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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떠나지 마 (66/111)


66. 떠나지 마
2023.03.19.



 


“네가 그런 거 아니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추궁하는 허영주를, 백사라가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사모님. 요즘 부쩍 저한테 궁금한 게 많으신 모양이네요. 대뜸 알아듣기도 어려운 질문부터 던지는 걸 보면.”

그녀가 독기 어린 눈을 손톱을 향해 내리깔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미래의 시어머니를 대한다기보단, 하등 귀찮은 인간을 대하는 태도였다.


“중요한 할 말이 있으니 꼭 나와 달라고 사정하셔서 나오긴 했는데, 그렇게 뜻 모를 소릴 하시면 곤란하죠. 저 바쁜 사람인 거 잘 아시잖아요?”

“사라 너…….”

허영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멀뚱히 앉아 기다린 시간만 벌써 30분이었다. 아마도 일부러 늦게 나왔을 테고.

괘씸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저 또한 대화를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허영주는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우리 손주가 다쳤어. 트럭에 치일 뻔했다는데.”

“흐응~ 그러세요? 요즘 어린이집 앞에서 사고가 잦다고 하니, 각별히 주의하셔야겠어요.”

“……어린이집 앞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허영주의 지적에 백사라가 제 손톱 끝에서 눈을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아니, 마주했다기보단 노려본다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형형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일말의 당황이나 찔리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백사라는 허영주를 비꼬았다.


“사모님. 무슨 얘길 듣고 싶으신 거예요? 설마 제가 해코지라도 했다는 소릴 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 귀~한 손주한테?”

“그게 아니라…….”

“어린이집에 다니니까 어린이집 앞에서 그랬겠구나, 하는 거지 무슨 다른 뜻이 있겠어요? 꼭 저를 의심하시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네요.”

슬쩍 떠보려 했건만 백사라는 역시나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해명 아닌 해명에 통 가시지 않던 찝찝함만 깊어지고 있었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는 우주가 걱정되어서 매일 밤 발 뻗고 잘 수 없을 터였다.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킨 뒤 허영주가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제가 어린이집 감시를 시킨 남자는 다른 건 몰라도 관찰력 하나만큼은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그런지라 트럭에 번호판도 없는 데다, 작정한 듯 달려들었다는 말을 도저히 무시하기 어려웠다.


“혹시 너 잎새 어린이집에…….”

“사모님.”

말허리가 뚝 잘림과 동시에, 손톱 끝으로 날카롭게 테이블을 긁는 소리가 났다.

매서운 눈초리로 허영주를 빤히 바라보던 백사라가 곧 앙큼한 말을 토해냈다.


“요즘 적적하신 모양인데, 재미있는 일 좀 만들어드려요?”

“뭐?”

“저번에 분명히 말씀드렸죠. 민설원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 일등 공신이 사모님 본인이란 걸 잊지 말라고.”

“……너.”

백사라의 입술이 삐딱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어 그녀가 테이블에서 손톱을 거두어 단단히 양 팔짱을 꼈다.

꼭 노골적으로 비웃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사모님. 제가 코스메틱 대표 자리까지 오른 무기가 뭔지 아세요? 바로 기록이에요.”

“……기록?”

“네. 생각해보니 이것저것 귀중한 기록이 참 많더라고요. 사모님께서 손수 보여주셨던 민설원의 산모 수첩 사본. 그거랑 저한테 민설원을 없애 달라 사정했던 음성 녹음까지 다 갖고 있다면 어쩌실래요?”

“……뭐?”

허영주의 눈이 한계치만큼 커다래졌다.

그 말대로, 백사라에게 산모 수첩을 훔쳐다 보여준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하려 벌인 일이었지만, 설마 그게 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열곤 허영주가 중얼거렸다.


“왜…… 그런 짓까지?”

“그야,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잖아요? 사업하는 사람에게 있어선 가장 중요한 철칙이죠. 철저한 대비랄까.”

그녀의 말에 허영주는 저 또한 하나의 장기 말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런 날이 올 것을 추호도 예상 못 한 자신과 달리, 백사라는 이미 여러 수를 펼쳐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은 지나치게 치밀했고, 한 사람은 지나치게 허술했다.

감정적으로 행동했던 지난날을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다.


“전 이만 가볼게요. 일하느라 바쁘니까 앞으론 별거 아닌 걸로 불러내지 마세요.”

백사라가 더는 나눌 대화 따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없이 스산한 경고와 함께.


“아, 그리고. 조용히 입 다물고 계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제 귀중한 기록이 권채하 씨 앞으로 배달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요. 안 그래도 별로인 모자 사이, 완전히 망치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이젠 예의라고는 차릴 생각도 없는 백사라에게 아무런 일침도 가하지 못한 채, 허영주는 그저 넋이 나가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며느릿감으로 찍어뒀던 게 무색할 만큼, 그녀의 존재가 오싹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



[부사장님. 접니다. 조금 전에 큰 사모님하고 백사라 양이 함께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한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들어갈 때도 그렇더니, 나올 때는 꼭 싸운 것처럼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정 실장에게서 들어온 보고에, 채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타이밍이 참으로 절묘하군요. 우주의 사고가 있은 직후라…….”

[조심스럽지만, 역시 큰 사모님도 과거의 일에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새삼스러울 일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주를 돌려보낸 직후부터 허영주의 행동을 살피라고 지시했던 것이니까.

설원의 일에 어머니가 얽혀 있다면 분명히 무언가 행동을 취할 거라 예상했다.

좋든 싫든 우주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 이토록 빠른 결과를 가져온 셈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정 실장이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아쉽네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을 수만 있어도 좋을 텐데. 자칫 들킬까 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조심하는 게 먼저니까.”

[어떻게 할까요? 두 분 다 지금은 호텔을 빠져나갔습니다. 저도 이만 철수…… 엇! 죄송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가 갑자기 튀어나오면서 부딪치는 바람에…….]

정 실장이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은밀하게 보고를 이어갔다.


[부사장님께서 지난번 지시하신 거 말입니다.]

“찾았습니까?”

[아직입니다. 다만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어요. 백재영의 주변에 있던 남자 하나가 작은 사모님 사건이 있었던 무렵에 종적을 감췄더군요.]

“종적을 감췄다…….”

채하의 미간이 더욱더 바짝 조여들었다.

백재영 쪽이 진짜 꼬리라는 힌트를 얻고 난 뒤, 그는 정 실장에게 백재영을 도와 사건에 개입했을 만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보라 지시했다.

5년 전, 백재영은 백영에서도 반쯤은 포기한 망나니였다.

당시 그는 뻔질나게 클럽 등을 드나들면서, 질이 안 좋은 인간들과 두루 어울리곤 했다.

그러니 만일 의심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중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 남자를 추적해 보죠. 아내가 사라지기 전과 후, 그 무렵의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샅샅이 조사하세요.”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나머지는 회사 들어가서 보고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전화를 끊고 난 뒤 채하는 거칠게 이마를 쓸어올렸다.

백재영, 정말로 그 인간 말종 같은 놈의 농간으로 설원이 험한 일을 당한 거라면…….

그 생각을 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가 그런 일을 당하는 동안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았던가.


‘당신은 남편 자격이 없어!’

 
순간 어이없게도 최재윤이 내뱉은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 도발에 그땐 분개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권채하. 자신은 설원을 지켜주지 못했다.

지켜주기는커녕 명색이 남편이란 사람이 생판 남보다도 무심하지 않았나.

거기다 늘 마음을 부정하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인정한 적도 제대로 전한 적도 없었다.

결국은 그녀를 잃었던 그 순간까지도.

한심하게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지난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떻게든 그녀와 우주를 지킬 것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

길어졌던 해가 조금씩 짧아지고 있었다.

이제 슬슬 여름이 가나 싶어 설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그녀는 대왕 화분 앞에 웅크리고 앉은 채였다.

각자 이름표가 붙어 있는 선인장 세 개.

아직은 여리게 돋아난 선인장의 가시들이, 설원의 가슴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이 선인장을 오매불망 바라보며 오래도록 함께 살기를 소망하던 우주의 말간 얼굴이 내내 어른거렸다.


‘우주는 대왕 아빠가 우주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우주의 진짜 아빠요!’

 
그 순수한 바람을, 설원이 과연 꺾을 권리가 있을까?

이제 선택은 그녀만의 몫이 아니게 되었다.

혼자였던 때와 달리 이젠 우주의 마음에도 채하의 존재가 깊숙이 들어서 버렸으니까.

진짜 아빠인 줄도 모르고, 진짜 아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아이였다.

우주는 엄연히 대왕 아빠를 사랑하고 있었다.

제가 그렇듯이.

가시를 두르고도 오랫동안 살아가는 선인장처럼, 설원의 사랑 또한 시들지 않아 고통스러웠다.

동시에 쏟아지는 햇볕처럼 달콤하고 달콤했다.

아무리 우주의 핑계를 대봐야 소용없었다.

한 번 떠났던 그의 곁을 두 번 떠날 자신이 없는 건, 바로 설원 본인이었다.

망설이고 망설여도 가슴은 같은 감정을 속삭이고 있었다.


“민설원.”

“……채하 씨?”

별안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설원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기척도 느끼지 못할 만큼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던 모양이었다.


“왔어요? 엇.”

성큼 다가온 채하가 대뜸 설원을 그득히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설원은 그의 품 안에 온전히 갇히고 말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태도에 설원이 물음을 던졌다.

애정 표현이라기보다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매달리는 것 같은 절박함이, 그의 손길로부터 느껴졌기에.

곧 나직한 음성이 싱그러운 숨결을 타고 흘러나왔다.


“내가 당신한테 얼마나 미안한지 모르지?”

“……채하 씨?”

채하의 손이 설원을 옥죄듯 더욱 바짝 안았다.


“당신이 겪은 일을 모두 밝혀낸 뒤에 제대로 사과하겠다고 했지만, 미안해서 참을 수가 없어. 미안하고 미안해서…….”

“채하 씨.”

“염치없는 소리란 거 알아.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진 말아줘.”

떠나지 말라…….

마치 제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어울리지 않는 약한 말을 꺼냈다.


“나는 민설원, 당신하고 우주 없이는 이제 하루도 살 수 없어. 두 사람만 곁에 있어 주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그러니 약속해줘.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왜 그래요. 채하 씨. 무슨 일이에요.”

“……당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평생 속죄할게. 세월이 얼마가 걸리든 다 갚을 테니까 제발 떠나지만 마.”

질끈, 설원은 눈을 감아버렸다.

저와 우주가 없이 살 수 없다는 채하의 진심이, 결국 그를 상처입히는 거라면 어떡해야 좋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가시가 되는 거라면 어떡해야 할까.

내내 가슴속을 맴맴 도는 의문을, 설원은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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