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내 손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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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내 손자야!
2023.03.12.
“우주야. 선생님한테 오자. 다쳤는지 봐야지?”
“네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토끼반 선생님이 우주를 냉큼 붙들어 어린이집 안으로 데려갔다.
겉보기론 외상은 없었지만, 일단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사이 다른 선생님은 차 안에 타고 있던 아이들을 눈치껏 인솔했다.
이제 둘만 남은 재윤과 채하 사이에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만이 감돌았다.
“자격이 없다고 했나?”
한없이 냉담한 얼굴로 채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최재윤 씨. 이참에 속 시원히 털어놓지 그래. 나도 궁금했거든. 대체 내 아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
“왜, 막상 말하려니 마음이 안 내키나?”
“권채하.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몰라. 안다면 감히 설원이 옆에 있겠단 욕심 따윈 품지도 못할 테니까!”
재윤의 말에 채하의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욕심이라.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욱 알고 싶었다. 대체 설원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를.
“좋아. 전부 말해주지. 어디 다 듣고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이번만큼은 재윤도 칼을 품었는지, 그는 모든 것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설원이 만신창이가 되어 섬에 나타났던 순간부터 떠나기까지의 일을.
5년 전, 봄의 끄트머리에서 재윤은 섬을 찾아온 설원을 만났다.
찾아왔다는 말이 적절한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거의 쫓겨온 듯 엉망이 된 모양새였다.
그야말로 ‘만신창이’라는 표현이 맞을 법했다.
재윤의 집 앞에 반쯤 쓰러져있다시피 한 설원을 발견한 뒤, 그녀는 사흘을 내리 잠만 잤다.
겨우 눈을 뜨고 나서야 재윤은 설원이 옛날 어머니를 구해준 소방관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원이 아이를 가진 상태라는 것도, 그래서 힘겹게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사실 또한.
아마도 그 이유는 재윤의 어머니가 한때 산부인과 간호사로 일했기 때문일 터였다.
말 그대로 그녀는 ‘살기 위해’ 재윤의 가족을 택했다.
자세히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설원은 몸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처지인 듯했다.
아이를 가졌음에도 병원에 갈 수 없다고 했고, 먼 길을 온 것 치곤 별다른 소지품도 없었다.
그러나 재윤의 가족은 그녀가 원치 않는 건 하나도 묻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단지 설원의 아버지에게 목숨을 빚진 값을 갚는 것이었기에.
그렇게 설원은 재윤 부모님의 보호 아래 섬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섬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했고, 섬 밖의 일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고 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다만 신분이 없는 상태라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어려움이 따랐다.
사소한 것들은 재윤의 가족 이름으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분명한 한계 또한 존재했다.
주기적으로 받아야 할 산부인과 검진을 설원은 재윤 어머니의 간단한 진찰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임신 기간 동안 큰 탈이 없었던 것이 호조라면 호조였지만, 출산만큼은 달랐다.
오래전 간호사를 그만둔 재윤 어머니 혼자만으로는 그런 큰일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소 위험한 선택을 감내했다.
재윤의 어머니가 섬 밖 병원에서 일할 때 친분이 있던 의사의 비공식 진찰을 받기로.
기록 없이 진료를 받는 게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알았지만, 그것이 태어날 아이의 생명만큼 중요한 문제는 될 수 없었다.
워낙 체력이 약해져 있어 우려했으나, 천만다행으로 우주를 무사히 순산할 수 있었다.
재윤의 가족 모두가 배 속에서부터 효자라고 할 정도로 기특한 아이였다.
그러나 재윤은 설원이 낳은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세상을 다 가진 표정과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 한 사람의 얼굴에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니까.
*
“몸을 회복하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지. 부모님 댁에 들어와 함께 살자는 걸 설원이가 한사코 거절하는 통에, 산후조리도 충분히 받지 못했고.”
“…….”
“게다가 변변한 환경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작은 섬에서 어린 아기를 홀몸으로 키웠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신 같은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겠지.”
“…….”
“지난 5년간 설원이가 힘들어할 때 권채하 씨, 그쪽은 곁에 있지도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남편이라고? 아빠라고? 웃기지 말라고 해!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저 또한 힘들었다고, 5년 내내 미친놈처럼 민설원을 찾았다고.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밀려오는 무력감에 스스로가 환멸스러워 채하는 입술만 하염없이 짓씹었다.
설원의 슬픔을,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을, 아픔을.
같은 시간 저도 겪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안 되는 것 같아, 채하는 지금의 감정을 가슴 깊이 삼켰다.
“우선은 감사하지. 내 아내를 보살펴준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이 상황에 어울리진 않았으나 언제고 감사 인사를 하려 했던 채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밝은 목소리가 두 사람의 뒤쪽으로부터 들려왔다.
“대왕 아빠!”
쪼르르 달려온 우주가 채하의 허벅지에 냉큼 매달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흰 찹쌀떡 같은 뺨에 붙은 밴드가 그의 마음을 천 갈래로 갈라지게 만들었다.
재윤의 말이 맞았다.
이토록 소중한 아이에게 상처가 나는 것을, 자신은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또다시 입술을 짓씹으려 하던 찰나였다.
우주가 빙글 고개를 돌려 재윤에게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윤 아빠! 대왕 아빠한테 화내지 마요. 네?”
“…….”
“우주는 재윤 아빠랑 대왕 아빠가 엄청 엄청 좋아요. 그러니까 다 같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순수하기 그지없는 아이의 말이었지만, 재윤의 가슴은 왠지 모르게 따끔거렸다.
그 와중에도 우주가 본능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닌, 눈앞의 권채하였기에.
“일단 우주는 데려가죠. 병원에 가서 다친 곳이 없는지 봐야 할 것 같으니.”
“……그러시죠.”
“으응? 우주 병원 안 가면 안 돼요?”
“안 돼. 꼬마. 병원에 가야 용감한 아기 호랑이인 거야.”
“으응…….”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오늘은 깊숙이도 재윤의 가슴을 찔렀다.
“재윤 아빠. 우주 병원 갈게요!”
“그래. 우리 우주 착하다.”
손을 흔들며 우주와 권채하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재윤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걸 보니 팔다리의 통증 따윈 아픈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톡톡 어깨를 치는 손짓에 재윤이 겨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우주와 함께 나온 토끼반 선생님이 그의 뒤에 멀뚱히 서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아이들을 태워놓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아니에요. 그보다 재윤 씨도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제야 재윤은 그녀의 표정에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그렇게 굴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괜히 멋쩍어진 그는 얼른 선생님을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섬에서도 일하면서 자주 굴렀으니까요. 하하.”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 얼른 집에 데려다줘야죠.”
“아…….”
토끼반 선생님이 차 안에서 대기 중인 아이들을 보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재윤에게 건넸다.
우주의 뺨에 붙어있던 토끼와 당근 패턴이 그려진 밴드였다.
“여기저기 까진 것 같은데 이거라도 붙이시라고요.”
“아…… 예. 감사합니다.”
“그, 그럼 내일 뵐게요. 몸조리 잘하세요!”
다급히 인사를 건네곤 토끼반 선생님은 어린이집 안으로 냉큼 들어가 버렸다.
손에 들린 밴드 한 뭉텅이와 그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재윤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 서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뭐가 됐든, 누구라도 저를 걱정해주는 이 하나 있어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
“뭐? 우리 아가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난 건 아니고, 날뻔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트럭이 돌진했다네요.”
“그게 그거지! 세상에,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야! 어떤 빌어먹을 놈이 우리 아가를!”
고상한 취미를 붙일 겸 들고 있던 서예 붓이 맹렬하게 벽을 향해 날아갔다.
우주에게 접근하는 일이 힘겨워진 이후, 허영주는 잎새 어린이집에 몰래 사람을 보내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 덕분에 빠르게 소식을 입수한 것이었지만, 윤 실장으로서는 그저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당장 준비해! 병원으로 가!”
바로 제 주인이 이렇게 나올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채운 가를 전담하는 병원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기에, 제가 말려도 그녀 혼자 달려갈 게 뻔했다.
그래서 윤 실장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따라가서 감시라도 하는 편이 효율적인 선택일 테니.
그러나 그것은 똑똑한 윤 실장으로서도 빗나간 판단이었다.
우주를 향한 허영주의 집착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그만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병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허영주는 그를 따돌리곤 냅다 달렸다.
그녀의 목적지는 당연히 하나였다.
“심 원장! 심 원장!”
기어이 진찰실 안으로 들이닥친 허영주가 정신없이 주위를 살폈다.
난데없는 상황에 놀란 간호사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차마 내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심 원장 어디 있어? 우주는?”
“아. 원장님은 지금 부사장님하고 이야기 중이십니다. 두 분이서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뭐? 그럼 애기는! 우리 아가는 어디 있어!”
“응? 예쁜 할머니다!”
“아, 아가!”
진찰실 뒤쪽 커튼 안에서 드레싱을 끝낸 우주가 해맑게 얼굴을 내밀었다.
오매불망 찾던 아이를 발견한 허영주가 냅다 가서 우주의 손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매의 눈으로 머리카락 한 올부터 발끝까지를 빠르게 살폈다.
들은 대로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말간 뺨에 붙인 밴드가 속상해 미칠 것만 같았다.
“아가. 이 할머니랑 가자!”
“예쁜 할머니랑요? 어디로요?”
“일단 가자!”
“엇, 저기 사모님! 이러시면 안…… 윽!”
막아서려는 간호사를 밀쳐버린 허영주가 우주를 둘러업다시피 하곤 진찰실을 빠져나왔다.
그 장면을 목격한 윤 실장의 눈동자가 축구공만큼이나 커다래졌다.
“사모님! 사모님! 지금 뭐 하는 짓이십니까? 아이는 왜 데리고 나오셨어요, 네?”
윤 실장이 다급하게 좌우를 살폈다.
어찌 된 일인지 아이와 함께 있어야 할 채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허영주는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우리 집에 데려갈 거야!”
“그게 무슨 무서운 말씀이세요? 여기 부사장님도 와 계신 데다, 작은 사모님이 알기라도 하면…….”
“윤 실장 말 잘했어! 이런 사고까지 났는데, 그 여자한테 맡겨둘 수 없어. 내가 지켜야지!”
“아니, 사고가 날 뻔한 거지. 난 건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이 아이는 어디까지나 작은 사모님 아들…….”
순간 허영주의 동공이 수십 년 봐 온 어느 때보다 매섭게 빛났다.
곧 그녀의 입에서 분노어린 외침이 튀어나왔다.
“내 손자야! 내 손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