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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부부의 밤 (59/111)


59. 부부의 밤
2023.02.22.



 


“데이트요?”

“그래. 데이트.”

다소 떨떠름한 설원의 대답에 채하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남편이 아내에게 데이트하자는 게 그런 표정을 지을 일인가? 설마 싫은 건 아니겠지?”

“싫은 게 아니라…….”

설원의 입술이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붙어버리자, 채하의 눈썹이 더욱 위를 향했다.

못마땅함이 가득 묻어나는 그 표정에 설원은 황급히 변명을 이었다.


“갑작스러워서 그러죠.”

“데이트 신청이 원래 예고하고 하는 거였나?”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해줘. 난 살면서 한 번도 데이트라는 걸 해본 적이 없거든.”

“네?”

채하의 발언에 설원의 눈동자가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채운의 공식 황태자가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다니…….


“거짓말이죠?”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의심 가득한 질문에 채하가 이번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한없이 진중한 눈빛. 그에 설원은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곧 채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 발짝 가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난 정말로 해본 적이 없는데, 민설원. 당신은 보아하니 많이 해본 모양이군.”

“아, 아니에요!”

“흐음. 당신도 안 해 봤다고?”

“……그게, 늘 어머니를 간병하다 보니 여유가…….”

“여유가 있으면 신나게 데이트했을 거라는 말로 들리는군.”

“아니라니까요.”

어쩐지 진지하게 시작한 대화가 점점 유치한 방향으로 흐르는 기분에, 설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채하가 즐거운 듯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을 녹이고 마는, 설원이 좋아하는 웃음이었다.

다정히 미소를 머금은 채하가 설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속닥였다.


“어쨌든 데이트 신청, 받아줄 거지?”

두 눈 가득 들어찬 채하의 수려한 얼굴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렇게 설원은 인생 첫 데이트 신청을 얼떨결에 수락하고 말았다.


“네. 좋아요.”

 

*



“채, 채하 씨. 잠깐만요. 손은 좀 놓고…….”

“왜? 데이트의 기본은 손잡기 아닌가?”

능청스러운 채하의 말에 설원의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물론 손잡는 것 정도야 부부 사이에 별거 아니라면 아니었지만…….


“이건 너무…….”

“너무?”

채하가 짓궂게 눈썹을 찡긋거렸다. 어디 더 말해 보라는 듯이.

그 노골적인 태도에 설원은 하려던 말을 차마 이을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가슴이 콩닥대는 게 견디기 버거울 정도였다.

그가 설원의 손을 너무도 야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빈틈없이 깍지를 껴 휘감은 손은 어쩐지 낮의 데이트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흐음. 우리 아내가 또 내 순수한 마음을 왜곡하고 앞선 생각 중인 모양이군.”

“아, 아니에요! 이상한 생각 안 했어요!”

“난 이상한 생각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

제 발등에 도끼를 찍은 설원의 뺨이 속수무책으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채하가 또다시 그녀가 좋아하는 웃음을 흘리더니 부드럽게 손을 빼냈다.

그 행동에 안도하려는 찰나였다.


“……!”

“자, 이럼 되겠지?”

“채하 씨…….”

설원은 이제 채하를 설득하려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가 한층 더 바짝 몸을 붙이며 단단히 팔짱을 껴왔기 때문에.

마치 한 몸인 듯 가까워진 거리에 채하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네. 팔짱이라는 게 이런 느낌이군.”

“……설마 팔짱도 안 껴본 거예요?”

“기억에 없는 걸 보니 그렇겠지.”

돈은 많아도 정은 부족한 재벌가의 자제라 그런지, 왠지 납득이 가기도 했다.

잔뜩 밀착된 채 채하가 비스듬히 다정한 눈길로 설원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도 영화관도 가고 떡볶이도 먹고 네모난 상자 안에 들어가서 사진도 찍고 해 보자고.”

“……그런 걸 진짜로 채하 씨가 하겠다고요?”

“왜,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

“난 민설원, 당신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볼 생각이야. 옛날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함께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전부 같이해 보고 싶거든. 우선 이런 사소한 것들부터.”

“채하 씨…….”

밀려오는 감동의 물결에 설원의 코끝이 괜스레 찡해졌다.

사실 저 역시 정말로 그와 하고 싶었던 건, 이렇게 여느 커플처럼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었으니까.

가슴이 따뜻해진 설원은 이 온기를 고스란히 그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해서 그녀는 채하의 팔을 꼬옥 붙들며 살포시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자, 그럼 가볼까.”

두 사람의 사소하면서도 달콤하기 그지없는 데이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지라 영화관은 마침 딱 좋은 피서지였다.

맨 끝자리의 커플석에 앉아 채하와 설원은 손을 꼭 붙잡은 채 영화를 보았다.

로맨스 영화에 지금껏 감흥이라곤 없던 설원이었는데, 한 장면 한 장면 이토록 로맨틱할 수가 없었다.

더욱 로맨틱한 것은 설레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채하와 시선이 마주쳤다는 점이었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채하는 설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 영화에 집중한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주인공의 진한 키스신에 설원의 입술이 놀라움으로 벌어질 때, 채하가 팝콘을 쏙 넣어주었다는 것도 아마 그녀는 모를 터였다.


“와, 이거 양념 대박!”

“…….”

“……왜 그렇게 봐요? 혹시 묻었어요?”

“그냥, 민설원 당신도 그런 단어를 쓸 줄 아는구나 싶어서.”

“아.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머쓱해진 설원이 혹시나 싶어 양념을 닦으려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그 전에 채하의 손가락이 먼저 그녀의 입꼬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찔끔 묻은 양념을 닦아낸 그가 자연스레 제 입에 손가락을 넣고 맛을 음미했다.


“그러네. 확실히 당신이 그렇게 말할 만한 맛이야.”

“…….”

오늘 하루만 대체 몇 번 얼굴이 물드는 건지, 아예 단풍이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남이 묻힌 양념을 먹다니…….

제가 알던 권채하가 귀신에 씌기라도 한 걸까 싶어, 설원이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키스하고 싶게.”

“키…… 콜록!”

결국 사레가 들리고 만 설원의 등을 채하가 얼른 토닥여주었다.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야살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와중에도 귓가에는 나지막하면서 유혹적인 말이 내려앉았다.


“민설원. 쑥스러워할 때 당신이 얼마나 미치도록 사랑스러운지 모르지? 낮에도, 밤에도 말이야.”

“떠…… 떡볶이나 먹어요!”

그에게 대박 양념의 맛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원은 빠르게 이 대화를 종료해 버렸다.

그러나 불시에 심장을 파고드는 채하의 말과 행동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연애도, 데이트도 안 해본 남자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그런 영역은 학습보다는 타고나는 듯했다.


“휴…….”

분명 즐거운 데이트인데, 왜 이리 진이 빠지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채하가 저를 들었다 놨다 하는 통에 뺨을 비롯한 신체 곳곳이 체온 조절 능력을 상실한 것만 같았다.


“혹시 물어보면 그냥 더위 먹었다고 해야지.”

화장실 거울에 비친 발그레한 얼굴을 바라보며 설원이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우주를 제임스 부부에게 맡기고 온지라, 더 늦기 전에 데리러 가야 했다.

한데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채하가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무척이나 유쾌하면서도 흡족한 얼굴로.

그 미소에 일순 설원은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제임스하고 로라가 오늘 하루 우주를 재워준다네.”

“그게 무슨? 갑자기 우주를 왜요?”

화들짝 놀란 설원이 채하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잽싸게 빼앗아 들었다.

화면 안에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스터 권. 우주가 우리 집이 마음에 든대요! 우리도 당연히 우주가 마음에 들고요! 그래서 오늘 자고 가기로 했어요. 우주는 걱정하지 말고 오늘 밤 좋은 시간 보내요. 그동안 설원 씨한테 준 선물들이 도움이 될 거예요. 파이팅!>

“아…….”

대체 뭐가 파이팅이란 건지, 맥없는 음성이 설원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채하는 다른 단어에 더 관심을 보였다.


“이쯤 되니 정말 궁금해지네. 그동안 받은 선물들의 정체가 대체 뭔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편한테 말 못 할 정도로 낯 뜨거운 물건인가?”

“그, 그…….”

설원의 뺨에 물든 단풍이 기어이 절정을 맞이하고 말았다.

왜인지 이번에는 채하의 얼굴에도 붉은 기가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핸드폰을 냉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설원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늦었으니 이만 돌아갈까. 꼬마가 없는 부부의 밤은 어떨지, 기대가 되는군.”

“…….”

아직 늦은 시간도 아니라는 반박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란 엄포도, 설원은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의 강한 손길에 이끌려 가는 수밖에는.

*



“조용한 게 낯설기는 하네. 당장이라도 우리 꼬마 웃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데.”

“그러게요…….”

“당신 목소리가 왜 그렇게 기어들어 가? 꼭 잔뜩 긴장한 사람처럼.”

“기, 긴장이라뇨? 집에 오니까 엄청 편한데요. 긴장 같은 거 하나도 안 했어요.”

“흐음.”

눈을 길게 접으며 채하가 설원을 바라보자, 설원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어. 커튼이 왜 비뚤어져 있지.”

설원이 거실 통창의 커튼을 향해 사사삭 걸음을 옮겼다.

낮에 햇볕이 너무 강해 커튼을 쳐두었는데, 가운데가 마침 살짝 벌어져 있었다.

반투명한 커튼 속으로 설원은 도망치다시피 몸을 숨겼다.

일부러 더 꾸물거리며 그녀는 커튼의 주름 하나하나를 공들여 정돈했다.

부디 그가 먼저 2층으로 올라가길 바라면서.

하지만 오늘 권채하는 설원의 예상대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미처 간과하고 있었다.


“제임스 부부의 선물 대신 새로운 놀이를 해보자는 뜻인가?”

“……!”

언제 다가왔는지 커튼 뒤로 채하가 서 있었다.

놀라 등을 돌리자 마주 선 그의 그림자 안에 온전히 설원이 담겼다.

마치 언제나 그의 안에 민설원이라는 존재가 있었던 것처럼.

잠시간의 침묵. 두 사람의 뒤로는 오직 은은한 달빛뿐이었다.

이윽고 스르륵, 커튼을 헤치는 소리가 마치 옷을 벗기는 소리처럼 야릇하게 설원의 귓가에 닿았다.


“민설원.”

채하의 커다란 손이 가볍게 커튼 안으로 들어와선 설원의 뺨을 감쌌다.

온종일 붉어져 있던 뺨은 그의 손길에 순식간에 온도를 높였다.

저도 모르게 설원이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피하지 마.”

채하가 커튼을 한 겹 걷어내고 그녀가 물러난 만큼 훌쩍 다가와 섰다.

그의 눈빛이 저 달빛보다 깊다고 하면, 과장일까.

하지만 정말로 설원의 눈에 비친 채하의 눈빛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욕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채하는 둘 사이를 가로막은 커튼을 아예 걷어내 버렸다.

그러고는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설원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닿는 뜨거운 감각에 설원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순식간에 입술이 촉촉해지고, 진득한 마찰음이 서로의 입술 너머를 오갔다.

곧이어 채하의 손길이 과감하게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커튼이 아니라 설원의 옷을.

부부의 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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