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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접촉 (58/111)


58. 접촉
2023.02.19.


깊은 밤의 끝에 아침이 밝아왔을 때, 채하는 곁에 없었다.

그가 쉴 새 없이 입술로 흘려보낸 와인으로 인해 평소보다 깊이 잠든 탓이었다.

대신 침대 옆 협탁 위에 반듯한 글씨로 쓴 메모가 남아 있었다.

<우주는 내가 등원시킬 테니, 편하게 푹 자.>

그답게 정갈한 글씨에도 가슴이 이상하게 설레었다.

꼭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가 된 기분에, 설원은 그 메모를 소중히 품으로 가져갔다.

그때였다. 요란한 진동이 핸드폰에서 울렸다.

채하인가 싶어 얼른 핸드폰을 집어 든 설원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메시지를 보내온 사람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죠? 우리가 이렇게 볼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설원이 저를 불러낸 여자를 향해 잔뜩 경계심을 드러냈다.

반면 그녀는 여유롭게 한쪽 입꼬리를 쭉 끌어올렸다.


“오랜만이에요. 민설원 씨.”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오만한 눈빛이 설원을 위에서부터 훑어내렸다.

백사라. 두 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던 여자.

비겁한 방식으로 저를 속여 바닷가 방파제 아래로 떠민 여자.

옛 친구라도 만난 듯 태연자약한 태도로 그녀가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모처럼 만난 김에 차나 한잔하죠.”

“됐어요. 마시고 싶지 않아요.”

“그럼 뭐 할 수 없고. 여기, 이걸로 한 잔만 가져다줘요.”

“예. 손님.”

주문을 받은 직원이 파티션 너머로 사라지자, 백사라는 카페를 힐끔 둘러보곤 이내 설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거리낌이라곤 없이 노골적으로 먹잇감을 탐색하는 시선이었다.

곧 그녀가 새빨간 입술을 열곤 용건을 끄집어냈다.


“민설원 씨. 우리, 약속이 다르지 않아?”

대뜸 나온 본론에 설원은 작게 혀를 찼다.

결국 천하의 백사라도 분을 이기지 못해 저를 불러낸 것이었다.

화풀이를 하기 위해서.

그러나 설원도 예전의 설원이 아니었다.


“약속? 약속이 아니라 협박이었겠죠.”

“흐응~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네. 기억상실 흉내는 이제 그만 뒀나 봐?”

“당신 앞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죠. 백사라 씨, 당신이 나한테 했던 파렴치한 거짓말, 벌써 잊었어요?”

“글쎄, 어디까지나 우린 정당한 거래를 하지 않았던가? 내가 당신 어머니를 살려주는 대신, 당신은 권채하 곁을 떠나기로.”

백사라의 눈빛이 흉흉하게 번들거렸다.

5년 전, 바로 그 제안을 꺼내던 순간처럼 비틀린 욕망이 눈동자 속에 넘실댔다.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설원은 물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살려줬나요? 우리 어머니는 내가 떠나자마자 곧바로 돌아가셨어요. 당신이 날 속였다는 증거죠. 게다가 나를 협박해서 장례식에도 오지 못하게 했고.”

“이런, 민설원 씨. 오해가 많이 쌓인 모양이네. 나는 약속대로 최고의 집도의를 데려다가 수술을 해 줄 생각이었어. 당신 어머니 몸뚱이가 못 견딘 걸 어쩌라고?”

“……당신.”

“내가 신도 아니고, 죽어가는 사람 목숨을 어떻게 멋대로 늘려? 안 그래? 똑똑한 민설원 씨라면 그 사실을 잘 알잖아?”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백사라가 설원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연하게도 그 눈빛 속에는 미안함이라든가, 죄책감 같은 감정이라고는 추호도 없었다.

하긴 그녀에게는 설원 어머니의 병도 그저 거래를 위한 장기 말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옛날과 똑같은, 번들대는 눈빛을 마주하니 설원은 새삼 숨이 턱 막혔다.


“……처음부터 수술을 시켜줄 생각 따윈 없었겠죠. 그저 나를 쫓아내기 위한 수였을 뿐.”

“마음대로 생각해. 민설원 씨.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설원은 대답 대신 그녀를 빤히 노려보았다.

약속대로 채하를 떠났지만, 위중한 상태였던 어머니는 설원의 사고 바로 다음 날 사망했다.

그 사실을 알고 황급히 다시 돌아오려던 제 발을 묶어버린 것도 바로 백사라, 눈앞의 이 여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모든 것은 이미 지나버린 과거였다.

아무리 비통하고 억울해해도 돌아가신 어머니는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설원은 새로이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숨죽이고 살지 않겠다고, 예전처럼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겠다고.


“이런 식으로 약속을 어기면 끝이 좋지 않을 텐데.”

어느새 나온 커피를 홀짝이며 백사라가 눈을 반쯤 치켜떴다.

설원도 덤덤하게 맹물을 들이켜곤 그녀가 가장 원치 않을 대답을 내뱉었다.


“안됐지만, 이제 나는 권채하 씨를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순간 치켜뜬 백사라의 눈알이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예상 밖의 답이 돌아온 것에 대한 분노로 핏발이 곤두선 채로.

그녀의 화려한 손톱 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며, 설원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사랑……?”

“그래요. 그리고 권채하 씨도 나를 사랑하고요.”

“하!”

백사라의 얼굴이 마치 도깨비 탈을 쓴 것처럼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반면 설원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약속이라고 했나요, 백사라 씨? 그래요. 그때는 내가 기댈 곳도 없었고, 채하 씨와 계약도 끝난 마당이라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다르다고?”

“네. 지금은 옆에 채하 씨가 있으니까요.”

무서운 침묵이 테이블 위를 휩쓸었다.

당장이라도 백사라가 긴 손톱 끝을 세워 저를 할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설원은 정말로 두렵지 않았다.

옛날이라면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절대 토로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채하에게 응석이라도 부리라면 부릴 수 있었다.

남편이라는 존재가 이토록 든든할 수 있음에, 설원은 더욱 용기를 냈다.


“그리고 백사라 씨. 잊은 모양인데, 그땐 입도 뗄 수 없었던 일들. 내가 채하 씨에게 다 말해버리면 당신도 곤란하지 않겠어요?”

“글쎄, 증거 있어? 우리가 계약서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약속한 거잖아. 민설원 씨. 약속 몰라?”

“물론 당장 들이밀 수 있는 증거 같은 건 없어요.”

그것 봐, 하는 표정으로 백사라가 입꼬리를 쭈욱 끌어올렸다.

아쉽게도 그녀의 말대로 증거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생사를 오가는 위독한 상태에서, 설원에겐 이성을 챙길 여지 따윈 없었으니까.

그때는 그녀 자신조차 살아남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급박했던 것은 백사라로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분명 어딘가 파고들 빈틈이 있을 터였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찾아보려 해요. 백사라 씨.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까지 전부.”

설원의 도발에 결국 백사라는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

뱀 같은 그녀의 혀가 음산하고도 노골적인 협박을 내뱉었다.


“그 꼴을 당했는데도 돌아오다니, 용기가 가상하네.”

“…….”

“그때 분명히 경고했었지. 민설원. 내가 가만둘 것 같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인간 이하의 협박이었다.

그래서 설원은 인간 이하로 그녀를 취급하기로 결심했다.


“만일 또 우리를 건드린다면, 그쪽도 무언가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할 거예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로 불러내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백사라 씨 얼굴 보는 거 거북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설원의 등 뒤로, 날 선 시선이 비수처럼 꽂혔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강해져야만 했다.


 

*



“우주야!”

“엄마!”

설원을 발견한 우주의 눈이 환하게 커지더니, 곧장 그녀의 품을 향해 달려왔다.

강아지처럼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이 닿는 걸 느끼며 설원은 아이를 힘껏 껴안았다.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채하와 자신의 보물.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엄마! 우주 데리러 온 거예요?”

“응. 아침에 우리 우주랑 인사를 못 해서 아쉬웠거든.”

“대왕 아빠가 우주 잘 데려다줬어요! 엄마는 코 자고 있다고 했어요.”

“그랬어?”

싱긋 웃음을 지으며 설원은 아이와 눈을 맞췄다.

그러다가 뒤쪽에 재윤이 저를 묵묵히 지켜보며 서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고개를 들었다.


“재윤 씨.”

“안녕. 설원아. 우주 데리러 온 거야?”

“네. 일은…… 할 만해요?”

“응. 나 배만 잘 타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운전 실력이 좋았나 봐. 하하.”

“…….”

멋쩍게 머리를 긁는 재윤에게서 어색함에 더해 무언가 미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이윽고 그것을 재윤이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어왔다.


“영상 봤어. 그 한량 자식, 어이없는 꼬임에 넘어가 가지고……. 권채하 씨도 우리 집안 사이의 일을 다 알아버렸겠지?”

“……네.”

“미안해. 설원이 너는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재윤 씨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 그리고 내가 직접 채하 씨한테 말한 거예요.”

“어?”

뜻밖이라는 듯 재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원이 우주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그에게 다시금 말해주었다.


“이제 그 사람한테는 다 말해도 괜찮을 거 같아서요.”

“아. 아아…… 하긴 그렇지. 뭐…….”

“어? 토끼반 선생님 나왔어요! 재윤 아빠 버스 붕붕 운전해요?”

“응. 우주야. 이제 친구들 집에 데려다줄 거야.”

미소를 지으며 재윤이 우주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난 이만 일 하러 가봐야겠다! 조심히 들어가고. 우주, 또 만나자.”

“네! 재윤 아빠~.”

“설원이도 잘 가.”

“네. 재윤 씨.”

버스를 향해 뛰어가는 재윤의 뒷모습을 설원은 잠시 바라보았다.

당장은 미안해도 그를 위해서는 이게 옳은 길이리라.

곧 버스 앞에 도착한 그에게 토끼반 선생님이 음료 하나를 건네는 게 보였다.

어딘가 모르게 조금 안심이 되어 설원은 우주의 손을 꼭 붙잡았다.

*



“그렇습니까?”

보고를 받는 채하의 두 눈이 드물게 가늘어졌다.

방금 정 실장을 통해 들어온 소식이었다.

백사라가 설원과 접촉했다는 다소 뜻밖의 소식.


[네. 가까이 갈 수 없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까지는 못 들었지만요.]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이니까요. 속단하긴 이르지만, 아마도 백사라 측에서 불러낸 것일 테죠.”

[아무래도 그런 눈치였습니다. 백사라 양 표정이 보통 험악한 게 아니었어요.]

“이걸로, 둘 사이에 모종의 무언가가 있었다는 건 확정이군요.”

쓰읍, 채하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냥감이 드디어 덫을 밟은 것이었다.

언제고 백사라가 이성을 잃는 순간을 기다렸다.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설원을 만나러 왔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종의 무언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이제부터 그것을 낱낱이 파헤쳐 줄 작정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작은 사모님은 우주를 데리러 가셨습니다. 아마 곧 댁에 도착하지 않으실까 싶은데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 실장님. 백사라한테서 눈을 떼지 마세요.”

[떼라고 해도 안 뗄 겁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요.]

수화기 너머 정 실장의 비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안에 담긴 그의 각오에, 채하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를 지은 인간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채운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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