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 고뇌 (62/111)


62. 고뇌
2023.03.05.



 


“무슨 일이세요, 바쁘신 사모님께서 저를 다 불러내시고?”

백사라의 입에서 튀어나온 빈정대듯 퉁명스러운 말투에, 허영주는 내심 당황했다.

늘 어머님 어머님 하면서 아양을 떨더니 오늘은 ‘사모님’이라는 거리감이 확연한 호칭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 이제 허영주로서도 백사라에게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들어도 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으므로, 이 문제는 일단 넘기기로 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시급하고 중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우리 사라 얼굴을 통 못 본 거 같아서 말야. 호호. 잘 지냈어?”

“잘 지내는 걸로 보이세요?”

백사라가 실눈을 뜨다시피 하며 쳐다보자 허영주는 금세 말문이 막혀버렸다.

확실히 전보다 더 표정이 표독스러워진 것이, 빈말이라도 잘 지낸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허영주는 호호 웃음으로 무마하며 손부채를 펄럭거렸다.

호텔 라운지 바에 오늘따라 사람이 바글바글한 탓인지, 백사라는 더욱 심기가 불편한 모습이었다.


“음료부터 마시자. 사라야. 응?”

어쨌거나 살살 달래는 게 오늘 회동의 목적이었으므로, 허영주는 어색함을 풀려 애썼다.


“…….”

부질없는 짓이었다.

애쓴 보람도 없이, 음료를 사이에 두고서 긴 정적만이 이어졌다.

예전 같으면 살갑게 시시콜콜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백사라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음료만 들이켜댔다.

거의 원샷하듯 음료를 마시는 꼴을 보니, 곧 자리를 뜨려 할 것 같아 허영주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용건을 꺼냈다.


“사라야. 그, 땅 말인데…….”

“땅이요? 무슨 땅이요?”

뻔히 무엇을 말하는지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게 얄미웠지만, 지금은 굽혀야 할 때였다.

해서 허영주는 친밀감을 강조하기 위해 더 바짝 의자를 당겨 앉았다.


“옛날에 회장님께서 조부모님께 물려받으셨다던 땅 있잖아. 지금은 사라 너한테 물려주신…….”

“아~ 리조트 부지요?”

“그래! 그 땅!”

“그게 왜요?”

“…….”

또다시 말문이 막힌 허영주가 흐르지도 않는 진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러자 백사라가 음료 잔을 내려놓더니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어린애한테 푹 빠져서 저는 까맣게 잊으신 줄 알았더니, 그 부지를 명한에 넘긴다니까 제 생각이 나셨나 봐요?”

“아니, 나는, 그게…….”

“안됐지만, 그 부지는 명한이랑 거래 끝났어요. 채운에게 넘길 일은 앞으로도 절대 없을 거고요.”

“뭐어?”

허영주가 큰 소리를 내자 백사라가 기가 막히단 듯 혀를 찼다.


“사모님. 자꾸 중요한 사실을 잊으시는 모양이니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릴게요. 우주라고 했던가요? 채하 씨 아이.”

“우리 아가…… 아니, 그 아이를 왜?”

“헛된 기대를 하시는 듯한데, 그 아이를 아무리 예뻐하신들 소용없을 걸요.”

“뭐?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우주 이야기가 나오자 허영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러자 백사라가 재미있다는 듯 양팔을 꼬아 팔짱을 꼈다.


“진실을 다 알고도 과연 할머니로 받아들여 줄까요? 명색이 할머니라는 작자가 자기 엄마한테 저지른 짓을 알게 되면, 아이가 얼마나 충격받겠어요. 안 그래요?”

“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

겁먹은 듯 파들파들 떨리는 허영주의 눈동자를, 백사라는 꿰뚫기라도 할 기세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친히 그녀가 한 짓을 알려주었다.


“기억 안 나세요? 저한테 채하 씨랑 그 여자가 계약관계라는 걸 알려주신 분도 바로 사모님이시고, 그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려주신 것도 사모님 아니셨던가요?”

“…….”

“그런 천한 여자한테서 손주 보고 싶지 않다고 노발대발하셨던 게 누구죠? 그런데 지금 그 여자가 낳은 손주 때문에 저를 배신하시다니. 나 참.”

“언, 언제 배신을 했다고 그러는 거야? 사라 너…….”

휙, 백사라가 허영주에게서 시선을 돌려 제 손톱 끝을 응시했다.

동시에 그 손톱만큼이나 날카로운 진실을 읊어주었다.


“사모님이 그토록 바라셔서, 제 손을 더럽히면서까지 그 여자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드렸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시면 안 되죠.”

이쯤 되자 눈동자에 이어 허영주의 전신까지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외면했던 진실이 표면 위로 드러나자 새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땐 민설원의 임신 사실에 눈이 뒤집혀 백사라의 제안을 냉큼 수락하긴 했지만, 일이 너무 커져 버려 찝찝했던 차였다.

거기다 마음에 걸리는 일 하나가 늘 그녀를 따라다녔다.


“……안 그래도 나도 너한테 꼭 물어보고 싶었다! 그 민설원 엄마는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다니, 뭐가 말이에요?”

“시치미 떼지 말고! 그 여자, 민설원이가 사라진 다음 날 바로 죽었잖아! 그게 정말 우연이냐고.”

“흐응~ 우리 사모님. 알고 보니 오랫동안 저를 믿지 못하셨던 모양이네요. 아니, 의심하셨다고 해야 맞으려나요?”

백사라가 노골적으로 입가에 비웃음을 띄웠다.

그 표정을 보니 어차피 오늘 어떤 거래도 성사되긴 글렀다는 판단이 들었다.

허영주는 이참에 그동안 가슴에 꾹꾹 눌러놓았던 의문을 팡팡 터뜨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솔직히 이상하게 생각했어. 내가 거액을 쥐여 준다는데도 쳐다도 안 보던 민설원이야. 그런데 네가 무슨 수로 걔를 설득한 거냐고.”

“그야, 내내 시집살이를 당했으니 시어머니 돈은 받고 싶지 않았나 보죠.”

“그럼 걔 엄마가 뜬금없이 죽은 건 뭔데?”

“글쎄요. 명이 마침 거기까지였나 보죠. 아시잖아요? 중병 환자였던 거. 언제 죽든 이상할 일도 아닐 텐데요.”

냉담하고도 싸늘한 그녀의 말투에선 일말의 진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야 허영주는 백사라가 제게 무언가를 속여 왔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이미 늦어버렸다.


“뭐가 됐든 사모님. 민설원이 사라진 데 가장 큰 공을 한 게 바로 사모님 본인이라는 점을 잊지 마세요. 사모님이 두 사람이 계약관계라는 말만 안 했어도, 전 채하 씨를 깨끗이 포기했을 테니까요.”

“…….”

정말 포기했을 거냐고, 묻기에도 지쳐 허영주는 남은 음료를 후루룩 먼저 다 마셔버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백사라가 핸드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엇.”

의자 다리에 구두가 걸린 바람에 백사라의 몸이 휘청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를 잽싸게 부축했다. 허영주가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 남자를 보는 백사라의 표정이 곧장 험악해졌다.


“뭐야?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아. 대표님께서 시키신 대로 이쪽 사모님을 따라오다 보니, 마침 대표님이 함께 계시길래 기다렸습니다.”

“…….”

어이가 없다는 듯 백사라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녀가 언성을 높이며 남자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하! 이거 원, 바보도 아니고!”

“엇. 아이고. 말하면 안 되는 거였죠, 참.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만 입 다물고 따라 나와.”

“예예. 알겠습니다.”

굽신대며 남자가 백사라의 뒤를 따라 라운지를 빠져나갔다.

저를 미행하라 시켰다는 황당한 소리에, 허영주는 멍하니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미 백사라와 자신 사이에 신뢰 따윈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이 순간 그녀는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다.

*



“오늘 일이 잘 안 됐어요?”

“응?”

“채하 씨 표정이 어두워 보여요.”

퇴근하고 돌아온 채하의 안색을 살피며 설원이 걱정스레 입술을 뗐다.

오늘 리조트 부지 건을 두고 이사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그녀도 정 실장에게 전해 들은 바 있었다.


“다들 백영이 가진 부지를 일 순위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게 왜 당연히 채운의 소유가 될 거라 믿고 있는지, 황당하더군.”

“…….”

“아마 어머니 때문이겠지. 차라리 잘됐어. 이참에 중역들에게 백영과는 아무런 접점도 없다는 걸 똑똑히 인식시켜 줄 작정이야.”

“그럼 큰 손해를 보는 거 아니에요?”

설원의 목소리에 더욱이 깊은 우려가 담겼다.


“뭐, 이사회에서 한 번에 통과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전면 재검토 이야기가 나온 건 좀 의외지만.”

“전면 재검토요?”

“회사 내부에도 꼭 아군만 있는 건 아니거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적이 더 무서운 법이지.”

“…….”

물끄러미, 채하가 설원을 바라보더니 성큼 가까이 다가와 대뜸 턱을 들어 올렸다.

돌발적인 그 행동에 설원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

“어쩌지. 민설원. 당신이 그렇게 내가 걱정스러워 미칠 것 같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일이 잘 안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마저 생기는군.”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우주는?”

채하가 대뜸 우주의 행방을 물어오자, 설원은 갸웃하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했다.


“방에서 그림 그리고 있어요.”

“그래? 잘 됐군.”

“네?”

물음표가 흩어지기도 전에 설원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포개졌다.

이런 상황에 이런 입맞춤이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아찔한 감각이 순식간에 그녀를 잠식했다.

마치 저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채하에게 입술을 맡긴 채, 설원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우주가 그림을 천천히 그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과 함께.


 

*



“일환아. 무슨 일이냐?”

“아버지.”

정 비서가 아들의 부름에 거실로 나왔다.

세쌍둥이 손주들이 모두 잠든 늦은 시간인지라, 둘은 기척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마주 앉았다.


“오늘 이사회에서 리조트 건이 전면 재검토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러냐. 우리 부사장님이 곤란해졌겠구나.”

“네. 아직 백지화한다는 얘기까진 아니지만, 은근히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이사진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워낙 빠르게 승진했으니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고, 질투하는 사람도 많을 테지.”

안경을 고쳐 쓰며 정 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채하로서는 부사장직을 견고히 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니,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본격적인 위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일 터였다.

백영이 그 부지를 경쟁사에 넘기리라는 것쯤은 예상했지만, 이후로도 방해와 견제 공작을 해올 게 명확했으니.


“아버지.”

“오냐. 얘기해라. 일환이 네가 이 아비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

정 실장이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을 스윽 바라보곤,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이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아버지가 완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윤서가 백재영과 거래한 내역. 그걸 밝히면 어떨까요, 아버지?”

“……일환아.”

“압니다. 세상에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아버지 마음. 하지만 저는 윤서의 비극적인 죽음을 마냥 묻어두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께서 누누이 말씀하셨잖아요. 세상에는 인과응보가 있다고,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니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

“그렇게 정직하고 성실했던 윤서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백재영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런 놈을 감싸고 돈 백영 역시요.”

백재영.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 딸을 죽음으로 내몬 인간.

평생 잊지 못할 그 이름 석 자에, 정 비서의 얼굴 위로 깊은 고뇌가 드리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