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두 사람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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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두 사람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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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두 사람의 우주
2023.03.01.
“부사장님. 백영이 명한 건설과 접촉했다고 합니다.”
정 실장의 보고에, 채하가 들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지그시 턱을 괴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새삼 놀랄 것도 없었지만, 참으로 시기적절했다.
백사라가 설원을 불러내 만난 직후였으니.
“결국 움직였나 보군요. 명한이 전부터 백영이 가진 부지를 탐내더니.”
“아무래도 백영 측에서 그쪽에 리조트 부지를 넘길 것 같은데, 어떡하죠?”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정 실장이 채하의 눈치를 살폈다.
이 건은 채운이 레저 쪽으로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 중 하나로, 아직 본격적인 리조트 사업에 돌입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이 리조트 신설 건이 채하가 부사장이 된 뒤 처음으로 맡는 굵직한 사업이자, 상징적인 의미라는 점이었다.
채운의 후계자로서 제대로 해낼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이른바 시험대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정 실장이 근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관없습니다. 두 번째 후보지 쪽으로 이번 이사회, 통과시켜 보죠.”
“네. 부사장님.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분주한 발걸음으로 정 실장이 부사장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본 후, 채하는 파일을 하나 열었다.
작년부터 개인적으로 차근차근 준비해 두었던 리조트 후보지들이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 파일 안에 백영의 부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독을 품은 건지, 백영의 압박은 그 속도와 수위를 바짝 높여왔다.
회사뿐만이 아니라 사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인가? 친히 전화까지 다 하고.”
[이 양반. 서먹하게 굴기는.]
뚜렷한 목적을 담아 걸려 온 전화에, 권강호의 미간이 내 천 자로 갈라졌다.
최근 식사 자리를 재차 권유받았으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한 터였다.
그래선지 백 회장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밥 한 끼 먹자는데 그리 데면데면해서야, 원. 자네가 그렇게 나오니까 우리 사이가 자꾸 틀어지는 게 아닌가?]
“세월이 흐르면 사람 사이도 다 변하게 되어 있다네. 자네가 가장 잘 알잖나.”
[허허. 강호 이 사람. 왜 이러나. 지금 채운 사정이 상당히 곤란하게 돌아가고 있을 텐데. 정확히 말하면 자네 아들, 권채하 군의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았나?]
역시나 목적을 신속하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내는 백 회장이었다.
언제부턴가 둘 사이의 우정 대신, 그 자리를 채워온 계산속.
“글쎄. 우리 아들 일이라면 알아서 잘 해결할 걸세. 백 회장이 그렇게까지 걱정해주지 않아도 말이지.”
[내가 단순히 명한에 부지만 넘겼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노골적으로 협박조가 실린 목소리에, 권강호가 잠시 숨을 죽였다.
그 틈을 노려 백 회장이 친절하게도 다음 수를 예고해 주었다.
[채운이 봐둔 부지가 대충 어디일지는 다 짐작하고 있네. 자네와 나, 젊은 시절부터 안목이 비슷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건가?”
[당연히 그 리조트 사업, 아예 시작도 못 하도록 틀어막아 주겠다는 경고지.]
딸이나 아버지나 보통 독기를 품은 게 아니었다.
백영의 수장, 그는 자존심이 높은 인간이라 이 이상의 치욕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었다.
채하에게 목매는 딸을 봐서 그나마도 여기까지 참아준 것이리라.
역시나 백 회장이 제대로 속내를 드러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사과하게. 공식적으로.]
“사과라고 했나?”
[그래. 난 강호 자네 아들과 우리 딸을 혼인시키고 싶은 마음 따윈 애초에 없었어. 초혼도 아니고 이미 한 번 다녀온 데다, 이혼한다더니 아내와 사이만 좋다지?]
“우리 아들 내외의 금실이 거기까지 소문났나 보군. 허허.”
[난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야. 우리 사라가 닭 쫓던 개가 되었다고, 재계에 소문이 자자해. 이렇게 망신을 준 걸 공개적으로 사과하게. 당신 아들과 며느리가 같이 말이야. 그러면 부지는 차치하고, 사업을 방해하진 않겠네.]
방해하지 않겠다…… .
세월이 지나도 백 회장의 말투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드러났다.
그것이 우정에 균열을 만들었던 줄도 모르고.
이미 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이 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 권강호는 그 균열을 아예 더 단호하게 벌려버렸다.
“거절하겠네. 우리 아들은 백영에 사과할 만한 일을 애초에 한 적이 없으니까.”
*
“어? 대왕 아빠다!”
샛노란 원복이 여름 햇살 아래 환하게 빛났다.
채하의 마음에 드리운 그늘도, 아이의 노란 꽃 같은 웃음에 순식간에 가시는 것 같았다.
“대왕 아빠!”
이내 쪼르르 달려온 우주가 채하의 듬직한 품 안으로 덥석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말간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주 데리러 온 거예요? 엄마가 대왕 아빠는 오늘 바빠서 못 올 거라고 했는데~.”
“바빠도 우리 꼬마는 보러 와야지. 어디 보자. 마침 딱 시간 맞춰서 왔군.”
허리를 숙여 우주와 눈을 맞추고 있던 채하가 몸을 일으키자, 아이들을 하원 버스에 태우고 있는 재윤이 보였다.
그와도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 토끼반 선생님이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우주 대왕 아버님!”
“안녕하세요. 우주는 어린이집에서 별일 없죠?”
“별일은요! 저희 잎새 어린이집에서도 최고의 스타인걸요!”
“그렇습니까.”
“물론이죠! 친구들하고도 사이좋게 잘 지내고, 어쩜 이렇게 예쁜 짓만 하는지 우주 아버님은 정말 좋으시겠…… 아.”
흠칫하며 입을 다물곤 토끼반 선생님이 우주의 눈치를 살폈다.
해맑은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제게 쏟아지는 칭찬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채하가 얼른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건네며 대화를 전환했다.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길래, 아이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아이스크림 좀 사 왔습니다.”
“어머! 감사해서 어쩌죠! 안 그래도 오늘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아이들이 땀을 많이 흘리더라고요.”
묵직한 봉투를 받아든 선생님이 특유의 토끼 이빨을 빛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차 옆에 서 있는 재윤에게 가장 먼저 아이스크림을 꺼내 건넸다.
“이거 드세요. 차 안은 더 더우니까요. 아이들도 주시고요.”
“아, 네……. 감사합니다.”
머쓱한 표정으로 재윤이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는, 차에 탄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주러 갔다.
채하가 덤덤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 저기 우주 어머님도 오셨는데요?”
토끼반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설원이 있었다.
양산을 쓰고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유난히 청순해 보였다.
떨어져 있던 게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채하의 심장이 덜컹거릴 만큼.
설원이 이쪽으로 채 도착하기도 전에, 우주가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우주야.”
“엄마도 아이스크림 먹어요. 대왕 아빠가 아이스크림 엄청 엄청 많이 사 왔어요!”
“아. 아빠가…….”
양산을 접으며 설원이 예고 없이 와 있는 채하를 바라보았다.
분명 오늘 회의가 줄줄이 이어져 바쁠 거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집에서 화상회의로 진행하기로 했어. 오늘은 간소한 비공식 회의거든. 이를테면 작전 회의 같은 거랄까.”
“네? 작전…… 회의?”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단 뜻이야.”
빙긋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채하가 설원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그러더니만 대뜸 그녀의 어깨를 잡아 끌어안았다.
“……!”
보는 눈이 많건만, 돌발적인 그 행동에 설원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게다가 재윤도 차창 너머로 이쪽을 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채하가 어깨를 더 바짝 밀착하며 토끼반 선생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예,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우주야. 잘 가.”
“네! 토끼 선생님. 우주 갈게요~.”
꾸벅, 배꼽 인사를 건넨 우주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문제가 하나 생겨났다.
엄마와 대왕 아빠 중 누구 손을 붙잡아야 할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자, 이리 와. 꼬마.”
손을 내려 사이에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채하가 우주의 고민을 말끔히 해결해주었다.
곧 함박웃음을 지으며 우주가 양손으로 설원과 채하의 손 하나씩을 붙잡았다.
그 작고 따스한 온기에 두 사람의 얼굴에 동시에 웃음이 번졌다.
“우주 아이스크림은 차에 타서 먹자.”
“응! 우주 엄청 엄청 맛있는 걸로 먹을래요!”
설원과 채하가 함께 잡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우주였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두 사람이 만든 사랑스러운 세상.
“어휴, 더워 죽겠네. 정말!”
세 사람의 정다운 그림자가 잎새 어린이집 앞을 빠져나가고 한참 뒤.
담벼락 뒤에서 땀에 젖은 두 개의 그림자가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그러게, 누가 이런 날 오랬나요?”
“센스 없게 양산도 안 챙겨와 놓고, 무슨 말이 많아! 윤 실장, 갈수록 일에 소홀한 거 알아?”
“사모님한테만 소홀한 거지, 전 채운에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뭐가 어쩌고 저째?”
죽일 듯 저를 노려보는 허영주를 향해, 윤 실장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담벼락에 숨어 있어야 하냐고요. 그냥 차 안에서 보면 되잖아요. 에어컨도 빵빵한데.”
“그걸 말이라고 해? 차에서 보면 잘 안 보이잖아! 우리 귀여운 아가 얼굴이!”
“하. 일사병이라도 걸렸다간 그런 말 안 나오실 겁니다.”
땀이 송골송골해진 이마를 닦아내며 윤 실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영주의 선글라스 안에도 땀인지 모를 습기가 맺혀 있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더위에 더해, 조금 전 벌어진 상황에 허영주의 불쾌지수는 무척이나 상승한 상태였다.
“오늘은 좀 아가를 보나 했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죄다 몰려온 거야! 짜증 나 죽겠네!”
사실 몰려온 건 이쪽이었지만, 역시 이것도 지적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했다.
대신 업무상 대비를 위해 슬쩍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로 했다.
“그래서, 어쩌실 건데요? 아까 보신 것처럼 저 셋은 이제 갈라놓으래야 저얼대~ 갈라놓을 수 없을 거 같은데요.”
얄밉게 도발하는 윤 실장의 말투에 허영주는 드물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바보도 아니고 그 장면을 보고도 모를 수는 없는 사실이었으니.
꼭 붙들고 있는 작은 손을 낚아채고 싶을 정도로, 질투 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입수한 백영이 채운을 압박하고 있다는 소식은, 도저히 그녀를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대책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일단 사라를 회유해봐야지.”
“백사라 양을요?”
“그래. 그냥 채하는 포기하고 나랑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겠냐고 말이야.”
“설마 백사라 양이 사모님을 진짜로 좋아해서 따르고 있다고 착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윤 실장! 댁은 대체 누구 편이야?”
“진정하세요. 사모님. 진짜로 더위 먹고 쓰러지면 어쩌시려고요.”
“어휴, 정말 이래저래 짜증 나!”
분에 겨워 손을 퍼덕대면서도 사실 허영주도 윤 실장의 말이 옳다고는 여기고 있었다.
백사라가 원하는 건 제 아들이지, 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런 만큼 이 위기를 타파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