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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들끓는 욕망 (60/111)


60. 들끓는 욕망
2023.02.26.



“채, 채하 씨…….”

등 뒤에 닿는 푹신한 감촉이 오늘 밤 유독 낯설었다.

설원이 하염없이 헤매는 손길로 채하의 가슴팍을 밀어 보았지만, 부질없는 몸부림이었다.

커튼 바로 아래 놓인 소파에 두 사람의 몸이 포개지듯 무너졌다.

그녀의 위로 놓인 채하의 그림자가 어스름한 조명 아래 어른거리고 있었다.

피할 수도 없이, 도망칠 곳도 없이 설원은 그의 안에 단단히 갇혀버렸다.

서늘한 공기가 무방비하게 드러난 살결을 스치고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채하의 눈동자엔 들끓는 욕망만이 가득했다.

곧 그가 닿을 듯 가까운 입술을 열어 설원의 항의에 답해주었다.


“왜? 안 되나?”

“하지만 여긴 소파인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당신하고 나, 둘밖에 없는데.”

길게 올라간 입꼬리를 설원의 흰 목덜미에 바짝 붙이며, 채하가 낮게 속삭였다.

동시에 그가 입고 있던 셔츠를 바닥으로 벗어던졌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명확해, 설원의 두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여…… 여기서요?”

“최고의 효자인 우리 꼬마가 모처럼 준 찬스를 그냥 날릴 순 없잖아.”

당황한 설원이 무어라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채하가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이어 그의 손이, 몸이, 설원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 맹렬한 감각에 설원은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이제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한번 시작된 부부의 밤은 끝을 모르고 내달렸다.

새벽 어스름이 밝아올 때까지 설원은 2층 침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무자비하게 저를 탐하는 채하에게 붙잡힌 채, 그저 그가 퍼붓는 입맞춤에 온몸을 맡기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몇 번이나 그의 품 안에서 무너져 내린 건지 헤아릴 수도 없는 사이, 아침 햇살이 커튼 너머로 비치기 시작했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서 설원은 채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잠이 든 건지, 고른 숨을 쉬는 그의 가슴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땀에 잔뜩 젖은 탄탄한 근육을 물끄러미 보다 보니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뺨이 달아올랐다.

밤새 제 살결에 이 근육이 닿아 있었다는 것이 어쩐지 믿기지 않았다.

그토록 멀고 멀었던 권채하라는 남자와, 이토록이나 거리를 좁혔다는 것이.

그때였다.

밝게 비친 햇살 덕분인지 설원의 눈에 그간 띄지 않았던 무언가가 들어왔다.

가슴 위쪽으로 엄지손톱만 하게 나 있는 선명한 상처였다.

마치 무언가에 찔린 듯하기도 하고 긁힌 듯하기도 한, 묘한 상처.


 


“…….”

조심스레 설원은 그 상처를 향해 손끝을 가져갔다.

그러나 상처에 막 손을 대려는 순간, 채하가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이런, 내가 잠깐 잠든 사이를 못 버티고 유혹하고 있던 건가? 아직도 부족해?”

“정말!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흐음.”

그의 농담을 흘려넘기고 설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그 상처를 살펴보았다.

금방 생긴 상처라기보단 오래된 상처가 계속 덧나고, 또 덧난 느낌이었다.

조각상처럼 매끄러운 몸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상처였다.

늘 완벽함을 추구하는 권채하 같은 남자가 이런 걸 그대로 뒀을 것 같진 않았다.


“이거…… 무슨 상처예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설원이 그에게 진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정작 채하는 웃음으로 그 질문을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어디 긁혔나 봐.”

“…….”

왠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채하의 말투에서 그 이상의 설명은 없을 것이라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알고 싶지만, 알아선 안 될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설원이 더 생각할 겨를은 주어지지 않았다.


“당신이 모처럼 유혹해줬는데, 그냥 넘어가면 아쉽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채하의 손길이 그녀의 살결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 낯 뜨거운 손길에 설원이 몸을 버둥거리며 일으키려 했지만,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해서 설원은 그저 투덜대는 수밖에 없었다.


“권채하 씨가 이런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 어떻게 밤새…… 아침까지…….”

설원의 투정에 채하가 부드럽게 그녀의 손에 깍지를 껴 왔다.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가 친절한 대답을 해주었다.


“나도 미처 몰랐어. 민설원. 당신을 만나기 전엔. 내 안에 이런 욕망이 들끓고 있단 걸 말이야.”

곧 깍지 낀 손이 겹치며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금 빈틈없이 맞닿은 가슴에 아까 그 상처의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어쩐지 안타깝고 애달픈 기분이 들어, 설원은 뒤엉킨 손가락을 힘주어 잡았다.

절대 이 손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



“이거, 귀하신 몸이 웬일로 손수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셨나.”

“전화로 할 만한 얘기가 아니니까 그렇지. 알면서 뭘 물어?”

신경질적으로 핸드백을 집어 던지며 백사라가 털썩 가죽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짜증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가 붙여준 남자, 영 허술해! 이번 너튜버 영상 건도 완전히 실패했다고. 괜히 무슨 미담이라도 있는 것 같은 뉘앙스만 풍기고 끝나버렸잖아!”

“허어. 그러냐? 나름 내가 아끼는 부하를 붙여준 건데.”

“능력 있는 사람을 붙여 달랬지, 내가 언제 오빠가 아끼는 남자를 붙여 달랬어? 중요한 일인 거 몰라?”

“사라 너, 영 이 오빠를 못 믿는 모양이네.”

자리에 등을 푹 기댄 채 앉아있던 백재영이 목을 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면도가 덜 돼 거슬거슬한 턱을 어루만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오빠 일하는 곳까지 불쑥 오면 쓰나. 말했잖아. 대표 자리까지 오르려면 이 오빠가 몸 사려야 한다고.”

“그래서, 발을 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글쎄, 상황에 따라선 그것도 고려해봐야겠지. 사라 네가 소개해준 소진이. 그새 따로 남친이 있다더라? 설마 알고 소개해준 건 아니겠지?”

“뭐? 그건…….”

흠칫한 백사라가 애꿎은 손톱 끝을 매만졌다.

사실 소진의 남자관계도 꽤나 복잡했기에, 오빠를 소개해줄 때 일일이 새 남자친구가 생겼는지까지는 확인해보지 않았던 터였다.

백사라의 표정 변화를 뱀눈을 하고 지켜보던 백재영이 이번엔 소파에 등을 푹 기댔다.

그러더니 시큰둥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됐다. 나도 지금은 한가롭게 여자나 만날 때가 아니거든. 이 오빠도 중요한 사업을 좀 펼쳐야 하지 않겠냐? 어?”

“……그래서?”

“비즈니스에 집중해야 하니까 이제 사라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란 뜻이지.”

“오빠.”

서슬 퍼런 음성이 백사라의 새빨갛게 칠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역시 제 오빠와의 평화는 오래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당근이 먹히지 않는다면, 다시 채찍을 휘두를 수밖에.


“잊었나 본데, 이 일은 어디까지나 오빠와 나 공동의 일이야.”

“공동? 무슨 엉뚱한 소릴 하는 거냐?”

“말 그대로야. 난 옛날에 처리하지 못한 일을 지금 제대로 마무리하려는 거고, 그 옛날 일에는 오빠도 관여되어 있지. 누가 그 여자 차를 방파제 아래로 밀었는지 잊으면 곤란해.”

“아. 그게 바로 나다?”

“아니라고 할 셈이야? 꼭 오빠 손으로 밀지 않았어도, 손을 쓴 건 오빠잖아.”

조목조목 신경을 긁는 백사라와 달리, 백재영의 흥분 지수는 급상승했다.


“야, 백사라! 그 손을 쓰게 만든 게 누군데? 어? 네가 치사하게 협박을 해서……!”

“그러게 협박당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하!”

여유롭게 턱을 매만지던 손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백재영은 핏발 선 눈으로 제 동생을 노려보았다.

씩씩거리는 숨이 새어 나오는 그와 달리, 백사라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달래는 듯 상냥한 말투로 그를 구슬렸다.


“걱정하지 마. 오빠. 방금 말했잖아. 어디까지나 오빠와 나, 공동의 일이라고.”

“너…….”

“난 다만 우리가 한배를 탔다는 사실을 오빠가 잊지 않도록, 되새겨준 것뿐이야. 내가 설마 하나뿐인 친오빠에게 해를 가하겠어?”

대답 대신 백재영은 계속해서 백사라를 쏘아보았다.

그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백사라가 핸드백을 들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녀가 일어서자 또각거리는 힐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

일순 백사라가 휙 하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갑자기?”

“……아냐. 문밖에서 기척이 느껴진 것 같아서.”

“예민하기는. 아무도 얼씬하지 말라고 말해뒀어! 됐으니까, 얼른 가라. 네 얼굴 보고 있으니 속이 울렁거린다.”

“섭섭하게 굴긴. 알았어. 오빠. 다음에는 조금 더 확실한 일을 해줘야 할 것 같으니, 연락할게.”

“알았으니까 빨리 가!”

백재영의 호통에 백사라는 훗 미소를 지어 보이곤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자 백재영도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동생이지만, 백사라는 단 오 분만 얼굴을 마주해도 사람을 한계치까지 몰아넣는 재주가 있었다.

하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언제나 제 약점을 쥐고 흔드는 데에, 세상에서 가장 능한 존재가 바로 백사라였으니까.

그 바람에 옛날 불거진 여자 문제를 백사라에게 볼모로 잡히고 말았다.

만난 여자가 한 트럭이라 그때도 딱히 발목 잡힐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한데 그 여자가 아이를 가졌고, 하필이면 그게 아버지의 고향 친우인 정 비서의 딸이었던 것이다.

기껏 설득해 아이를 지우기로 합의를 봤건만, 그녀는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아이를 유산한 상태였다고 했다.

당시 백재영은 백영에는 발도 붙이지 못하는 망나니였다.

그런 그가 겨우 엔터 사업에 뛰어들 발판을 마련하고 있던 시기인지라, 그 사실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정을 백사라는 냉큼 챙겨 제 이익으로 삼았다.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연적을 처리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하…… 정말 짜증 나네!”

어쩐지 이번에는 더욱 일이 꼬이고 있는 듯해, 백재영은 두툼한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그러곤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제가 백사라에게 붙여준, 방금 푸념을 잔뜩 들은 끄나풀에게.


[예. 부대표님.]

“어디냐? 시킨 대로 잘하고 있어?”

[지금 사라 코스메틱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시킨 일 외엔 더 하지 말라고 하셔서요.]

“그래. 계속 그렇게 맹하고 눈치 없게 행동해.”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고 보니 제가 연기에 소질이 있나 봅니다. 이참에 배우 오디션이나 볼까 봐요. 하하.]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끊는다. 앞으로도 백사라가 지시하는 일 하나하나 나한테 보고해.”

[예! 부대표님.]

전화를 끊고 나자 이제야 방금까지 치밀어올랐던 화가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선심 쓰듯 동생에게 붙여준 끄나풀은 일한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머리 회전이 무척 빠른 남자였다.

나중에 대표직에 오르면 비서로 쓸 작정이라 나름의 테스트 겸 보낸 것이었다.

일부러 백사라의 경계심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 어딘가 부족해 보이게끔 행동하란 지시를 곁들여서.

책상 위에 놓인 부대표 명패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백재영은 힘껏 핸드폰을 쥐었다.

마치 그것이 백사라의 목덜미라도 되는 것처럼.

이번만큼은 영악한 동생에게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진 않을 것이었다.

해서 그도 그물을 쳐두었다.

비릿한 미소가, 남매의 엇갈린 욕망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어쩌냐, 동생아. 너만 함정을 팔 수 있는 건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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