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진짜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65/111)
65. 진짜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65/111)
65. 진짜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2023.03.15.
“하아…….”
채운 가. 거실에 모인 세 남자가 나란히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순서대로 윤 실장, 그를 뒤따라온 채하, 그리고 허영주의 우주 납치 사실을 보고받고 있는 권강호였다.
“어머니 어디 계십니까?”
오자마자 거칠게 안방 문을 열어젖혔건만, 허영주는 그곳에 없었다.
본가 저택은 층만 해도 4층이나 되는 데다 방도 성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았다.
하나하나 다 뒤져볼 기세로 계단을 오르려는 채하를, 권강호가 멈춰 세운 참이었다.
소파 귀퉁이에 선 채 윤 실장은 연신 죄인처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모님에게서 눈을 떼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윤 실장 탓이 아닐세.”
“아버지. 어머니부터 빨리 불러주세요. 당장 우주 데리고 돌아갈 겁니다.”
“채하야.”
근엄한 음성이 채하의 어깨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왜인지 이런 황당한 상황치고는 권강호의 태도가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잘 알았다. 하지만 일단은 돌아가서 기다리는 게 좋겠구나.”
“그게 무슨……!”
곧바로 반박하려는 아들을 향해, 권강호가 깊은 시름을 내비쳤다.
“네 엄마가 반쯤 발작 상태야. 태하를 잃었을 때처럼…… 지금 그런 상태인 것 같다.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우주만 끌어안고 있어.”
발작 상태…….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형이 죽고 난 뒤 허영주는 꽤 빈번하게 발작을 일으켰고, 그 탓에 채하는 어머니의 말을 마냥 쉽게 어길 수가 없었다.
권강호가 채하를 달래듯, 그러나 반쯤은 명령조로 지시했다.
“우주랑 초면도 아니고, 우리 집을 싫어하는 것 같진 않으니 일단 두자. 윤 실장이 어린이집을 아니까 등·하원하는데 문제는 없을 거다. 하루 이틀만 두고 보다가 네 엄마 상태가 좀 나아지면 데려다주마.”
“하…….”
곤란했다. 하지만 채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막무가내인 어머니라 해도, 자식을 잃고 난 비통함만큼은 똑같았다.
그런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건 이 자리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해서 채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무슨 소리예요?”
현관문으로 부자를 마중 나온 설원은, 홀로 돌아온 채하가 꺼낸 이야기에 아연실색했다.
“말 그대로야. 우주는 본가에 있어. 작은 사고가 생긴 바람에…….”
채하는 오후에 잎새 어린이집 앞에서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숨길 일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설원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갔다.
“트럭이…… 갑자기 달려들었다고요?”
설원의 어깨가 숨길 수 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린이집 앞에서 그런 난폭한 운전이라니, 누가 봐도 인위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전 백사라를 만났을 때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를 들은 바였다.
수작을 부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직접적으로 우주의 목숨을 노릴 줄이야.
방심했다. 제가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지켰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절대 잃지 않겠다고 그리 다짐하고 왔으면서.
후회와 죄책감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찰나, 채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 다치지는 않았어. 최재윤이 우주를 감싸줬어.”
“재윤 씨가요?”
놀란 눈으로 설원이 채하를 올려다보자, 그가 그녀의 어깨에 커다란 손을 얹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어깨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래. 다행이지. 미안해. 내가 조금 더 일찍 우주를 데리러 갔었으면…….”
“아니에요. 채하 씨는 요즘 회사 일도 바쁘잖아요. 내가 더 챙겼어야 했어요. 그리고 어차피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원이 흠칫 시선을 피했다.
충격적인 소식에 하마터면 백사라와 모종의 일이 있었다는 뉘앙스를 흘릴 뻔했다.
“어머니가 좀 진정되면 아버지께서 바로 돌려보낸다고 했으니까, 당신은 너무 걱정하지 마.”
“……알겠어요.”
우주가 그 집에 있다는 사실을 들었으니, 예전 같았으면 화부터 냈을지도 몰랐다.
한데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채하의 심경 또한 저만큼이나 복잡할 게 분명했으니.
지난번 이사회에서 리조트 사업 건이 전면 재검토라는 결과가 나온 뒤로, 채하는 부쩍 또 바빠졌다.
사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설원으로서도 일이 잘되어가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백사라와 만난 뒤 피어오른 불안감에, 채하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까 고민도 했다.
그러나 이래저래 힘들어 보이는 그에게 버거운 이야기를 하기엔 맞지 않는 타이밍 같았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우주가 사고를 당한 것이었고.
‘……역시 우리는 안 되는 걸까.’
어째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렇게 엇갈리기만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단지 그와 우주, 셋이서 함께하고 싶을 뿐인데.
권채하라는 남자의 곁에 있으려 하면 할수록, 욕심을 내면 낼수록 모두에게 불행한 일만 생기는 것 같았다.
혹여나 애초에 제 것이 아닌 인연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탓이라면…….
“민설원.”
“…….”
“민설원.”
“아.”
바로 이마 위로 내려앉은 뜨거운 숨결에 설원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눈동자 안에 권채하, 제가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쓸데없는 생각은 할 필요 없어. 나를 믿어.”
그녀를 내려다보는 채하의 눈빛에는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는 늘 이런 강건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설원은 또다시 홀리듯 이끌리고 말았다.
“네…… 믿을게요.”
“그래. 착하네. 우주 엄마 아니랄까 봐.”
꼭 아이를 다루는 듯한 다정다감한 말투에 저절로 가슴이 설렜다.
그가 빙긋 가벼운 웃음을 실은 입술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 붙였다.
곧 붉은 입술 사이로 야릇한 속살거림이 흘러나왔다.
“당신을 속상하게 했으니까, 오늘은 오랜만에 내가 외조해줄게.”
“네. 네?”
“가지. 욕실로. 우리 꼬마 말랑한 볼 대신 아내의 발이라도 조물조물해야 안정이 될 것 같아.”
“뭐예요, 그게. 왠지 변태 같아요.”
피식, 설원의 핀잔에 채하의 입술이 더욱 웃음을 머금으며 벌어졌다.
이윽고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채하가 그녀의 목덜미에 손을 집어넣고는 간질였다.
그 따스한 손놀림에 설원도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이어 나직한 채하의 목소리가 설원의 입술에 닿았다.
“당신 앞에서는 변태여도 상관없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입술이 하나인 듯 겹쳐졌다.
외조 같은 걸 해주지 않아도 그것만으로도 위로받기엔 충분했다.
우주는 꼭 두 밤을 자고서 돌아왔다.
채하의 말대로 크게 다친 곳도 없는 데다 불안한 기색도 없어, 설원은 한시름을 놓았다.
다만 허영주만큼은 더욱 경계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녀가 자식에 대해서 비이상적인 집착을 보인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까진 그게 죽은 장남이나 채하에 국한될 거라고만 여겼는데, 이토록 우주를 욕심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주의 임신 사실을 알고선 그토록 난리를 쳤었던 시어머니였기에.
정원을 총총 뛰어다니며 화분마다 자기 왔다고 인사를 하는 아이의 등을, 설원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동화 속 요정이 날갯짓하는 듯 예쁜 장면이었다.
저렇게 사랑스러우니 욕심이 안 날 수 없겠다는, 고슴도치 같은 기분이 들어 헛웃음이 났다.
“엄마. 엄마!”
어느새 한 바퀴를 돌고 온 우주가 쌕쌕 숨을 내쉬며 무릎을 짚었다.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정원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그렇게 뛰면 땀 나지. 밴드 떨어지겠다.”
상기된 볼이 한없이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워 설원은 밴드가 붙은 부분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러자 우주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좀처럼 조르는 법이 없는 아이가 무언가를 부탁할 때의 모습이었다.
“우리 우주, 엄마한테 뭐 할 말 있어?”
“으응…….”
“말해 봐. 우주야.”
다정한 손길에 안심한 듯 우주가 다시 맑은 눈동자로 설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자그마한 손으로 설원의 손을 붙들었다.
“엄마. 우리 이제 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응?”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 그녀의 가슴이 철렁했다.
혹여나 아이가 혼란스러워할까 봐 우주 앞에서는 그런 대화를 최대한 자제했는데,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꼬물꼬물 우주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부탁하듯 말을 이었다.
“재윤 아빠가…… 엄마랑 우주를 데리고 섬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랬어요.”
“그랬구나…….”
아마 채하와 재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설원이 우주의 손을 꼬옥 잡고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고는 저도 모를 제 마음을 아이에게 물었다.
“돌아가기 싫어? 여기 있고 싶어?”
“으응~ 우주랑 대왕 화분에 통통 가시 심고 약속했잖아요.”
“통통 가시? 아. 선인장 말이구나.”
우주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랑 대왕 아빠랑 우주랑 가족 화분이라고 했잖아요. 백 년 동안 우주도 여기서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요.”
“…….”
투명하리만치 순수한 아이의 마음에 어쩐지 설원은 울컥했다.
제 가장 깊숙한 바닥에 있는 바람을, 아이의 고사리손으로 건져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설원은 낱낱이 파헤쳐진 본심을 다시 우주의 입을 빌려 물어보았다.
“가기 싫어?”
더욱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하고서, 우주가 고개를 더 세게 끄덕였다.
“응! 우주는 대왕 아빠가 우주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우주의 진짜 아빠요!”
이번에는 질문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그저 설원은 우주를 품에 힘껏 껴안고, 동그란 머리를 한참이나 토닥였다.
우주가 제 심장인 것처럼, 그렇게 토닥이고 또 토닥였다.
*
한편 우주를 다시 돌려보낸 뒤 허영주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독기 어린 백사라의 표정과 날 선 말들이 도무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비밀리에 입수한 참이었다.
절대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뻗대는 윤 실장 대신, 허영주는 잎새 어린이집 앞에 감시망 하나를 붙여놓았었다.
물론 그의 역할은 우주를 하원시키러 채하와 민설원이 오지 않는 날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선 둘이 번갈아 가며 뻔질나게 오는 통에 정작 별 소용이 없었지만.
한데 그에게서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사모님. 아이가 다칠뻔한 날 말입니다. 제가 마침 그쪽 방향에 서 있었거든요. 얼핏 본 거라 정확하진 않지만, 트럭에 번호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꼭 작정한 것처럼 아이한테 달려들더라고요.’
번호판도 없는 데다, 작정한 것처럼 달려들었다…….
결코 흘려 들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다.
백사라와 얼마 전 언성을 높였던 뒤로 갑자기 우주가 사고를 당할 뻔하다니, 이게 과연 우연일까?
지금이야 재벌가 사모님이지만, 허영주도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었다.
그런 그녀의 감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워낙 싸늘하게 자리를 파한지라 다시 얼굴을 마주하기는 껄끄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며느릿감으로 점찍어두었던 백사라라도,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해코지하려 든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