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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깊은 사이 (57/111)


57. 깊은 사이
2023.02.15.



 


“우주는?”

“일찍 잠들었어요. 대왕 아빠 기다리겠다고 우기더니 목욕시키니까 금세 노곤해졌나 봐요.”

“흐음.”

채하의 슈트를 받아들며 설원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동작에 숨은 머뭇거림을 채하는 재빠르게 읽어냈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웬일로 옷도 이렇게 먼저 받아주는 걸 보면 말이야.”

“그게…….”

설원은 부정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들었어요. 정 실장님한테. 지난번에 어머님께서 소문이니 뭐니 하셔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언제 그런 일이…….”

“말하지 말랬더니 그새 당신 귀에 들어가 버렸군.”

“정 실장님한테 뭐라 하지 말아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어요. 잠깐 사이에 오늘 그 영상 조회 수가…….”

“사람들은 쓸데없이 남의 가십을 좋아하지. 하지만 난 민설원, 오직 당신만 믿어. 당신의 눈빛이 하는 말, 당신의 입술이 하는 말만.”

“…….”

심각한 대화 와중에도 설레는 바람에, 설원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자 채하가 자연스레 그녀의 손에서 슈트를 가져가선 옷걸이에 걸었다.


“꼬마도 잠들었고, 우리 간만에 둘이 한잔할까?”

“……좋아요.”

간만이라고 표현하기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설원은 딱히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와인 한 병과 함께 다이닝룸에 마주 앉았다.

거실 통창 너머로 짙은 남색 밤하늘과 주황빛 노을이 묘한 그러데이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화이트 와인을 한 잔씩 나눠 따른 뒤, 채하가 진지한 음성으로 운을 뗐다.


“당신한테는 힘든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부탁이 있어. 내가 반드시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기도 하고.”

“뭔데요? 전 괜찮으니까 뭐든 얘기해요.”

설원이 특유의 단단하고도 곧은 눈빛으로 채하를 응시했다.

사실 지금이라면, 그에게 무엇이든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슴 속에 내내 꼭꼭 숨기고 있던 진실까지도.

한데 채하는 의외의 것을 물어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아버지요?”

“그래. 민설원. 긍지 높은 소방관이셨다던 당신의 아버지 말이야.”

단순한 흥밋거리로 여겨 묻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채하도 그것을 증명하듯 얼른 말을 덧붙였다.


“실은 전부터 궁금했었어. 최재윤. 그리고 그 남자의 가족. 당신을 5년이나 섬에서 돌봐줬던 사람들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했으니까.”

“아…….”

“아무리 섬의 인심이 좋다고 해도, 보통은 생판 남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기란 어렵지. 자기 가족도 내치는 세상인데. 그래서 뭔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오늘 영상에 나온 남자가 묘한 말을 하더군. 목숨을 구해준 인연이라고.”

“…….”

그런 말을 했었던가.

영상 속 남자는 섬에서 유명한 한량이었지만, 워낙 좁은 곳이라 그들 사이의 인연을 안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기를 봐서 채하에게도 털어놓으려 했던 이야기였다.

투명하게 빛나는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켠 뒤 설원이 입을 열었다.


“맞아요. 아버지께서 순직하셨을 때 마지막으로 구한 분들이 재윤 씨의 부모님이에요.”

입안에 퍼지는 와인이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을 냈다.

동시에 잊지 못할 아픈 기억이 잔 위로 떠 오른 거품처럼 가슴에도 둥둥 떠올랐다.

어린 시절, 설원의 가족은 넓은 들판이 수평선처럼 펼쳐져 있는 시골에 살았었다.

시내에 나가려면 두 시간에 한 번씩 오는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설원은 자기 고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듬직하게 서 있는 정겨운 들판은, 꼭 동화책의 표지 같았다.

아빠가 만들어준 그네에 나란히 앉아, 꽃처럼 고운 엄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린 설원의 즐거움이었다.

특히나 아빠가 들판 한가운데서 소박한 들꽃을 들고 엄마에게 청혼했다는 대목을 들을 때면,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곤 했다.

소방관이던 아빠는 시내에 있는 소방서에서 착실히 근무하며 가족을 보살폈다.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부족함이라고는 없는 훌륭한 가장이었다.

그림 같은 그들의 행복을 하늘이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설원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 비극은 일어났다.

지금도 그날의 풍경이 설원의 뇌리에 선하게 남아 있었다.

아직 혼자 버스를 타기엔 무리였기에, 엄마는 늘 하교 시간에 맞춰 그녀를 데리러 오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았다.

운동장 계단에 앉아 책가방을 끌어안은 채 설원은 멀찍이 교문만 바라보았다.

교문 너머 푸르던 하늘에 꼭 불타는 것처럼 선명한 붉은 노을이 번져갈 때까지.


“……그날, 아버지는 근교에 있는 박물관에서 난 화재로 순직하셨어요. 당시 재윤 씨네 부모님은 모처럼 섬에서 나와 관광 중이셨고요. 화염에 휩싸이기 직전 재윤 씨 아버님은 겨우 탈출했지만, 하필 어머님께서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가셨던 거죠.”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재윤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설원의 아버지는 기꺼이 화염 속에 몸을 던졌다.

다행히 화장실 입구에 쓰러져 있던 그녀를 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그는 건물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장소가 박물관이다 보니 무게 있는 전시품들이 너무 많았어요. 천장과 연결되어 있던 배 모형이 불에 타 떨어지는 바람에…….”

“이제 됐어. 그만 얘기해.”

설원의 손등에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이젠 눈물을 흘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덤덤해졌는데도, 그날 불타는 듯했던 하늘만큼은 가슴에 새겨져 잊히질 않았다.

아버지가 순직한 뒤 얼마 후에 재윤의 부모님이 집을 찾아왔다.

두 사람이 눈물로 어머니에게 용서를 비는 것을 어린 설원은 문 뒤에 숨어서 듣고 보았다.

그들은 아버지께 목숨을 빚졌다며, 평생 이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그래서 당신을 보살펴 준 거군. 아무런 대가 없이.”

“……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도 정말 딸 이상으로 잘해주셨어요.”

“고마운 분들이군. 세상엔 은혜를 아는 사람도 드문 법이니까.”

이번에는 채하가 와인을 쭉 들이켰다.

문득 그의 깊어진 눈빛이 언젠가의 겨울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몸을 겹쳤던, 그 눈 내리던 겨울밤과.


“사실 나도 당신한테 털어놓고 싶은 게 있었어. 우리 형 일이야.”

“아…….”

뜻밖의 말에 설원의 두 눈이 커졌다.

그의 형이라면 채운의 장남, 권태하를 이르는 것이었다.

절대로 채하가 입 밖에 내지 않는 화제이기도 했기에, 무척이나 의외였다.

사실 그녀로서도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일이기는 했다.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며 제 품에서 무너졌던 그 밤이, 형의 기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더더욱.

나직이 잠긴 목소리에 괴로운 이야기가 되리란 걸 예감했지만, 설원은 귀를 바짝 기울였다.

채하에게 형의 죽음이 아픈 손가락이라는 사실은 옆에서 내내 느껴왔던 바였다.

저 또한 그의 아픔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들여다보고, 어루만질 수 있길 원했다.

곧 채하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알다시피 형은 당신을 만나기 반년 전쯤 사고로 죽었어. 자동차 사고였지. 형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어.”

이어진 이야기는 그야말로 비통하기 짝이 없었다.

채운 그룹의 장남 권태하는 어릴 때부터 성정이 온순했고, 부모의 말이라면 늘 순순히 따랐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우직한 성품은 여전했다.

타고난 사업 센스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언제나 남들보다 두 배 이상 노력해 자기 힘으로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다.

채하와는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에다 나이 차도 크지 않았으나, 둘은 나름 좋은 형제였다.

정이 없는 채하를 언제나 살뜰히 형 노릇을 하며 돌봐준 것이 바로 태하였다.

살면서 큰 문제 한 번 일으키지 않고 든든히 장남 노릇을 했던 그가, 처음으로 부모에게 반기를 든 것은 다름 아닌 여자 때문이었다.

백사라를 점찍었듯이 태하의 짝도 재벌가에서 미리 찍어두었던 허영주는 당연한 듯 태하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수락하리라 믿으면서.

한데 태하는 처음으로 완강한 태도로 어머니의 뜻을 거절했다.

달리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이유였다.

그 선언에 허영주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녀가 누구던가.

아들이 아무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절대로 두고 볼 위인이 아니었다.

제 뜻과는 상관없이 두 집안의 혼사 날짜가 잡히자 태하는 매일 밤을 술로 지샜다.

결국 약혼식을 앞둔 하루 전날, 차라리 함께 도망칠 작정으로 그는 연인을 찾아갔다.

채운의 후계자 자리도 버릴 각오를 하고서.

그리고 빗길 교통사고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더욱 허무한 사실은 이후에 밝혀졌다.

형이 사랑했던 여자는 장례식에 오지도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그 여자는 허영주에게 두둑이 수표를 받고, 태하와 헤어질 예정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형이 죽은 뒤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다른 졸부 남자와 결혼했다.

마치 처음부터 태하의 존재 따윈 없었다는 듯이.

원래도 여자에 대한 기대감이라곤 존재하지 않던 채하였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 그의 가슴 속에선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한 환멸이 피어났다.

그까짓 허황된 감정에 속아 넘어가 세상을 등진 형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권채하의 심장은 더욱 얼어붙어 버렸다.


“……힘든 얘길 해줘서 고마워요.”

설원이 한참을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자, 채하가 빙긋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방금까지 괴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던 남자의 표정 치곤 무척이나 살갑고 다정한 얼굴이었다.

그가 그녀의 빈 잔은 무시하고, 자신의 빈 잔에만 와인을 따랐다.


“당신은 더 힘든 이야길 해줬잖아. 민설원.”

“…….”

힘든 마음에 혼자서 술을 들이켜려는 건가 싶어, 설원의 눈동자가 또르르 그의 손끝을 따라갔다.

그때처럼 괴로워 취해 버린다면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을 둘러싼 일들 때문에 또 그가 곤란해진다면…….


“민설원.”

상념을 끊어내는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와, 설원이 화들짝 시선을 올렸다.

어느새 그의 붉은 입술이 그녀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아슬아슬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채하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이제 혼자 힘들어하지 마. 나는 무엇이든 당신하고 전부 나누기로 결심했으니까.”

“……채하 씨.”

“이 세상 누구보다 당신과 나, 우리 두 사람은 깊은 사이잖아.”

깊은 사이……. 그 단어가 못내 뜨거운 숨결에 섞여 뺨을 달궜다.

설원의 눈망울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이, 채하의 눈동자 속에도 여실히 담겼다.

언제나 그녀를 설레게 하는 깊고도 깊은 눈빛이었다.

그가 들릴 듯 말듯 나직한 숨을 한번 뱉더니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설원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달콤한 와인의 향이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그 아찔한 감각에 설원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가 자신의 잔에만 와인을 채운 이유를 이런 식으로 깨닫게 되다니.

어느덧 창밖의 그러데이션은 한 가지 색이 되어 별이 반짝이는 짙은 밤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무릎을 맞붙이고 앉은 채 두 사람은 연이어 입맞춤을 나누었다.

쉴 새 없이 오가는 깊은 숨결만큼이나 서로의 마음 또한 한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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