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 당신은 자격 없어 (63/111)


63. 당신은 자격 없어
2023.03.08.


정 비서는 아들의 진지한 얼굴을 묵묵히 응시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어쩌면 그 자신도 예상했는지 몰랐다.

천천히 그가 주름진 눈꺼풀을 닫았다.

그라고 백재영의 악행을 눈감아주고 싶었겠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앗아간 만큼, 백번 천번을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터였다.

다만 아버지로서 딸의 죽음에 그런 배경이 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다.

그것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딸을 위한 일이라고만 여겼다.

한데 지금 아들의 표정을 보니 어쩌면 제가 틀렸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세상사 모든 것이 사필귀정일 테지.”

순리대로 흘러간다면 그 역시도 막을 도리는 없으리라.

결국 정 비서는 반절의 결단이 담긴 대답을 내주었다.


“생각해 보마.”

 

 


“천박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민설원이나 허영주 그 아줌마나 똑같아! 주제도 모르고 나대기는!”

“…….”

“뭘 멀뚱히 서 있어? 왔으면 이쪽으로 냉큼 오지 않고!”

“대표님한테 갔다간 제가 그걸 맞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뭐야? 하! 당신 정말!”

책상 위에 있던 잡동사니들을 바닥으로 마구 던지고 있던 백사라가, 문 앞에 딱 붙어 있는 백재영의 끄나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비실비실한 게 믿음도 가지 않는 데다, 상황 파악 못 하고 말대꾸나 하는 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지난번에도 허영주 앞에서 제가 미행을 시켰다고 줄줄이 불지 않았던가.

해명할 필요 없는 상황이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곤란할 뻔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날을 세워도 언제고 제 시어머니가 될지 모를 인물이니.


“……짜증 나 미치겠네.”

백사라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자 그제야 남자가 슬그머니 책상 앞으로 와 섰다.


“이번엔 또 뭘 해야 합니까? 기사도 너튜버 영상도 다 실패했잖아요.”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하는 거야?”

“전 그저 더 이상 의욕이 안 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능력도 없는데 뻔뻔하기까지 한 태도에, 백사라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더 가까이 오라 지시했다.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남자가 책상 앞에 바짝 붙어섰다.


“그럼 이번엔 좀 더 제대로 된 일을 해봐.”

“제대로 된 일이요?”

남자가 몸을 기울이자 백사라는 그에게 은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그녀의 지시를 들은 남자는 곧바로 기겁하며 귀를 떼어 냈다.


“저는 못 합니다.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어요.”

“못 해?”

“당연하죠! 전 그냥 재영 형님과의 연락망 역할로 고용된 거지, 그런 악독한 일을 시킨다는 소린 못 들었단 말입니다!”

악독한 일, 이라는 말에 백사라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 분노 어린 행동에 굴하지 않고, 두 손을 펄럭거리며 사양의 의사를 더욱 강하게 전달했다.


“이미 지난 두 건도 제 도덕적 기준과는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못 합니다.”

악독한 일에 이어 도덕적 기준까지…….

백사라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 피식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치 저를 천하의 악역 취급하는 언사에,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이거, 진짜 백재영도 한물갔네. 당신 같은 인간을 데리고 있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남자가 바닥만 물끄러미 응시하자, 백사라는 됐다며 그를 내보냈다.

아예 영구히 백재영에게 돌아가라는 통보와 함께.

예전에는 이런 일마다 백재영이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를 인간들을 일회용으로 쓰곤 했다.

추적당할 염려가 없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그림자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이번에도 꼬리가 잡히지 않기 위해 사람을 보내달라 한 것이었는데, 어디서 저런 숙맥을 보내온 건지 어이가 없었다.

그릇도 안 되는 주제에 엔터 대표를 하겠답시고 몸을 사리느라, 백재영도 어지간히 맹탕이 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똑같이 맹탕처럼 굴 생각은 추호도 없는 백사라였다.

제게 늘 입안의 혀처럼 굴던 허영주가, 저를 역적이라도 보듯 하던 걸 떠올리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흐물흐물하게 만든 존재를 당장이라도 부서트리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우주 같은 소리 하네.”

입수한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자, 백사라는 새삼 이가 갈렸다.

불쾌할 정도로 민설원과 권채하를 반반씩 빼닮은 아이였다.

허영주에게는 두 사람이 계약관계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권채하를 포기했을 거라 말했지만, 당연히 아니었다.

계약관계든 아니든, 아이가 있든 없든, 민설원이 다시 돌아왔든 아니든.

그 어떤 것도 권채하를 포기할 이유 따윈 되지 않았다.

그깟 일들로 포기할 거라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여전히 쉽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으나, 방해가 되는 건 뭐든 치워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깟 애송이, 어차피 나중에 내가 채하 씨 아이를 낳으면 그만이야.”

마음을 굳힌 백사라는 얼른 구석에 놓아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번만큼은 다소 위험을 무릅쓰는 것쯤 감수하리라, 단단히 결심한 참이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부는 민설원에게 경고 차 겁을 좀 주기 위해서.

*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여름날의 오후.

여느 때처럼 잎새 어린이집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이 풍경이 제법 익숙해진 재윤은 어린이집 선생님과 눈인사를 하곤, 부지런히 아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원래는 설원과 우주가 섬으로 돌아갈 때 함께 떠날 예정이었기에 이 일엔 딱히 정을 주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본디 정 많은 성격은 어딜 가나 여전한 법, 재윤은 이미 잎새 어린이집에 퍽 정이 들고 말았다.


‘설원이랑 우주는 아마 돌아오지 않겠지.’

앙증맞은 노란 원복을 입고 있는 우주를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서글프다면 서글픈 일이었다.

설원이 권채하와 생일을 보내겠다고 전했을 때, 그 예감은 점차 확신으로 변하게 되었다.

설원뿐만 아니라 우주마저도 이젠 손닿지 못할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아 쓸쓸했다.

섬에서는 매일같이 얼굴을 보곤 했는데, 지금은 권채하의 차를 타고 돌아갈 때까지 잠깐 볼 수 있는 게 전부였다.

요즘 들어 기사를 보내는 대신 본인이 오는 경우가 많아 더더욱 그러했다.

비록 우주가 진짜로 권채하의 아이라 해도, 섬에서 지내는 동안 재윤 또한 우주를 친아들처럼 생각하고 보살폈다.

저를 ‘재윤 아빠’라 부르는 우주의 말간 얼굴을 볼 때마다, 진짜 그의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바랐다.

아이를 향한 애정만큼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우주를 볼 수 있는 그 찰나를 재윤으로서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토끼반이 조금 늦게 끝나는지, 아직은 우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토끼반 선생님은 나오면서 늘 빼놓지 않고 재윤에게 인사를 했기 때문에 나오면 바로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재윤은 우선 먼저 나온 아이들부터 인솔해 차에 태우기 시작했다.

언제나 눈에 띄는 권채하의 까만 세단도 아직 보이지 않았다.


“자. 유솔이 조심조심 타자.”

“네!”

“하율이도 천천히…….”

“재윤 아빠!”

아이들을 반쯤 태웠을 무렵, 등 뒤에서 옥구슬처럼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세상 하나뿐인 특별한 아이의 목소리. 우주였다.

이제 저를 향해 작은 발로 총총 열심히 뛰어오겠지.

그 생각에 재윤의 입가가 절로 둥글어졌다.


“우주…….”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며 등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토끼반 선생님의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우주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끼이익!

타이어에서 요란하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비틀거리는 트럭 한 대가 우주를 덮쳤다.


“…….”

숨도, 공기의 흐름마저도 멈춘 것만 같았다.

그저 느낄 수 있는 건 먹먹하게 귓가에 와닿는 아우성과 우주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윽.”

팔다리를 타고 느껴지는 통증에, 재윤은 제가 우주를 껴안고 굴렀음을 깨달았다.


“우주야! 괜찮아? 재윤 씨! 괜찮으세요!”

“우주…… 우주는요.”

“으아앙. 재윤 아빠! 재윤 아빠!”

우렁찬 울음소리가 아이의 무사함을 알리자 재윤은 깊이 안도했다.


“……다행이야.”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자신이 이 잎새 어린이집의 기사를 하고 있던 것이, 제 눈과 귀가 욕심인 줄 알면서도 우주를 쫓고 있었던 것이.


“재윤 씨. 무릎에서 피가 나요!”

토끼반 선생님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안절부절못하자 재윤이 천천히 우주를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행히 차에 치이진 않았어요. 차는…….”

재윤이 방금 몸을 피한 길목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한데 그곳에는 요란하게 질주하던 트럭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다.

멍하니 텅 빈 길목을 바라보는 그에게 토끼반 선생님이 발을 동동 구르며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


“글쎄, 트럭이 그냥 가버렸어요! 음주 운전 같은데 신고를 해야……!”

“……신고해도 별수 없을 겁니다.”

“네?”

재윤은 대답 대신 팔다리에 묻은 흙과 피를 털어냈다.

언뜻 몸을 던질 때 보기로는, 트럭에는 번호판이 달려 있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를 칠 뻔하고도 그냥 갔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된 일일 가능성이 컸다.

그때였다. 분노하던 토끼반 선생님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 재윤도 천천히 눈을 돌렸다.

거기엔 권채하가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멀거니 서 있었다.

비록 한발 늦긴 했으나, 이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들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트럭이라니……. 이게 무슨.”

“대왕 아빠!”

재윤의 품 안에서 울고 있는 우주를 내려다보는 채하의 눈빛이 미친 듯 흔들렸다.

망연자실함, 그에 더해진 충격과 맹렬한 분노.

그러나 그 감정은 재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지금의 사고는 바로 눈앞의 이 남자로부터 기인한 것일 테니까.


“우주야. 아빠…… 대왕 아빠한테 와.”

“아니.”

채하가 뻗은 팔을 차단하기라도 하려는 듯, 재윤은 우주를 더욱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러곤 그를 향해 으르렁거리듯 읊조렸다.


“권채하. 당신은 아빠라고 불릴 자격이 없어.”

“……최재윤. 우주 이리 보내.”

경고와도 같은 살벌한 음성이 날아들었지만, 재윤은 더는 그에게 예의를 갖출 생각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옛날이랑 다를 건 하나도 없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말 그대로야. 당신은 설원이랑 우주의 보호자가 될 수 없어. 채운 그룹의 부사장씩이나 되는 몸이 24시간 아이와 아내를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약속한 날짜가 되면 내가 설원이랑 우주를 데리고 섬으로 돌아갈 거야.”

“선 넘지 마. 최재윤.”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기류에 토끼반 선생님은 차마 끼어들지 못한 채 주춤거렸다.

재윤이 우주를 등 뒤로 숨긴 채, 한 발짝 성큼 채하에게 다가섰다.

마주 선 둘의 시선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억눌린 재윤의 잇새로 마침내 참고 참았던 분노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당신이…… 당신이 설원이가 겪은 일을 알기나 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권채하, 당신은 민설원의 남편이 될 자격이 없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