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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정점 (55/111)


55. 정점
2023.02.08.



 


“채하 씨. 자, 잠깐만요!”

생일 파티를 끝내고, 우주를 이층침대 안에 고이 재우고 들어오자마자 설원의 몸이 벽에 무섭도록 밀쳐졌다.

동시에 가녀린 두 손목이 채하의 한 손에 속절없이 붙들려 머리 위로 올라갔다.

거칠다기보다도, 짙은 욕망이 물씬 풍기는 행동이었다.


“……!”

순식간에 돌변한 채하 때문에 설원의 몸이 긴장으로 바짝 곤두섰다.

그야말로 초원에 홀로 던져진 무방비한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채하 씨. 갑자기 왜…….”

저를 붙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설원이 슬쩍 어깨를 비틀었다.

부질없는 저항에, 야릇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목덜미 아래에서 새어 나왔다.


“당신이 아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네?”

“당신 입으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었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

“아…….”

순간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제가 건넸던 말을 채하의 입으로 다시 들은 것뿐인데, 이토록 민망한 것은 분위기 탓일까.

지금 보니 방 안은 그녀가 좋아하는 은은한 조명등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기다 향수보다 더 좋은 싱그러운 향이, 바짝 밀착되어 있는 채하의 몸에서 풍겼다.

그립고 또 그리웠던 그의 향기였다.

돌아온 뒤로 한 침대를 쓴 지 꽤 되었지만, 왠지 오늘은 뭔가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의 기분도 이상했다. 아주 많이.


“민설원.”

채하가 목덜미에서 잠시 입술을 거두고, 타오르는 시선으로 설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한마디로 형용하기 어려운 이채를 드리우고 있었다.

눈동자 속에 켜켜이 쌓인 감정 또한 한 번에 읽어내기엔 너무도 깊은 것이었다.

낮게 잠긴 목소리로 그가 설원의 눈을 빤히 응시하며 속삭였다.


“사랑해.”

“……채하 씨.”

“아주 오랫동안, 당신에게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미칠 뻔했어.”

“채하…… 읍.”

고개를 비스듬히 내린 채하의 입술이 설원의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가 떼어냈다.

짧지만, 아주 강렬한 접촉이었다.

그러곤 다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환상이나 꿈속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당신에게 말이야.”

“…….”

역시나 대답할 새도 없이, 그가 다시 달콤하게 입술을 머금었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지 않았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을 때마다, 채하는 사랑한다는 말을 설원에게 숨 쉬듯 불어넣었다.

입맞춤 한 번에 사랑한다는 말이 쏟아졌다.

무심하기만 하던 남자가 다정한 사랑을 속삭인다는 게, 이토록 뜨거운 일인 줄은 몰랐다.

결국 뺨부터 귀,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른 설원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채하를 밀어냈다.


“그, 그만 말해요.”

“아니. 수백, 수천 번이라도 할 거야. 민설원, 당신을 사랑한다고. 지난 5년간 내가 가장 하고 싶던 말이니까.”

설원은 이 낯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없던 시간, 권채하는 대체 어떤 날들을 보냈던 걸까.

어떠했기에, 그토록 냉정하던 남자가 숨 쉬듯 간절히 사랑을 토로하고 있는 걸까.


“아…….”

다시 다정한 손길로 뺨을 감싸며, 그가 천천히 입술을 겹쳐왔다.

그러나 입맞춤은 더 이상 다정하지 않았다.

설원의 허리를 휘감아 안은 채하가 그녀를 곧 침대 위로 이끌었다.

등이 푹신한 이불에 닿음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온전히 맞닿은 채하의 몸이 열이라도 나는 것처럼 지나치게 뜨거웠다.

아니, 사실 뜨거운 게 누구의 몸인지 알 수 없었다.

곧장 겹쳐진 몸은 입술만큼이나 격렬히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설원의 살결에 흩뿌리듯 키스를 퍼부을 때마다, 설원은 두 팔로 그저 그를 꼬옥 끌어안았다.

닿아도, 닿아도 부족한 것처럼 채하는 그녀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 갈증이 그의 손끝에서, 입술에서, 몸짓에서 전부 고스란히 느껴졌다.

설원이 부탁한 대로 그는 잠시 사랑한다는 말을 멈추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말이 아닌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야 맞을 터였다.

조금도 빠져나갈 틈이라곤 없이 설원을 온통 가둔 채, 두 사람은 입을 맞추고 몸을 맞댔다.

어딘가 노을빛을 닮은 조명 아래서, 곧 두 사람의 그림자가 온전히 포개졌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느끼는 방법도 아주 다양하다는 것을 설원은 비로소 깨달았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설원은 그의 애정 아래 속절없이 무너졌다.

마음도, 몸도 비로소 하나가 된 밤이었다.

*



“으음…….”

눈꺼풀 위로 따스한 햇살이 포근히 내려앉았다.

기분 좋은 나른함에 설원은 천천히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그러고는 곧바로 숨을 흡 들이마셨다. 눈앞의 기함할 만한 풍경 때문이었다.


“……!”

“일찍 일어났군.”

아주 여유롭게, 채하가 턱을 괴고선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으로 누워있는 탓에 이불이 허리까지 내려와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밝은 햇볕 아래 훤히 드러난 조각 같은 근육에, 설원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궈, 권채하 씨.”

“왜 또 권채하 씨야. 밤새 그렇게 열렬하게 채하 씨라고 불러놓고.”

그의 말에 설원의 귓불이 훅 붉어졌다.

채하의 시선이 곧장 귓불에 와 닿는 걸 느낀 설원은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황급히 이불을 가슴팍 위로 끌어올리는 설원을, 채하가 재미있다는 듯 유유히 지켜보았다.


“뭘 새삼스럽게 가려. 이미 볼 거 다 보고 만질 거 다 만졌는데.”

“다, 당신이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렇죠.”

안타깝게도 설원이 당황할수록 채하는 점점 더 즐거워 보일 뿐이었다.


“어쩌지.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옛날에도 당신이 자고 있을 때 이렇게 자주 쳐다봤었는데.”

“……네?”

설원이 정말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 쪽에서 몰래 채하가 잠든 모습을 훔쳐본 적은 있지만, 그 반대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에.

그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민설원. 당신한테 아주 귀여운 잠버릇이 있더군.”

“잠버릇……이요?”

왠지 불길한 마음에 설원은 더 끌어올릴 곳도 없는 이불을 바짝 끌어 올렸다.

귓불에서 시작한 홍조가 목덜미 아래로 퍼지고 있어, 서둘러 가려야만 했다.

채하가 그녀의 애처로운 손끝을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당신은 항상 침대 끝에 누워서 잠드는데, 도중에 꼭 이불을 이렇게 빼앗으러 온단 말야.”

“내가…….”

“응. 하지만 나도 추워서 이불을 내줄 수가 없었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설원이 채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채하가 씨익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당신을 꼭 껴안고 잤지. 어쩌겠어. 추운 사람끼리 열을 나눌 수밖에.”

말이 끝남과 동시에 채하가 설원의 이불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가 된 그녀를 가득히 끌어안았다.


“채, 채하 씨. 아침, 아침이에요.”

“알아.”

“출근해야죠. 어젯밤에 잠도 거의 못 잤는데…….”

무심코 읊조리던 설원이 제 말뜻을 헤아리곤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말 그대로 어젯밤 채하가 통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두 사람은 새벽빛이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랬지. 아마도 이러느라 말이야.”

채하의 커다란 손이 설원의 살결을 부드럽게 훑어내렸다.

그러자 저절로 몸이 반응하며 움츠러들었다.

이어 그녀의 작고 붉은 귓불을 채하가 잘근 깨물며 속삭임을 흘려보냈다.


“오늘이 금요일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 토요일이었으면 당신은 아예 이 방에서 못 나갔을 거야.”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우주도 있는데.”

“글쎄. 동생을 만들고 있다고 하면 우리 착한 꼬마가 얌전히 혼자 놀지 않을까?”

“……!”

기가 막혀 설원이 몸을 버둥거리자, 채하는 더욱이 바짝 그녀를 옭아맸다.

어느새 아래로 흘러내린 이불은 둘 사이의 얇은 보호막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보기엔 탄탄한 근육이 닿으면 깃털처럼 부드럽다는 것을, 어젯밤 여실히 느낀 설원이었다.

귓불에서 목선을 타고 아슬아슬한 쇄골까지,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왔다.

야릇한 속삭임과 함께.


“그러고 보니 당신 어제 로라랑 제임스한테서 선물을 받아오지 않았던가?”

“아…….”

설원의 몸이 일순 흠칫했다.

사실 두 사람이 평범한 선물을 줬을 거 같지 않아, 어제 몰래 뜯어봤던 그녀였다.

역시나 선물은 예전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뭘 받았는지 궁금한데. 예전에 준 것도 아직 못 썼는데 말이야. 당신이 필사적으로 기억 안 나던 척한 걸 보면 엄청난 선물이겠지? 응?”

기대 어린 속닥거림에 설원의 쑥스러움 수치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받은 슬립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어제 건네받은 봉투 안에 들어있던 것은 대체 어딜 가려야 좋을지 모를 손바닥만 한 레이스 천 쪼가리였다.

강렬한 빨간색은 덤이었고.


“표정을 보니 우리 사랑스러운 아내가 어디다 또 꼭꼭 숨긴 모양이군.”

“그런 게 아니라…….”

“빨리 써보고 싶지만, 당신이 이렇게 수줍어하니 스스로 꺼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안 꺼내요. 그럴 일 없어요.”

“그렇게 정색하면 더 궁금해지잖아. 흐음. 차라리 제임스한테 직접 물어볼까.”

“아, 안 돼요!”

기겁한 설원이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햇살 아래 뽀얗고 흰 속살이 고스란히 채하의 시야에 담겼다.



“…….”

인간 사과가 된 듯 설원의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채하가 하, 하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군. 오늘은 연차도 쓸 수 없는데.”

그가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설원의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살짝 상체를 일으켜 다시 그녀에게로 가까이 거리를 좁혀왔다.


“아내가 이렇게 날 유혹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달싹이던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한없이 욕망에 불타는 눈동자였기에 설원은 이다음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각오했다.

그러나 채하는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녀를 다시 곱게 눕혀주었다.

떨어져 있던 이불이 다시 설원을 덮고, 그다음엔 그의 가슴팍이 그녀를 덮었다.

포옥 포근하게 안긴 채 설원은 눈을 끔벅였다.


“사랑해. 민설원.”

등을 토닥이는 다정한 손길과 함께 그만큼이나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손길이 마치 창가에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처럼 느껴져, 설원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서 한참이나 그 햇살이 제게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설원은 행복이란 것이 늘 멀리 있다고만 생각했다.

손닿지 못할 신기루처럼 그저 부질없는 환상일 뿐이라고.

한데 행복의 정의를 알자마자, 그 정점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의 행복은 권채하가 틔워낸 것이었다.

땅 위로 작은 새싹이 돋듯 그녀의 가슴에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피어났고, 그 사랑을 통해 우주라는 열매를 맺었다.

권채하는 제가 살아갈 수 있는 땅이자, 햇살이며 메마름을 적셔주는 비였다.


“……나도 사랑해요.”

수줍게 내쉬듯 속닥인 그 말에, 그녀를 안고 있던 채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백 번, 수천 번 말하지 않아도 그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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