확실히 옭아맬 족쇄가 될 테니까요.”

불타는 의지로 눈을 번뜩이는 정 실장을 바라보며, 채하 또한 다른 의미로 눈을 번뜩였다.

사실 증거가 있든 없든 그들이 설원을 해치려 했다는 진실을 안 이상,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둘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 참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



“왜 그러셨습니까?”

자비 없이 몰아세우는 날 선 어조에, 허영주의 두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권강호가 집을 비운 사이, 난데없이 쳐들어온 채하는 그녀에게 대뜸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 남자, 정말로 본 적 없으십니까?”

“몰라! 모른다니까. 이딴 놈팡이가 대체 누군데 이러는 거야!”

“방금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아내 민설원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 방파제 아래로 차를 떠민 놈이라고.”

“그, 그, 그러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격하게 파들거리는 어깨가 누가 봐도 상관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채하는 기어이 그녀의 입에서 자백을 받아낼 요량이었다.

해서 그는 어머니 허영주가 가장 기함할 사실을 꺼내 들었다.


“어머니. 얼마 전에 우주가 트럭에 치일 뻔한 일, 알고 계시죠? 그게 백사라가 한 짓이라면요? 그래도 입을 다무실 겁니까?”

곧바로 허영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눈을 크게 부릅뜬 그녀는 말까지 더듬으며 채하에게 되물었다.


“배, 백사라가 우리 아, 아가를 다치게 한 거라고? 지, 진짜야?”

“증거는 아직 없지만, 근처 CCTV와 차 바퀴 자국 분석을 의뢰해뒀으니 머잖아 꼬리가 잡힐 겁니다.”

“그, 그런 일이……. 설마 했는데…….”

사색이 된 허영주의 표정은 그야말로 망연자실 자체였다.

보아하니 어느 정도 배후를 짐작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우주가 죽을 뻔했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위험에 처할지 모르고요. 그런데도 가만히 계실 겁니까? 손주가 다치는 꼴을 또 보고 싶으세요?”

“저, 절대 안 되지! 우리 아가를 건드리는 인간은 내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그러니까 말씀하세요. 백사라하고 대체 무슨 짓을 꾸미신 겁니까?”

“…….”

차마 입 밖으로 내기 꺼려지는 일이긴 한지, 허영주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궜다.

그러나 우주의 안전 앞에서 결국 그녀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언제나 위풍당당하던 허영주가 아들 앞에서 죄인마냥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사라하고 모의를 했어. 그…… 사고가 난 걸로 위장해서 죽은 사람처럼 없애버리자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