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지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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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지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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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지킬 겁니다
2023.03.22.
“저 우주랑 어디 좀 다녀올게요.”
아침이 되자 설원이 외출 준비를 마친 채 우주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건만, 그것을 본 채하의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디를?”
설마 둘이서 저를 떠나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손에 별다른 짐이 들려 있지 않음에도, 괜스레 가슴에 불안이 일었다.
그때였다. 우주가 해맑게 그를 올려다보며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주, 외할머니 보러 가요!”
“외할머니……?”
얼떨떨해하는 채하를 향해, 설원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설명했다.
“네. 우주는 아직 인사를 못 드렸잖아요. 아버지한테는 다음에 셋이 가더라도, 어머니 계신 곳에 먼저 데리고 다녀오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설원의 얼굴에는 희미한 불안과 갈등이 서려 있었다.
하긴 이럴 때일수록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할 터였다.
해서 채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만 얼마 전 일도 있고 하니, 기사님 외에도 경호원을 딸려 보내도록 하지. 앞으로 당분간은 당신하고 우주한테 사람을 붙일 거니까 불편해도 참아.”
“……알겠어요.”
우주의 안전을 위한 일이었기에, 설원은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리 경계해도 모자람이 없을 때였다.
사방에서 저희를 향한 마수를 뻗치고 있는 이때, 그녀로서는 남편인 채하에게 기대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으니까.
“조심히 다녀와. 꼬마도.”
“네! 대왕 아빠. 우주 잘 다녀올게요~.”
오늘따라 아이의 웃음이 더욱 밝아, 채하의 가슴이 시려왔다.
아빠라는 이름이 이렇게 듣기 좋은 것이었나.
상무, 전무, 부사장에서부터 채운의 황태자에 이르기까지.
그간 저를 수식하는 어떤 호칭에도 마음이 움직인 적 없던 그였다.
한데 살면서 들을 일이라곤 없을 거라 여겼던 ‘아빠’라는 호칭이 이렇게 가슴을 울릴 줄은 몰랐다.
대왕 아빠든, 그냥 아빠든 아무래도 좋았다.
아내의 말간 미소와 아들의 발그레한 뺨을 언제까지고 곁에서 볼 수만 있다면.
“이거, 귀한 손님이 와주셨네요!”
“제임스. 바쁜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여전히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는 통유리 건물 안.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제임스가 불쑥 찾아온 채하를 맞이했다.
“방해라뇨. 이렇게 찾아와주다니 반갑기만 한데요! 아, 아쉽게도 로라는 외출 중입니다. 미스터 권이 온 걸 보면 로라가 더 반가워할 텐데 말이죠. 이런, 말이 길어졌군요.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감사합니다.”
밀짚모자에 조경 가위를 든 제임스는 꼭 수더분한 농부 같았다.
절로 마음이 편해지는 그 모습에, 채하는 역시 이곳을 찾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우주와 설원이 외출하고 나니 집에 혼자 남아 있기가 쓸쓸해진 참이었다.
정원의 잡초라도 뽑을까 하던 찰나 마침 이곳이 떠올랐다.
로라 앤 제임스.
설원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일터이자 그녀와 오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이 만나기 전, 설원의 삶에 대해선 좀처럼 아는 것이 없었다.
당연했다. 물은 적도 없었으니까.
그런 만큼 자신이 모르는 그녀의 과거를, 한 조각이라도 더 찾아서 주워 담고 싶었다.
그 조각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녀의 향기가 스며 있는 곳.
“자, 들어 봐요. 요즘 새로 개발 중인 꽃차예요.”
하늘하늘한 꽃잎이 떠 있는 잔을 내밀며 제임스가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향이 좋네요.”
찻잔 속에서 나른한 여유가 느껴졌다.
천천히 차를 음미하면서 채하는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역시나 제임스는 반색하며 기꺼이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설원 씨는 원래 단기 알바로 일하러 왔었어요.”
학비를 벌기 위해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설원은, 자연스레 로라 앤 제임스와도 인연이 닿았다.
한창 로라 앤 제임스가 잡지 등에 소개되면서 이름을 알리고 있던 시기였다.
덕분에 오가는 사람의 수도 많아, 딱히 알바생을 신경 쓰지 못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 우연히 로라의 눈에 설원이 띄게 되었다.
계기는 무척이나 단순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그녀가 뒤쪽 화원에 자주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의아해진 로라가 이유를 물었을 때, 설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 여기 거의 다 죽어가는 화분 하나가 있어서요. 얼마 전 지나가다 봤는데 신경이 쓰여서 제가 살피고 있었어요. 보세요. 제법 살아난 것 같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가지에는 힘이 실리고, 잎에는 초록이 되살아나고 있는 한 식물을 가리켰다.
판매용도 아니고 화려한 꽃 화분도 아니었지만, 설원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진심은 투명하리만치 순수했다.
꽃과 식물을 아끼는 마음.
“그래서 아내가 설원 씨에게 정식으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겁니다. 부끄럽지만, 당시 내로라하는 유학파 인재들도 많을 때라 전 조금 긴가민가했었죠.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내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설원 씨는 그야말로 꽃 같은 사람이더군요.”
꽃 같은 사람…….
그 표현에 채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 역시 설원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느끼고 있는 바였으니까.
“들어봐요. 미스터 권. 또 우리 설원 씨가 말이죠…….”
그 외에도 제임스는 채하가 알지 못했던 설원의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하나같이 사랑스러워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것들이었다.
“제임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새삼 제가 행운아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채운 그룹 부사장님을 두고 이런 말은 그렇지만, 우리 설원 씨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죠. 하하.”
마치 딸이라도 시집 보낸 듯 싱글거리는 제임스를 보며, 채하도 입가를 더욱 끌어올렸다.
꽃차를 잔에 더 부어주던 제임스가 눈치를 살짝 살피곤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전 오래전에 미스터 권이 이곳에 찾아왔을 때부터 한눈에 두 사람이 인연이라는 걸 알아봤습니다.”
“예?”
채하가 그를 빤히 보자 제임스가 다소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제 철칙이 우리 직원에 대해선 최대한 말을 아끼는 건데, 이상하게 그때 미스터 권에겐 설원 씨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더군요. 왠지 모르게 미스터 권이 설원 씨와 인연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을 했나 봅니다.”
“아아……. 저희 장모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장모님이라면 설원 씨 어머님 말씀이신가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채하가 미소를 지었다.
제임스에게 줄줄이 털어놓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과연 설원의 어머니에게서도 그런 말을 들었더랬다.
타인의 눈에는 명료하게 보이는 것들이 어째서 제겐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자신의 마음은 정작 본인만 몰랐던 모양이었다. 바보같이.
“어쨌든 감사합니다. 제 아내를 아껴주셔서요.”
“어이구,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민망하다는 듯 제임스가 손사래를 쳤다.
그가 앉아 있는 쪽 뒤편으로 이어지는 실내 화원을 바라보며, 채하는 옛 기억의 조각 하나를 끄집어냈다.
아득한 세월만큼 마음까지도 아득해지는 기억이었다.
“……아내는 결혼한 뒤에도 곧잘 집에서 정원을 가꾸곤 했습니다. 아마 적적했던 것이겠죠. 제가 일을 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저런.”
“그래선지 아내는 더욱 그 작은 정원을 아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저는 창 너머로 몰래 바라보곤 했지요. 무심코 시선이 간다는 게 뭔지, 그땐 아마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을요.”
“사랑이죠. 암요. 미스터 권은 우리 설원 씨를 사랑하신 겁니다.”
제임스의 개나리 빛 수염이 그의 미소를 따라 둥그런 모양을 만들어냈다.
반박할 여지 없는 정답이었다.
“맞습니다. 이젠 그녀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어요.”
그랬다.
설원이 제 세상에서 사라졌던 5년 동안, 그의 세상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텅 빈 정원을 줄곧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꽃들이 시들어갈 때마다 제 숨도 끊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민설원은, 권채하의 세상 전부였다.
그런 만큼 지금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잔 위에 동동 떠 있는 여린 꽃잎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채하는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니 다신 잃지 않도록 지킬 겁니다.”
코끝에 퍼지는 향긋한 꽃차의 향.
그보다 깊게 제 안에 각인된 민설원의 향기를, 이제 더는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시들지 않게 할 것이었다.
*
“부사장님. 회사로 다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는데, 직접 보고를 들어야죠.”
“하긴 맞습니다. 중요한 일이니까요.”
잔뜩 비장한 표정을 하고서 정 실장이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가 그것을 채하의 대리석 책상에 조심스레 올려놓고는, 본격적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백재영 주변에 있던 놈 하나가 사건 당시 종적을 감췄습니다. 은밀히 탐문을 해 보니 아주 악질이었다고 하더군요. 대외적으로는 사고를 쳐서 백재영이 내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실상은 거래였겠군요.”
채하가 미간을 훅 좁히며 서류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 안에 적힌 남자의 행적들은 하나같이 저급하기 짝이 없었다.
“예. 종적을 감춘 뒤 얼마 후의 행적을 확인했습니다.”
“그래, 어떻습니까?”
“강원도에 있는 카지노에서 놈을 봤다는 제보가 다수 있었습니다. 당시 거액을 가지고 나타났는데, 불과 며칠 만에 탕진했다더군요.”
“거액이라…….”
“아마 백재영이 건넨 것일 테죠. 현찰로 지급했는지, 거래 내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놈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겁니다. 카지노에서 보았던 게 끝이에요. 놈을 잡아야 확실한 증거도 잡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정 실장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음지의 인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몸을 사리고 숨어 살 수 있었기에, 몇 년 전 행방이 묘연해진 남자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답 대신 채하는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를 그가 깊이 생각할 땐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아버지께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정 실장은 그저 기다렸다.
곧 채하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카지노 주변부터 뒤져보죠.”
“카지노요?”
의아해하는 정 실장에게 채하가 여유만만하게 답을 건넸다.
“도박하는 인간들의 가장 큰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절대로 도박장 근처를 떠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크게 잃은 인간일수록 더더욱.”
“아아……!”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입이 벌어진 정 실장이 손뼉을 딱 쳤다.
그 바람에 그의 웃옷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라? 이게 뭐지?”
무심한 손길로 정 실장은 방금 떨어진 종이를 주워들었다.
곧바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러십니까, 정 실장님?”
“부, 부사장님. 이거…….”
손까지 파들파들 떨며 정 실장이 종이를 채하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확인한 채하의 눈동자에도 곧바로 놀라움이 스쳤다.
뜻밖에도 그것은 사진이었다.
최근 날짜가 선명히 찍힌 그 사진 속에는 반쯤 폐인이 된 백재영의 옛 수하가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