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선인장
(56/111)
56. 선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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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선인장
2023.02.12.
넥타이를 정돈해주는 설원의 다정한 손길로, 채하는 금요일이라는 아쉬움을 애써 달랬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귓가에 오늘 밤부턴 주말이란 사실을 은밀하게 주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설원의 여린 귓불이 기어코 붉게 달아오를 때까지.
여름 해가 긴 덕분에, 그가 퇴근하고 왔을 때 정원은 아직도 대낮처럼 밝았다.
우주는 놀 시간이 늘어난 게 마냥 좋은지 무더위에도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런 우주를 위해 저녁을 먹은 뒤 세 사람은 모처럼 함께 정원 탐색에 나섰다.
설원이 돌아온 이후론 늘 그녀가 관리했기 때문에, 처음의 시골 들판 같은 자유분방함은 사라지고 이젠 제법 깔끔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지난번 들여온 살구나무 묘목도 순조롭게 크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 보자. 살구나무 키가 이제 우주보다 더 자랐는데?”
“으응? 우주보다 커졌어요?”
“그래. 우리 꼬마 분발해야겠어.”
채하가 살구나무 옆에 우주를 세워두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가 봐도 꼭 닮은 부자의 모습에, 설원 또한 미소를 머금고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알쏭달쏭한 얼굴로 살구나무와 제 키를 비교하던 우주가 문득 어딘가를 가리켰다.
“대왕 아빠! 엄마! 저거, 저거요!”
“응?”
우주의 고사리손이 가리킨 곳으로 설원과 채하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지난번 채하가 우주에게 선사했던 대왕 화분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비어 있음에도 대단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크기였다.
곧 쪼르르 우주가 대왕 화분 곁으로 달려가자, 채하가 입꼬리를 쭉 끌어올렸다.
“우리 꼬마. 그러고 보니 동생을 심어달라고 했었지.”
“응! 우주 동생 심고 싶어요!”
“흐음. 그 소원이 어쩌면 조만간 이뤄질지도 모르겠는데.”
채하의 능청스러운 대사에 우주가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진짜예요? 우주 동생 생겨요?”
“궈, 권채하 씨!”
당황한 설원이 어떻게든 이 불순한 대화를 끊어보려고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채하가 냉큼 그녀의 손을 잡아 우주 앞으로 보란 듯 떠밀었다.
그러고는 아주 당당히 선언했다.
“그래. 엄마랑 대왕 아빠가 우리 꼬마를 위해 노력하고 있어.”
“와! 우주 엄청 엄청 신나요!”
“우주야…….”
너무도 해맑게 기뻐하는 우주의 표정에, 설원은 차마 부정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동생을 화분에 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저번에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우주는 당장 동생을 심자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 대왕 화분을 가리킨 진짜 이유를 작은 입술로 쫑알거렸다.
“살구나무도 옆에 친구 꽃이 있는데, 대왕 화분 혼자 비어 있는 게 너무 쓸쓸해요! 여기다 엄마랑 대왕 아빠랑 우주 꽃을 같이 심으면 안 돼요?”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군.”
기특하다는 듯 채하가 우주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순수하고 따뜻한 아이의 마음에 감동한 것은 설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설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곤 삽을 가져다 채하의 손에 고이 쥐여주었다.
“얼른 흙 파줘요.”
“좋아. 힘 좀 써볼까.”
채하가 본격적으로 화분에 흙을 채우기 시작하자, 설원은 우주를 데리고 씨앗이 들어 있는 창고로 갔다.
하나 곧바로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8월 중순의 한여름에 파종할 만한 꽃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어쩌지. 우주야. 지금 당장 심을 예쁜 꽃이 없네.”
자그마한 창고를 요리조리 둘러보던 우주가, 설원의 근심 어린 말에 손을 쑥 내밀었다.
언제 골랐는지 어느새 우주의 손에는 씨앗 봉투가 들려 있었다.
“우주 예쁜 꽃 아니어도 돼요~ 이거 심을래요!”
“아…….”
뜻밖에도 우주가 고른 것은 선인장 씨앗이었다.
확실히 지금 심기에 적절한 것이었지만, 알록달록 보기 좋은 꽃들을 놔두고 가시 돋친 선인장을 택한 게 신기해 설원이 물었다.
“왜 이걸 골랐어. 우주야?”
“으응~ 여기.”
작은 손끝이 네모난 씨앗 봉투에 적힌 문구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파종 방법과 함께 선인장의 간단한 특징이 적혀 있었다.
<백 년을 사는 선인장! 관리만 잘해주면 일 년 내내 푸르고 싱싱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햇살처럼 밝은 얼굴로 우주가 그것을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백 년을 살 수 있대요~ 우주도 엄마랑 대왕 아빠랑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요!”
“…….”
말문이 턱 막힌 설원의 어깨 위로, 문득 듬직하고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언제 왔는지 채하가 흐뭇함이 그득한 얼굴로 우주를 보고 있었다.
“우리 꼬마. 안목이 뛰어나군. 당연히 그 소원도 이뤄질 거야.”
“정말요?”
“그래. 영특하기도 하지. 상징적 의미를 벌써 활용할 줄도 알고.”
“……으응? 상…… 그게 뭐예요?”
“우리 꼬마가 최고라는 뜻이야. 자, 그럼 대왕 화분에 본격적으로 선인장을 심어볼까? 엄마랑 대왕 아빠랑 우주 이름을 사이좋게 하나씩 붙여서, 가족 화분으로.”
가족 화분……. 그 말에 설원의 가슴엔 살포시 꽃잎이 내려앉는 듯했다.
한껏 신이 난 우주가 선인장 씨앗을 품 안에 소중히 안고는, 냉큼 창고에서 나와 채하의 손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응! 엄청 엄청 멋진 가족 화분 만들어요!”
*
“어떻게 됐어? 진행은?”
“네. 지금 막 현장에서 연락 왔습니다. 십 분 뒤에 생중계 시작한답니다.”
“차질 없이 똑바로 준비했겠지? 쓸 만한 인간인 건 확실해?”
“물론입니다. 변변찮게 부모 등골이나 빼먹으면서 산 놈인데, 40대가 되도록 제대로 된 직업도 없답니다. 그나마 배나 그물 같은 걸 수리하면서 먹고 사는데, 몇 년 전에 손을 다쳐서 일도 제대로 못 하는 바람에 형편이…….”
“아, 됐어. 그런 버러지 같은 인간 연대기 따윌 뭐 자랑이라고 줄줄이 읊고 있어?”
“죄송합니다…….”
번번이 눈칫밥만 가득 먹는 남자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에게 백사라는 귀찮은 듯 이만 나가보란 손짓을 했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느긋하게 즐길 작정이었다.
민설원. 그 눈엣가시 같은 여자의 몰락하는 모습을.
남자가 도망치듯 잽싸게 나가버리자 백사라는 편한 소파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잘 보이는 위치에 핸드폰 화면을 켜서 올려놓았다.
제가 준비한 선물이 곧 그 화면 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섬 풍경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어색하게 서서 거슬한 콧수염을 만져대고 있었다.
눈이 모자이크되어 있음에도 어딘가 불안한 모습이란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냥 사실대로만 말하면 된단 거쥬.”
“예. 저희한테 제보하신 내용을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듣자 하니 바로 이 섬에, 채운 그룹의 작은 사모인 민설원 씨가 살았다면서요?”
“……맞습니다.”
화면 하단의 빨간 녹화 버튼이 반짝일 때마다, 백사라의 눈동자도 형형하게 빛났다.
이윽고 저 거친 남자의 입에서 폭로될 말이 기대되어 흥분이 미칠 듯 고조되고 있었다.
잠시 뒤면 민설원은 더럽고 더러운 여자로 세상에 낙인찍힐 것이다.
게다가 그런 제보가 나온 이상, 아무리 권채하라도 아내를 의심 어린 눈으로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터였다.
“후후…….”
손톱 끝의 커다란 큐빅 파츠가 오늘따라 눈부셨다.
그야말로 백사라, 그녀가 눈부신 승리를 거머쥐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민설원 씨가 섬으로 도주해 외간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사실인 거죠? 그렇죠?”
“아, 그게 말이쥬…….”
화면 너머의 남자를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백사라가 매섭게 쏘아 보았다.
언감생심 평생 만져볼 수도 없을 돈을 건네주었건만 뭘 꾸물거리는지 슬슬 짜증이 나려 했다.
뜸 들일 것 없이 그냥 시킨 대로 줄줄 읊으면 될 일이거늘.
그때였다.
드디어 콧수염을 만지던 손을 아래로 떨구더니,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 섬에 그 사모님이 살았던 건 사실입니다. 5년 전엔가 왔쥬. 아마.”
“예. 그래서, 남자와 살았습니까? 몰래?”
“……남자가 아니라 아이랑 살았습니다. 자기 아들하고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 다른……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오해가 있으셨나 본데, 아무하고도 살림 같은 건 차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없다는 건 우리 섬사람들이 전부 알고 있구만유.”
“……뭐야?”
백사라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면 속에선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곧 남자가 화면 앞으로 더욱 바짝 얼굴을 내밀었다.
“거, 누가 자꾸 악의적으로 헛소문을 퍼트리는 모양인데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구만유!”
“아니, 집에도 들락날락하고……. 아빠라고 부르고 그랬다면서요?”
“우리 섬은 작아서 네 집, 내 집 안 하고 무슨 일 있으면 편하게 오가는구만유. 그리고 섬에 사는 애기들한텐 우리가 다 아빠쥬!”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아, 저기! 좀 뒤로 나오세요!”
너튜버가 당황하며 남자를 만류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화면에 대고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돈이 중해도 우리 섬사람들을 욕보이는 건 용서 못 합니다! 민설원 씨랑 최 씨네하고는 그런 불미스러운 사이가 아니라, 목숨을 구해준 귀한 인연으로…….”
“오늘 방송은 여기서 조, 종료합니다!”
팟, 하고 화면이 꺼졌다.
동시에 백사라의 머릿속도 새하얘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손톱의 큐빅부터 깨물어 씹어 뱉어버렸다.
그러고는 회사라는 것도 잊고 고함을 질러댔다.
“어딨어? 당장 들어와! 빨리 이거 해명해! 해명하라고!”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
“어떻게 됐습니까?”
“지시하신 대로 진행했습니다. 약속한 대로 잘해주었고요.”
정 실장이 방금 녹화한 너튜버의 영상을 재생해 채하에게 건넸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채하는 연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영상은 마구 흔들리는 화면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렸다.
채하가 태블릿을 다시 정 실장에게 건네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목숨을 구해준 인연이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에 정 실장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와 귀를 기울이려 했다.
그러나 채하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돈은 제대로 건넸습니까? 확실히 입단속 했겠죠?”
“예. 물론입니다. 받았다는 것보다 두 배를 내밀었더니 냉큼 받아먹더군요. 받을 거 다 챙겨놓고 저렇게 착한 척하는 게 꼴사납긴 합니다만.”
“기본적인 양심을 누구에게나 바랄 순 없죠. 저런 인간은 돈으로 다루는 게 가장 확실한 법이니까.”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백사라 양이 쓴 수겠지만, 이번에도 돈을 건넨 루트에 전혀 접점이 없습니다. 백재영 쪽의 도움을 받는 것도 확실한데, 그쪽도 어지간히 음지를 이용하는 모양이에요.”
분하다는 듯 정 실장이 태블릿을 손에 꽉 쥐었다.
그것을 보며 채하는 낮고도 스산하게 속삭였다.
“하나씩 하나씩 저지당해 실패가 이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반드시 이성을 잃을 때가 올 겁니다. 그때가 바로 꼬리를 드러낼 때고요. 우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그랬다. 백사라의 목덜미를 낚아챌 그 순간.
아마도 설원을 저 섬으로 밀어 넣은 게 틀림없을 그 여자를, 채하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마음껏 발악하게 지켜보죠.”
56. 선인장
2023.02.12.
넥타이를 정돈해주는 설원의 다정한 손길로, 채하는 금요일이라는 아쉬움을 애써 달랬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귓가에 오늘 밤부턴 주말이란 사실을 은밀하게 주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설원의 여린 귓불이 기어코 붉게 달아오를 때까지.
여름 해가 긴 덕분에, 그가 퇴근하고 왔을 때 정원은 아직도 대낮처럼 밝았다.
우주는 놀 시간이 늘어난 게 마냥 좋은지 무더위에도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런 우주를 위해 저녁을 먹은 뒤 세 사람은 모처럼 함께 정원 탐색에 나섰다.
설원이 돌아온 이후론 늘 그녀가 관리했기 때문에, 처음의 시골 들판 같은 자유분방함은 사라지고 이젠 제법 깔끔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지난번 들여온 살구나무 묘목도 순조롭게 크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 보자. 살구나무 키가 이제 우주보다 더 자랐는데?”
“으응? 우주보다 커졌어요?”
“그래. 우리 꼬마 분발해야겠어.”
채하가 살구나무 옆에 우주를 세워두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가 봐도 꼭 닮은 부자의 모습에, 설원 또한 미소를 머금고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알쏭달쏭한 얼굴로 살구나무와 제 키를 비교하던 우주가 문득 어딘가를 가리켰다.
“대왕 아빠! 엄마! 저거, 저거요!”
“응?”
우주의 고사리손이 가리킨 곳으로 설원과 채하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지난번 채하가 우주에게 선사했던 대왕 화분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비어 있음에도 대단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크기였다.
곧 쪼르르 우주가 대왕 화분 곁으로 달려가자, 채하가 입꼬리를 쭉 끌어올렸다.
“우리 꼬마. 그러고 보니 동생을 심어달라고 했었지.”
“응! 우주 동생 심고 싶어요!”
“흐음. 그 소원이 어쩌면 조만간 이뤄질지도 모르겠는데.”
채하의 능청스러운 대사에 우주가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진짜예요? 우주 동생 생겨요?”
“궈, 권채하 씨!”
당황한 설원이 어떻게든 이 불순한 대화를 끊어보려고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채하가 냉큼 그녀의 손을 잡아 우주 앞으로 보란 듯 떠밀었다.
그러고는 아주 당당히 선언했다.
“그래. 엄마랑 대왕 아빠가 우리 꼬마를 위해 노력하고 있어.”
“와! 우주 엄청 엄청 신나요!”
“우주야…….”
너무도 해맑게 기뻐하는 우주의 표정에, 설원은 차마 부정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동생을 화분에 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저번에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우주는 당장 동생을 심자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 대왕 화분을 가리킨 진짜 이유를 작은 입술로 쫑알거렸다.
“살구나무도 옆에 친구 꽃이 있는데, 대왕 화분 혼자 비어 있는 게 너무 쓸쓸해요! 여기다 엄마랑 대왕 아빠랑 우주 꽃을 같이 심으면 안 돼요?”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군.”
기특하다는 듯 채하가 우주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순수하고 따뜻한 아이의 마음에 감동한 것은 설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설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곤 삽을 가져다 채하의 손에 고이 쥐여주었다.
“얼른 흙 파줘요.”
“좋아. 힘 좀 써볼까.”
채하가 본격적으로 화분에 흙을 채우기 시작하자, 설원은 우주를 데리고 씨앗이 들어 있는 창고로 갔다.
하나 곧바로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8월 중순의 한여름에 파종할 만한 꽃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어쩌지. 우주야. 지금 당장 심을 예쁜 꽃이 없네.”
자그마한 창고를 요리조리 둘러보던 우주가, 설원의 근심 어린 말에 손을 쑥 내밀었다.
언제 골랐는지 어느새 우주의 손에는 씨앗 봉투가 들려 있었다.
“우주 예쁜 꽃 아니어도 돼요~ 이거 심을래요!”
“아…….”
뜻밖에도 우주가 고른 것은 선인장 씨앗이었다.
확실히 지금 심기에 적절한 것이었지만, 알록달록 보기 좋은 꽃들을 놔두고 가시 돋친 선인장을 택한 게 신기해 설원이 물었다.
“왜 이걸 골랐어. 우주야?”
“으응~ 여기.”
작은 손끝이 네모난 씨앗 봉투에 적힌 문구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파종 방법과 함께 선인장의 간단한 특징이 적혀 있었다.
<백 년을 사는 선인장! 관리만 잘해주면 일 년 내내 푸르고 싱싱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햇살처럼 밝은 얼굴로 우주가 그것을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백 년을 살 수 있대요~ 우주도 엄마랑 대왕 아빠랑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요!”
“…….”
말문이 턱 막힌 설원의 어깨 위로, 문득 듬직하고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언제 왔는지 채하가 흐뭇함이 그득한 얼굴로 우주를 보고 있었다.
“우리 꼬마. 안목이 뛰어나군. 당연히 그 소원도 이뤄질 거야.”
“정말요?”
“그래. 영특하기도 하지. 상징적 의미를 벌써 활용할 줄도 알고.”
“……으응? 상…… 그게 뭐예요?”
“우리 꼬마가 최고라는 뜻이야. 자, 그럼 대왕 화분에 본격적으로 선인장을 심어볼까? 엄마랑 대왕 아빠랑 우주 이름을 사이좋게 하나씩 붙여서, 가족 화분으로.”
가족 화분……. 그 말에 설원의 가슴엔 살포시 꽃잎이 내려앉는 듯했다.
한껏 신이 난 우주가 선인장 씨앗을 품 안에 소중히 안고는, 냉큼 창고에서 나와 채하의 손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응! 엄청 엄청 멋진 가족 화분 만들어요!”
*
“어떻게 됐어? 진행은?”
“네. 지금 막 현장에서 연락 왔습니다. 십 분 뒤에 생중계 시작한답니다.”
“차질 없이 똑바로 준비했겠지? 쓸 만한 인간인 건 확실해?”
“물론입니다. 변변찮게 부모 등골이나 빼먹으면서 산 놈인데, 40대가 되도록 제대로 된 직업도 없답니다. 그나마 배나 그물 같은 걸 수리하면서 먹고 사는데, 몇 년 전에 손을 다쳐서 일도 제대로 못 하는 바람에 형편이…….”
“아, 됐어. 그런 버러지 같은 인간 연대기 따윌 뭐 자랑이라고 줄줄이 읊고 있어?”
“죄송합니다…….”
번번이 눈칫밥만 가득 먹는 남자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에게 백사라는 귀찮은 듯 이만 나가보란 손짓을 했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느긋하게 즐길 작정이었다.
민설원. 그 눈엣가시 같은 여자의 몰락하는 모습을.
남자가 도망치듯 잽싸게 나가버리자 백사라는 편한 소파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잘 보이는 위치에 핸드폰 화면을 켜서 올려놓았다.
제가 준비한 선물이 곧 그 화면 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섬 풍경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어색하게 서서 거슬한 콧수염을 만져대고 있었다.
눈이 모자이크되어 있음에도 어딘가 불안한 모습이란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냥 사실대로만 말하면 된단 거쥬.”
“예. 저희한테 제보하신 내용을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듣자 하니 바로 이 섬에, 채운 그룹의 작은 사모인 민설원 씨가 살았다면서요?”
“……맞습니다.”
화면 하단의 빨간 녹화 버튼이 반짝일 때마다, 백사라의 눈동자도 형형하게 빛났다.
이윽고 저 거친 남자의 입에서 폭로될 말이 기대되어 흥분이 미칠 듯 고조되고 있었다.
잠시 뒤면 민설원은 더럽고 더러운 여자로 세상에 낙인찍힐 것이다.
게다가 그런 제보가 나온 이상, 아무리 권채하라도 아내를 의심 어린 눈으로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터였다.
“후후…….”
손톱 끝의 커다란 큐빅 파츠가 오늘따라 눈부셨다.
그야말로 백사라, 그녀가 눈부신 승리를 거머쥐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민설원 씨가 섬으로 도주해 외간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사실인 거죠? 그렇죠?”
“아, 그게 말이쥬…….”
화면 너머의 남자를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백사라가 매섭게 쏘아 보았다.
언감생심 평생 만져볼 수도 없을 돈을 건네주었건만 뭘 꾸물거리는지 슬슬 짜증이 나려 했다.
뜸 들일 것 없이 그냥 시킨 대로 줄줄 읊으면 될 일이거늘.
그때였다.
드디어 콧수염을 만지던 손을 아래로 떨구더니,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 섬에 그 사모님이 살았던 건 사실입니다. 5년 전엔가 왔쥬. 아마.”
“예. 그래서, 남자와 살았습니까? 몰래?”
“……남자가 아니라 아이랑 살았습니다. 자기 아들하고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 다른……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오해가 있으셨나 본데, 아무하고도 살림 같은 건 차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없다는 건 우리 섬사람들이 전부 알고 있구만유.”
“……뭐야?”
백사라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면 속에선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곧 남자가 화면 앞으로 더욱 바짝 얼굴을 내밀었다.
“거, 누가 자꾸 악의적으로 헛소문을 퍼트리는 모양인데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구만유!”
“아니, 집에도 들락날락하고……. 아빠라고 부르고 그랬다면서요?”
“우리 섬은 작아서 네 집, 내 집 안 하고 무슨 일 있으면 편하게 오가는구만유. 그리고 섬에 사는 애기들한텐 우리가 다 아빠쥬!”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아, 저기! 좀 뒤로 나오세요!”
너튜버가 당황하며 남자를 만류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화면에 대고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돈이 중해도 우리 섬사람들을 욕보이는 건 용서 못 합니다! 민설원 씨랑 최 씨네하고는 그런 불미스러운 사이가 아니라, 목숨을 구해준 귀한 인연으로…….”
“오늘 방송은 여기서 조, 종료합니다!”
팟, 하고 화면이 꺼졌다.
동시에 백사라의 머릿속도 새하얘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손톱의 큐빅부터 깨물어 씹어 뱉어버렸다.
그러고는 회사라는 것도 잊고 고함을 질러댔다.
“어딨어? 당장 들어와! 빨리 이거 해명해! 해명하라고!”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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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됐습니까?”
“지시하신 대로 진행했습니다. 약속한 대로 잘해주었고요.”
정 실장이 방금 녹화한 너튜버의 영상을 재생해 채하에게 건넸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채하는 연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영상은 마구 흔들리는 화면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렸다.
채하가 태블릿을 다시 정 실장에게 건네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목숨을 구해준 인연이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에 정 실장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와 귀를 기울이려 했다.
그러나 채하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돈은 제대로 건넸습니까? 확실히 입단속 했겠죠?”
“예. 물론입니다. 받았다는 것보다 두 배를 내밀었더니 냉큼 받아먹더군요. 받을 거 다 챙겨놓고 저렇게 착한 척하는 게 꼴사납긴 합니다만.”
“기본적인 양심을 누구에게나 바랄 순 없죠. 저런 인간은 돈으로 다루는 게 가장 확실한 법이니까.”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백사라 양이 쓴 수겠지만, 이번에도 돈을 건넨 루트에 전혀 접점이 없습니다. 백재영 쪽의 도움을 받는 것도 확실한데, 그쪽도 어지간히 음지를 이용하는 모양이에요.”
분하다는 듯 정 실장이 태블릿을 손에 꽉 쥐었다.
그것을 보며 채하는 낮고도 스산하게 속삭였다.
“하나씩 하나씩 저지당해 실패가 이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반드시 이성을 잃을 때가 올 겁니다. 그때가 바로 꼬리를 드러낼 때고요. 우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그랬다. 백사라의 목덜미를 낚아챌 그 순간.
아마도 설원을 저 섬으로 밀어 넣은 게 틀림없을 그 여자를, 채하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마음껏 발악하게 지켜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