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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사랑하니까 (54/111)


54. 사랑하니까
2023.02.05.



 
어색한 침묵이 수화기 너머로 흘렀다.

설원이 다시금 설명을 이어가려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설득을.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재윤은 그녀의 말에 곧바로 수긍했다.


[아, 역시 그래야겠지? 알았어. 너무 걱정하지 마. 설원아. 부모님께는 내가 대충 잘 둘러댈 테니까.]

“……미안해요.”

[미안하긴. 네가 사과를 왜 해. 저번에 보니까 우주가 권채하 씨를 곧잘 따르긴 하더라. 셋이서 즐거운 시간 보내.]

“……네.”

덤덤한 그의 말투가, 더욱이 실망을 숨기고 있음이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다.

서로가 고마움이라는 감정으로 묶여 있는 관계.

그 안에서도 재윤이 제게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쯤은 잘 알 수 있었다.

하나 미안하게도 그런 감정이 사랑까지 이어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 사실은 바로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괜한 여지를 주는 것이 더 나쁜 것이기에, 설원은 차라리 빠르게 선을 긋기로 마음먹었다.

재윤은 건실하고도 다정한,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남자였다.

그런 만큼 이미 남편에 아이까지 있는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정말 좋은 여자를 만나서 짝을 이루는 걸 보고 싶었다.

전화를 끊은 뒤, 설원은 핸드폰 화면의 달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8월. 설원의 생일이자 어머니의 유서를 받아 섬으로 돌아가기로 한 날짜였다.

분명 그런 의미였던 뜨거운 여름이, 지금은 어쩐지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필시 한 남자 때문일 터였다.


“저기, 채하 씨.”

“응. 뭐지?”

그날 저녁, 채하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설원은 현관으로 바삐 마중을 나갔다.

떠오른 김에 미리 약속을 잡아볼 작정이었다.

달력을 보니 그녀의 생일은 평일인지라, 외식이라도 하려면 채하가 야근을 해선 안 되었다.

물론 그녀와 우주가 이 집에 머문 뒤로 채하는 십중팔구 칼퇴를 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 이번 주 목요일에 혹시 회사에 중요한 일 있어요?”

“회사? 중요한 일?”

채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묻고도 애매한 질문이다 싶어 설원은 슬쩍 질문을 다듬어보았다.


“일찍…… 아니, 일찍이 아니라 평소처럼 퇴근할 수 있냐고요.”

“흐음.”

대답 대신 채하가 턱을 어루만졌다. 곧은 시선이 설원을 살피는 듯도 했다.

괜히 높아지는 긴장감에 다시 답을 재촉하려던 찰나였다.

그의 곧은 시선이 그녀를 지나, 뒤쪽으로 향했다.

곧 다다다 귀여운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우주가 껑충 뛰어서 채하의 품 안에 뛰어들었다.


“대왕 아빠!”

“우리 꼬마. 이렇게 격하게 반겨주면 대왕 아빠가 너무 좋아서 죽는데.”

“으응? 대왕 아빠 죽어요? 좋은데 왜 죽어요?”

“너무 좋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채하가 지그시 설원 쪽을 응시하는 바람에, 설원은 하려던 말을 잃어버리고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그보다…….


‘혹시 내 생일을 모르는 건가?’

순간 스친 생각에 설원의 가슴 깊은 곳이 따끔거렸다.

그간 그가 보였던 열띤 정성에 추호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애초에 한 번도 생일을 함께 보낸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거늘.

낮엔 허영주의 등쌀에 집안일이나 하면서 보내고, 밤엔 홀로 침대에서 잠드는 게 그간 그녀가 보내온 생일이었다.

한데 옛날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던 일이, 지금은 못내 서운했다.

아니, 몹시 서운했다.

설원은 우주를 어깨에 걸치다시피 한 채 2층으로 올라가고 있는 채하의 등을 쏘아보았다.

정말 모른다면 분명히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그와 시간을 보내려고 재윤 부모님의 권유도 거절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아직은 월요일이었다.

생일까지는 조금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권채하에게 아내의 생일이라는 중대한 사실을 깨우치게 할 여유가.

불운하게도, 설원의 계획은 좀처럼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하면 먼저 말하기 민망하다는 알림이 그녀의 머릿속을 댕댕 울렸다.

겨우 입술이라도 뗐다 싶으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우주가 달려와 대왕 아빠를 낚아채 갔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환상적인 타이밍에 둘이 짠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셋이서 근사한 곳을 예약해 외식을 할지, 집에서 맛있는 걸 만들어 먹을지 의논해야 하는데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흘러만 갈 따름이었다.

정말이지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설원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

타고난 성격은 바꾸기 어렵다는 말에 설원은 극히 공감했다.

결국은 채하에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목요일을 맞이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는 ‘오늘 바쁘니 대신 우주를 픽업해 달라’는 연락을 보내, 설원을 더욱 좌절하게 만들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이면 그녀의 생일에 야근 각이 서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권채하는 채운 그룹의 부사장이고, 그에게 아내의 생일보다 중요한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예? 우주가 집으로 갔다고요?”

한데 잎새 어린이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설원은 황당한 상황을 맞닥뜨렸다.


“네. 방금 그 대왕 아버님께서 데리러 오셨는데요. 둘이 차 타고 갔는데, 못 들으셨어요?”

“아…….”

“되게 바빠 보이셨는데, 깜박하셨나 보다~.”

사려 깊은 토끼반 선생님이 슬그머니 설원의 눈치를 보며 위로 겸 변명을 건넸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감출 수 없는 실망이 설원의 가슴에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자기가 한 말도 번복하고서 우주를 데려가다니, 허무했다.


“전 그럼 가볼게요. 선생님.”

“네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우주 어머님.”

로라 앤 제임스에서 바로 오는 길이었던지라, 따로 기사님을 대동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설원은 제임스와 로라가 제 손에 들려준 쇼핑백만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하물며 직장 상사조차 이렇게 생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선물까지 챙겨주는데, 남편이란 사람이 이렇다니.

아무래도 오늘은 어울리지 않더라도, 푸념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우주야. 엄마 왔어.”

심통이 난 설원이 일부러 우주의 이름만 부르며 현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팡! 하고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축하해. 여보.”

“이게…… 무슨……?”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설원이 눈앞의 거실 풍경을 바라보았다.

벽을 장식한 금색 은색 풍선마다 우주의 삐뚤삐뚤 귀여운 글씨로 ‘엄마, 사랑해요.’라고 적혀 있었다.

풍선 아래론 케이크를 두 손에 든 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채하가 보였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풉!”

“……그렇게 비웃으면 안 되지. 우리 꼬마가 준비한 회심의 선물인데.”

“아니, 우주는…… 귀여운데 당신은…….”

“난 안 귀엽다는 건가?”

“세상에. 거울 좀 보고 말해요. 채하 씨.”

설원이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케이크를 들고 있는 채하와 그 옆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있는 우주.

두 사람은 똑같은 호랑이 옷에 호랑이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작고 귀여운 우주야 그 차림새가 찰떡같이 어울렸지만, 190cm는 족히 되는 차가운 얼굴의 남자가 그러고 있으니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당신, 너무 크게 웃는 거 아닌가. 사람 민망해지게.”

“엄마! 이거 대왕 아빠랑 놀이동산 가서 산 거예요. 엄마 것도 있어요.”

“응?”

“엄마도 써요. 호랑이 가족 해요.”

우주가 들고 있던 상자에서 야무지게 호랑이 귀를 꺼내곤 설원에게도 씌워주었다.


“잘 어울리네. 당신 입을 호랑이 옷도 준비할 걸 그랬군.”

“안 입어요.”

설원이 정색하며 머리띠를 정돈하자, 채하가 능청맞게 웃음을 날렸다.


“안 입어주면 더 좋고.”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아이 앞에서!”

“민설원. 당신이야말로 상상력이 이상한 쪽으로 풍부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1을 말했을 뿐인데, 당신은 이미 10을 생각하는 것 같아.”

“아, 아니에요!”

설원이 힐끔, 무슨 소린지 알쏭달쏭한 눈으로 둘을 올려다보고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이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자, 그러지 말고 이리 와. 호랑이 가족의 생일 파티를 해보자고.”

채하가 설원의 손목을 잡아끌어 거실 가운데에 앉혔다.

자리에 앉으니 벽에 꾸며진 풍선들이 더욱 잘 보였다.

주문 제작한 케이크를 가지런히 내려놓은 채하가 거실의 불을 끄곤 초에 불을 붙였다.


“서른한 번째 생일, 축하해. 우리가 만난 지도 벌써 8년이나 됐군.”

“……고마워요.”

그의 말에 새삼 설원은 세월을 실감했다.

스물셋의 어린 나이로 만나, 그의 아내로 함께 했던 시간들.

일부러인지 5년의 공백을 채하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자, 불어. 우리 꼬마가 당신을 위해 특별한 쇼를 준비했으니까.”

“……?”

“어서.”

“알겠어요. 후~.”

설원이 초를 불자, 우주가 쪼르르 달려가 다시 불을 켰다.

그러고는 앙증맞은 율동과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기 호랑이 같은 너무도 귀여운 모습에 설원도 채하도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침내 노래가 끝나자 두 사람은 약속한 듯 손뼉을 쳤다.


“이거, 우리 꼬마. 나중에 아이돌 하겠다고 하는 거 아니야?”

“아이돌이 뭐예요, 대왕 아빠?”

“우리 꼬마처럼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귀엽고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하는 거야.”

또 팔불출 같은 칭찬이 시작되자, 설원이 못 말리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채하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왜요?”

맹목적인 시선이 뺨에 와 닿자, 설원은 괜스레 손으로 제 뺨을 쓸어내렸다.

잠시 채하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더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민설원. 당신과 나, 그리고 우주. 이제 진짜 가족이 되었으면 해.”

“가족…….”

호랑이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진중한 그의 말투에 설원이 조용히 그 단어를 읊조렸다.

그러자 옆에서 우주가 호랑이 귀를 열심히 끄덕이며 응수했다.


“응! 엄마. 토끼반 선생님이 그러는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가족이 되는 거랬어요~ 우주는 엄마랑 대왕 아빠를 사랑하고, 대왕 아빠는 엄마랑 우주를 사랑해요!”

“…….”

순수한 아이의 말에 설원의 뺨이 급격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해맑게 우주가 조잘거림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엄마도 우주랑 대왕 아빠를 사랑해요!”

말문이 턱 막혀 설원은 저도 모르게 채하를 쳐다보았다.

사랑한다…….

아이의 입으로 나온 말이었지만, 막상 한 번도 전하지 못한 진심이었다.

채하는 그런 그녀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바닷가 캠핑에서도 그는 이미 분명히 전했던 바 있었다.

이대로 우주와 함께 곁에 남아달라고.

그때 입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한 대답이 내내 가슴을 맴돌고 있었다.

이대로 셋이어도 좋지 않을까, 이번만큼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저를 보는 열띤 채하의 눈동자에 이미 답을 내린 그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설원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단 한 번도 전하지 못한 말, 늘 하고 싶었던 말. 바로 지금이 꺼낼 때였다.


“……좋아요. 우리, 진짜 가족 해요. 나도 우주랑 당신을……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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