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선택 (53/111)


53. 선택
2023.02.01.



 
결국 설원은 퇴근 시간이 될 무렵까지 부사장실에 머물게 되었다.

제집처럼 곤히 자는 우주를 차마 깨울 수 없어서였다.

게다가 정 비서가 가져다 두었다는 창가 의자에서 보는 풍경이 의외로 좋았다.

실은 그 의자에 앉아 정작 설원이 힐끔거린 것은 일하고 있는 채하의 모습이었다.

끝도 없이 입을 맞추려는 걸 힘겹게 만류하고 자리에 앉히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집중하고 있었다.

집에서도 몇 번 일하는 걸 보긴 했지만, 지금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차근히 서류를 검토 중인 그의 옆모습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낮은 목소리를 따라, 조금 전 그녀가 매어 준 넥타이로 이어지는 목울대가 도드라졌다.

그때마다 그녀의 심장도 함께 요동치는 것 같았다.

원래도 감탄스러운 옆선이었지만, 5년이라는 세월은 그의 얼굴에 더욱이 깊은 음영을 드리운 듯했다.

반듯한 이마부터 날렵한 콧날, 곧은 턱선, 그리고…….


“그렇게 훔쳐보지 말고 그냥 대놓고 봐도 돼.”

“……!”

“뭘 그리 놀라. 다 들켰어. 민설원, 당신이 나 훔쳐보는 거.”

“훔쳐보다뇨? 누가요?”

설원이 앉아 있던 의자가 어색하게 흔들렸다.

뒤늦게 창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려는 그녀의 부질 없는 몸부림 탓이었다.

그러자 채하가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당신은 창밖 풍경보다 내 얼굴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흠. 그럼 내 입술에 관심이 있는 건가? 아직 부족해?”

“그건 더 아니에요!”

낯 뜨거운 발언에 설원이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멈추려고 들지 않는 그를 겨우 말린 게 누군데, 되레 모함을 당하다니 억울했다.

솔직히 그의 입술도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으음~.”

때마침 소파에서 우주가 꼼지락거리며 눈을 떴다.

드물게 높아진 설원의 목소리에 드디어 깨어난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아기 구세주가 아닐 수 없었다.


“우주 일어났어?”

“엄마~ 우주 코 잤어요?”

“응. 아주 잘 자던걸. 우리 우주 좋은 꿈 꿨어?”

설원의 질문에 우주가 통통한 볼을 빛내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아주 환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응! 우주 대왕 아빠랑 엄마랑 계속 같이 사는 꿈 꿨어요~ 꿈속에서 엄마는 공주님이고, 대왕 아빠는 우리 아빠였어요!”

“…….”

예상치 못한 답변에 설원의 말문이 턱 막혔다.

당황한 그녀를 대신해 채하가 재치 있게 응수했다.


“엄마가 공주님이면 대왕 아빠는 왕자님이지.”

“으응? 그런 거예요?”

“그래. 그리고…….”

어느새 우주 옆으로 와 무릎을 낮추고 아이를 바라보던 채하의 눈빛이 깊게 잠겼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설원은 눈치챘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언젠가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우주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진실을 전할 작정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채하는 우주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저를 곤란하지 않게 하려는 그 배려가 고마워, 설원의 마음이 창가로 보이는 노을만큼이나 따스하게 물들었다.


“자, 꼬마 일어났으니 집에 갈까.”

“집에 가요? 대왕 아빠 일 다 했어요?”

“그래. 우리 꼬마 과잣값은 다 벌었거든.”

“과자! 우주 과자 먹을래요!”

“좋아. 집에 가면서 잔뜩 사 가자.”

“네!”

신이 나서 방긋방긋 웃는 우주의 통통한 볼을 보며, 설원은 결국 오늘도 과자를 사지 말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함께 출근했던 세 사람은 나란히 퇴근길에 올랐다.

개인적인 운전은 늘 채하 본인이 했기 때문에, 설원도 이제 그의 세단 조수석에 익숙해졌다.

그건 우주도 마찬가지였다.

차에 오르자마자 우주는 뒷자리 창문에 딱 붙어 번잡한 퇴근길 도로를 구경 중이었다.

무수히 많은 차들이 옆을 스쳐 갈 때마다 우주는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섬에선 자동차보다 배를 더 자주 봤기에, 이렇게 많은 차는 언제 봐도 아이에겐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삐용삐용~ 세찬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우와! 엄마! 저거 봐요!”

창문에 얼굴을 딱 붙이고 있던 우주가 탄성을 질렀다.

거대한 소방차들이 줄지어 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 우주 책에서 봤지? 저게 뭐라고?”

“소방차!”

“맞아. 우주 잘 기억하고 있었네.”

설원이 칭찬하자 우주가 뿌듯해하며 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러 너머로 채하가 다정하게 우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꼬마는 소방차를 본 적이 없나?”

“아…… 섬이 워낙 작아서 실제로 본 적이 없어요. 딱히 소방차가 올 만큼 불이 난 적도 없었거든요.”

“다행이네.”

그의 말투에는 안도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섬에서는 특별히 위험한 일이 없긴 했으니, 아이를 가진 엄마로서도 다행이긴 했다.


“우주 대왕 소방차 처음 봐요. 엄청 엄청 크고 멋있어요~.”

“저거보다 더 작은 소방차도 있어. 지금은 큰불이 나서 그런 거야.”

“큰불…….”

마냥 멋지다며 감탄하던 우주의 얼굴에 일순 근심이 서렸다.

곧 우주가 조그만 입술을 우물대며 물었다.


“그럼 소방관 아저씨가 큰불을 끄러 가는 거예요?”

“그래. 저 소방차에 타고 계시지.”

“으응…….”

 

 
우주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이 점차 짙어지자, 설원이 결국 뒤로 몸을 돌렸다.


“왜 그래. 우주야?”

“응~ 소방관 아저씨도 불이 무서울 텐데…… 위험할 텐데 어떡해요? 엄마의 아빠도 큰불을 끄려고 불 속에 들어갔다고 했잖아요. 엄마 아빠는 괜찮아요?”

“아…….”

그제야 설원은 예전에 그림책을 보며 소방차를 설명할 때, 스치듯 아버지 이야기를 한 것을 떠올렸다.

죽음이나 순직의 개념을 모르는 우주에게, 설원은 이렇게 설명했었다.

‘엄마의 아빠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불길에 뛰어든 용감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설원은 이번에도 같은 설명으로 우주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엄마의 아빠는 용감한 사람이라고 했잖아.”

“용감하면 안 무서워요?”

“무섭지. 무서웠을 거야. 하지만 아빠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멋진 분이셨단다.”

“으응…….”

“우리 우주가 이렇게 걱정해주니까 아빠도 좋아하실 거야. 괜찮으실 거고.”

그제야 우주가 조금 안심이 된 듯 창가에서 고개를 돌렸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도 어느새 멀어지고 도로는 평온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설원의 가슴에는 소방차가 남긴 기억의 조각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밤을 보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병원에 입원 중인 어머니의 상태가 꾸준히 안정세를 보이고 있을 무렵.

설원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어머니가 그녀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었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기일에 채하와 셋이 성묘를 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결혼하고 한 번도 사위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니, 더 늦기 전에 그러고 싶다면서.

사실 그 생각을 설원이라고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원래라면 계약 결혼인 만큼 채하를 보여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하나 마음에 어느새 깊이 자리 잡은 권채하라는 남자를, 그녀도 아버지께 소개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비록 이름뿐인 남편일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망설이기만 하던 설원은 끝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당연히 거절당할 제안을 건넨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이후에도 설원의 가슴 속에서 내내 후회로 남아 있었다.

순간 불쑥, 채하의 목소리가 상념을 뚫고 날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민설원. 당신 아버지께도 인사를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네?”

“아직 아버지껜 한 번도 인사드린 적이 없잖아. 마침 꼬마도 있으니 셋이 함께 가지. 국립묘지에 모셨다고 했던가.”

“아…… 네. 맞아요.”

얼빠진 목소리가 설원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오래도록 묵혀온 바람을, 너무도 쉽게 제안하고 있는 채하가 믿기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그의 표정엔 엄숙한 존경이 담겨 있었다.


“우리 꼬마에게도 당신의 멋진 아버님을 소개해줘야지. 아주 훌륭한 분이시라고.”

“……좋아요.”

“조만간 같이 가.”

그렇게 말하며 채하는 한 손을 설원 쪽으로 뻗었다.

곧 그의 큼직한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듯 잡았다.

말보다도 더 큰 위로가, 그 온기에서 가득하게 느껴졌다.

주치의 선생님의 입으로 채하가 제 어머니에게 얼마나 잘했는지 이미 들은 바 있는 설원이었다.

사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제 이상한 것도 없었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한 거짓말도 임기응변도 아닌 그저 ‘진심’이었기에.

그리고 설원 또한 진심으로 권채하를 돌아가신 아버지께 소개하고 싶었다.

소중한 남편이며, 우주의 아빠이자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

여름은 슬슬 절정으로 치달았다.

설원은 다시 로라 앤 제임스에서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

우주가 어린이집에 간 사이 짤막하게 일하는 정도였지만, 꽃을 만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행복했다.

그녀가 오후에 집에 돌아오면 잠시 후 어린이집에 갔던 우주가 돌아오고, 이어 회사에서 채하가 퇴근을 했다.

이런 일상이 불과 석 달도 되지 않았음에도,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있어야 할 자리.

그것에 대한 대답이 설원의 안에서도 차츰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5년 전 그렇게 쫓기듯 떠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진즉 누렸을 일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주가 여전히 아빠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는 게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띠리리. 띠리리.


“이런, 진동으로 해 둔다는 걸 깜박했네.”

마침 혼자서 화분을 손질하던 중이라 설원은 재빨리 장갑을 벗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것은 재윤이었다.

안 그래도 그와 제대로 만나서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차였다.


“여보세요. 재윤 씨.”

[어. 금방 받는구나. 다행이다. 일하는 데 방해한 건 아니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설원이 너 곧 생일이잖아.]

“생일…….”

완전히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간 이곳에 적응하고, 이런저런 많은 일을 겪느라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원래 섬에 있을 때는 재윤의 가족들과 소소하게 식사를 하며 보내곤 했었는데.


[그래. 아무래도 우주랑 섬에 왔다 가기는 번거로울 것 같아서, 부모님께 여쭤보니 서울에 올라오시겠다네. 설원이 너만 괜찮으면 말이야.]

“…….”

[매년 같이 보냈으니 서운하신가 봐. 곧 섬에 돌아올 거니까 조금 기다리자고 말씀드렸는데도 그러시네. 알잖아. 우리 부모님이 아들보다 설원이 너랑 우주를 더 아끼는 거.]

“아아…….”

재윤의 부모님이 제게 신경을 써주는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은혜를 갚고 있는 것이었다.

이른바 아버지의 목숨값을. 그 고귀한 희생의 대가를.

하지만 설원은 이제 선택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 가족에게 위탁해 지금까지 넘칠 정도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힘든 일이 있으면 찾아가라는 생전 어머니의 유지가 실제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설원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는 섬이 아니라 이곳 권채하의 곁이었다.

그래서 설원은 이번만큼은 고민의 여지 없이 확고한 뜻을 전하기로 결심했다.


“미안해요. 재윤 씨. 이번 생일은…… 채하 씨랑 우주, 셋이서 보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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