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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독 안에 든 쥐 (68/111)


68. 독 안에 든 쥐
2023.03.26.



“이 사진은 어디서 난 겁니까?”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채하가 물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은 정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내내 찾고 있던 남자의 사진이 어째서 대뜸 제 옷 주머니에서 나온 건지.

하늘이 감동해 내려준 선물도 아닐 테고, 정말이지 알쏭달쏭한 일이었다.

채하는 대답을 더 독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건 사진의 입수처가 아니라, 사진 속 남자의 행방이었으므로.


“지체할 것 없이 지금 바로 가죠. 정 실장님.”

“네? 어디로요?”

“당연히 이 사진 속 장소 아니면 어디겠습니까.”

“……설마! 부사장님께서는 여기가 어딘지 알아채신 겁니까?”

눈이 커다래진 정 실장을 보며 채하가 빙긋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사진을 누가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반드시 알아채길 바라는 모양이군요. 이렇게 대놓고 힌트를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힌트라면……?”

“보세요. 여기.”

채하의 손끝을 따라 정 실장의 눈동자가 또르르 움직였다.

남자가 서 있는 골목 끄트머리로 거대한 건물 모서리가 찍혀 있었다.

건물의 정체는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도 입소문을 탄, 국내 최대의 카지노 시설이었다.

그제야 정 실장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이어 채하가 주머니 속에 사진을 구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출발하죠. 이런 놈들이 추적 낌새는 귀신같이 맡는 법이니까.”

 

 


“어휴, 이거 완전히 딴 세상이네요! 냄새가……. 대체 사람 사는 곳은 맞는 겁니까?”

차 창문을 단단히 닫고도 모자라는지, 정 실장이 코까지 틀어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 카지노 근처에 도착한 두 사람은 사진 속 장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카지노 뒤쪽에 소위 ‘동네’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몰락과 파멸, 실패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장소였다.

카지노라는 화려한 세상에서 낙오된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그런지, 이 동네에선 빈곤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분노를 수반한, 독특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곳이었다.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겠죠.”

채하의 냉소적인 대꾸에 정 실장이 수긍했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갈 곳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그들은, 좀비 같기도 하고 하이에나 같기도 했다.

돈 냄새를 맡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덕이는.


“이제부턴 걸어서 찾아보도록 하죠.”

동네를 가로질러 대충 위치를 파악한 뒤 두 사람은 세단에서 내렸다.

작은 쪽방들이 이어진 형태라, 동네는 굽이굽이 골목이며 계단이 가득했다.


“그런데 어떻게 찾죠? 큰 동네가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일일이 들어가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어느 집에 사는지만 알아내면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라고 물으려던 정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끔한 슈트 차림의 채하가 큼직한 서류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 지폐 뭉치를 움켜쥐곤 용도를 설명했다.


“그쪽도 더러운 수작에 돈을 잔뜩 쓴 모양이니, 이쪽도 원 없이 재력을 이용해보죠.”

“이야~ 부사장님. 새삼 재벌이란 게 실감 나네요. 이런 돈뭉치라니.”

“감탄은 나중에 하고, 시작합시다.”

두 사람은 적당히 돈다발을 나눠 들고 작전을 개시했다.

갓 뽑아온 새 지폐의 냄새는 이 쪽방촌의 인간들을 손쉽게 유혹하고도 남았다.

지폐 몇 장과 사진을 함께 보여주자 금세 후보가 좁혀졌다.


“여기군요.”

허름한 방들 중에서도 허름한, 문가에 거미줄이 다닥다닥한 집 앞에서 채하와 정 실장은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으~ 썩은 내가 진동을 하네요.”

겨우 머리 하나가 들어갈까 싶은 창문을 들여다보며 정 실장이 또다시 코를 틀어막았다.

한낮임에도 방 안쪽은 무척 어둑어둑했다.

마치 다시는 볕 들 날 없는 인생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어쩌죠. 부사장님. 없습니다.”

“그런가요.”

“잠깐……. 방금 라면을 끓여 먹은 흔적이 있어요. 아무래도 저희가 조사하는 걸 눈치채고 도망친 것 같은데요. 너무 티를 냈나…….”

“일부러 티 낸 겁니다.”

“네?”

놀란 눈으로 정 실장이 턱을 어루만지고 있는 채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채하가 별거 아니란 듯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집 안에 있으면 끌어내기가 쉽지 않죠. 제 발로 걸어 나와줘야, 붙잡는 재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아…….”

“멀리 가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저쪽일 테고요.”

채하의 시선을 따라 정 실장도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거대한 카지노 건물이 마치 다른 세상인 양 서 있었다.


“카지노…….”

“숨어들기에 저만큼 적절한 곳이 없죠.”

“이런. 골치가 좀 아파지겠는데요. 저기 사람이 몇인데. 게다가 다들 도박에 정신이 팔려서 대화도 안 통할 겁니다.”

지끈거린다는 듯 정 실장이 이마를 짚었다.

한데 채하는 연신 여유로웠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정 비서님 아드님답군요. 정 실장님이 도박을 잘 모르셔서 그러는 겁니다. 저기에 숨었다면 이제 놈은 독 안에 든 쥐입니다.”

“네?”

“저 독 안에는 말이죠. 딴 사람과 잃은 사람이 함께 존재합니다. 즉, 배신의 기회가 차고 넘친다는 뜻이죠.”

씨익 웃는 채하의 얼굴에서 정 실장은 무언의 확신을 느꼈다.

오늘, 반드시 놈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채하의 말대로 카지노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이 찾는 남자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도박의 말로가 으레 그렇듯 최후에는 다 잃긴 했으나, 그 또한 누군가의 돈을 털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둘은 손쉽게 놈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독에 든 쥐였다.


“부사장님! 이쪽입니다!”

“에이 씨! 뭐야!”

“반대편으로 가겠습니다. 정 실장님은 그쪽을 틀어막으세요!”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릇이며 집기들이 마구잡이로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이곳이 별세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젠장! 뭐야? 당신들 누구야!”

직원실 뒤쪽으로 나 있는 좁은 복도를 달리며 남자가 고함을 쳐댔다.

빈털터리가 된 뒤에도 나름 연줄만큼은 쓸만했는지, 몇몇이 그를 숨겨준 모양이었다.

다만 연줄 위에 돈이 있다는 것을, 놈은 미처 간과하고 말았다.

채하가 서류 가방에 챙겨온 돈다발은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중이었다.


“억!”

헉헉대며 복도를 달리던 남자가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정 실장을 보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것도 잠시, 남자는 정 실장과 채하의 사이에서 쑥 하고 모습을 감췄다.

카지노 시설에 딸린 메이드 룸이 연결되어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채하의 표정에는 조금의 초조함도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차분해지는 것이, 묘하게 두려운 느낌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멍청하군. 알아서 점점 더 작은 독으로 기어들어 가는 꼴이라니.”

그렇게 말하는 채하의 손에는 어느새 마스터키가 들려 있었다.

잠시 후, 정 실장과 채하는 룸 안에 숨어든 남자와 마침내 마주 서게 되었다.


“……이런, X!”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남자가 창가를 향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창문이 깨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목덜미를 힘껏 짓누르며, 채하가 순식간에 그를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연신 컥컥대며 온몸을 버둥거렸지만, 단단한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런 그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채하가 입을 열었다.


“도망치는 꼴을 보니 죽을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기가 7층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가?”

“뭐야!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글쎄.”

잔뜩 격앙된 남자의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채하의 음성은 한없이 스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채하는 찬찬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8년이라는 세월과 도박장에서의 풍파 탓인지, 남자는 퍽 얼굴이 상한 듯했다.

다만 광기 어린 눈동자만큼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한참을 버둥대다 체념한 남자가 이내 실실 웃음을 흘렸다.


“이봐, 형씨. 돈 좀 잃었다고 사나이가 이렇게 굴면 쓰나? 응? 보아하니 나처럼 빈털터리도 아닌 모양인데, 너그럽게 좀 봐줍시다!”

“봐 달라고?”

채하가 위협적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를 짓누르고 있는 손등에는 어느새 뼈마디가 허옇게 불거져 있었다.

비굴하게 웃는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 온도 차에 입이 바싹 말랐는지, 남자는 제 입술에 침을 발랐다.


“어억!”

채하가 손에서 힘을 풀자 남자의 몸뚱이가 맥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런 남자를 정 실장이 단단히 포박했다.

이미 힘이 빠진 상태인데다 문도 잠겨 있어, 이제 도망칠 곳이라고는 없었다.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했는지, 그는 버둥거리는 대신 트인 숨통으로 숨을 몰아쉬느라 바빴다.

벌게졌던 낯빛이 조금 돌아오자마자, 채하는 남자의 꺾인 무릎 앞에다 무언가를 던져 주었다.

방파제에 추락했던 설원의 차 사진이었다.


“뭐야, 이건?”

“그 차. 기억 안 나나?”

“허허. 형씨. 내가 비록 요 모양 요 꼴이 되긴 했어도, 이런 허접한 차는 타고 다닌 적이 없거든.”

“그래?”

비스듬히 입술을 올리며 채하가 두 번째 사진을 그의 턱밑에 들이밀었다.

다름 아닌 설원의 사진이었다.

남자의 눈에 일순 불안함이 스치는 것을, 채하는 놓치지 않았다.


“차는 기억 안 나도 사람은 기억하는 모양이군.”

“……모, 몰라. 그냥 미인이길래.”

“내가 그 미인의 남편이라면, 어쩔 거지?”

“……!”

이번에는 남자의 눈이 숨길 수 없이 커졌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되레 방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하늘이 이 몸을 저버리진 않았나 보네!”

미친놈처럼 웃어 재끼는 남자를 정 실장이 못마땅하게 쏘아보았다.

이윽고 웃음을 멈춘 남자가 채하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그래, 형씨가 이 여자 이거라 말이지?”

남자가 저열하게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말조심해. 이 자식이 어디서……!”

“괜찮습니다. 정 실장님. 계속 들어보죠.”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정 실장이 방 한가운데 쭈그려 앉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뭐, 날 찾아낼 정도면 배후가 누군지도 대충 다 알고 왔을 테지.”

“백재영.”

“이거, 재영 형님도 큰일이시군. 그러게, 내가 돈 좀 더 달라고 했을 때 줬으면 이런 구린내 나는 데 숨어 있지 않고 근사하게 외국으로 떴을 텐데 말이야!”

“말해. 네놈이 내 아내의 차를 밀었나?”

채하의 서슬 퍼런 추궁에도 남자는 흐음 하며 여유를 부려댔다.

여전히 사태 파악이 안 되는지, 의기양양하게 손가락을 까딱이더니 그가 불성실한 대답을 해 왔다.


“글쎄, 민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 자식이……! 부사장님. 그냥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가죠.”

“기다리세요. 아직은 아닙니다.”

“경찰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시나? 내가 알기론 댁 와이프는 멀쩡히 살아 있을 텐데. 그럼 난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잖아?”

부들부들 손을 떠는 정 실장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며, 남자는 계속 낄낄댔다.


“우리 터놓고 얘기해 보자고. 형씨.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냉소적인 눈빛으로 채하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나직하게 한마디를 뱉어냈다.

아마 눈앞의 이 남자가 가장 원해 마지않을 것을.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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