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블라인드를 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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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블라인드를 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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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블라인드를 치는 이유
2023.01.29.
선언한 대로 채하는 오전 시간을 온통 설원과 우주에게 할애했다.
세 사람은 함께 건물을 둘러보고, 중간층에 마련된 키즈 놀이터에도 가고, 사내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야말로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즐거운 나들이였다.
정작 회사 구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원들에게 진귀한 구경거리를 선사한 셈이었지만.
대왕 아빠가 정말로 대왕이라는 것을 확인한 우주는 무척이나 신이 나 있었다.
다만 오전 내내 너무 뛰어놀았는지, 점심을 먹고 나서 곧장 곯아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덕분에 설원의 난감함은 배가 되었다.
“점심만 먹고 나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뭘 그리 서둘러. 집에 일 있는 것도 아닌데.”
“일은 당신이 있죠. 여기가 채하 씨 일터잖아요.”
이젠 제법 자연스럽게 나오는 ‘채하 씨’라는 호칭에 채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부사장실 소파에 막 우주를 눕힌 참이었다.
도톰한 담요를 덮어주니 우주는 그야말로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열심히 일하도록 하지. 단, 그전에 당신도 할 일이 있어.”
“할 일이요……?”
“이거.”
채하가 시선을 슬쩍 내리자, 비뚤어져 있는 넥타이가 설원의 시야에도 들어왔다.
당황한 설원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설마, 나더러 매어 달라고요?”
“그래. 바른 옷매무새에서 집중력이 나오는 법이니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태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설원이 보기에는 충분히 그런 꿍꿍이를 꾸미고도 남았다.
설원은 힐끗 등 뒤를 살피듯 바라보았다.
부사장실은 반쯤 투명한 문이 나 있어, 앉아 있는 직원들이라면 몰라도 지나가는 직원들에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일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등이 따가울 만큼 요란한 시선을 받았는데, 그런 장면을 연출했다간 무슨 소릴 듣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흠. 이러면 되나?”
순식간에 채하가 블라인드를 내리며 우려를 불식시켰다.
되레 수상해 보일 그 행동에, 설원의 입술이 놀라움으로 살짝 벌어졌다.
블라인드가 내려가는 동안, 그의 입꼬리는 거의 하늘에 닿을 듯 올라가고 있었다.
곧 부사장실은 완벽하게 은밀한 장소로 탈바꿈했다.
채하가 그대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왜인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설원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채하가 부러 더 가까이 다가와선 귓가에 대고 속살거렸다.
“그냥 넥타이 좀 매어 달라는 것뿐인데, 뭘 그리 긴장해?”
“긴장 안 했어요.”
“꼭 뭔가 다른 걸 기대하는 표정인데.”
“아, 아무것도 기대 안 했거든요?”
“그래? 나는 기대하고 있는데.”
설원이 발끈하자 채하의 낮은 목소리에 부쩍 즐거움이 실렸다.
차라리 빨리 매주고 말자 싶어 설원은 그의 넥타이에 손을 대려 했다.
그의 말대로 그냥 비뚤어진 넥타이를 바르게 돌려놓는 것뿐인데, 지나치게 의식하는 꼴이 되레 우스울 것 같았다.
한데 예상 못 한 상황이 벌어졌다.
제 가슴팍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손을, 채하가 먼저 붙든 것이었다.
불타는 듯한 그의 시선이 설원의 네 번째 손가락 위에 내려앉았다.
“반지, 꼈네.”
“……예쁘니까 상자 속에만 숨겨두긴 아까워서…….”
중얼중얼 어설픈 변명을 하는 설원을 그가 못내 사랑스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넥타이를 바로 하는 대신 그녀의 뒤로 가, 가녀린 몸을 품 안 가득 안았다.
이어 야릇한 속살거림이 귓가를 간질였다.
“채, 채하 씨…….”
“당신이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니까, 블라인드를 안 치고 배길 수가 있어야지.”
채하가 입술을 붙이곤 설원의 귓가부터 목덜미까지를 천천히 훑어내렸다.
순식간에 긴장감이 솟구치며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그의 숨이 살결을 스칠 때마다 설원의 솜털이 삐죽 서는 것만 같았다.
겨우 포옹일 뿐인데, 이렇게 자극적일 수 있다니 놀라웠다.
백허그 같은 걸 해본 적도 받은 적도 없으니 알지 못했던 것이 당연했다.
뒤에서 안는다는 게 얼마나 무방비하게 상대에게 속한 기분이 드는지를.
따스하게 닿는 그의 입술에 꼭 살이 달궈지는 듯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만, 그만 해요.”
기분이 너무 이상해진 나머지 설원은 그에게서 몸을 비틀어 빼려 했다.
뜻밖에도 채하는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겨우 빠져나왔나 싶은 찰나, 채하가 설원의 몸을 휙 반대로 돌려 저와 마주 보게 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의 시선이 맹렬히 부딪쳤다.
“예쁘네. 우주 말대로. 세상에서 제일.”
“…….”
어쩔 도리 없이 속수무책으로 붉어지는 뺨을, 가릴 새도 없었다.
채하가 훅하고 입술을 포개왔다.
동시에 설원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지금은 소파에 아이가 누워있다는 사실도, 이곳이 그의 회사라는 사실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로지 느껴지는 것은 포개진 입술 사이로 오가는 뜨거운 그의 숨결뿐이었다.
빈틈이라고는 조금도 용납할 수 없다는 움직임만이, 부드럽게 그녀를 감쌌다.
그에 그녀의 몸도 다시 채하의 품 안에 온전하게 갇혀버렸다.
뒤에서 끌어안든, 앞에서 끌어안든, 자극적인 건 똑같았다.
설원은 그 사실을 문득 실감하며 사뿐히 발을 들어 그에게 매달리듯 안겼다.
저도 모르게 이끌려 한 행동이었다.
그 사소하면서도 사랑스러운 행동에, 채하는 불이 붙고 말았다.
블라인드 너머 은밀한 키스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
한편 설원 모자가 채운 가를 방문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허영주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녀는 그 사실을 보고하러 온 윤 실장을 거실에 세워두고 정신 사납게 좌우를 오가는 중이었다.
한참이나 그 행동을 반복하던 허영주가 마침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입술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윤 실장이 그녀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안 됩니다. 못 가요.”
말도 못 해보고 제 계획이 저지당하자 허영주의 낯빛에 급격한 노여움이 번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대뜸 안 된다는 소리부터 하는 거야? 윤 실장은 사람이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적어도 지금 사모님께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말 돌리지 말고! 그게 진짜야? 우리 아가가 회사에 있다는 게?”
“보고의 의무 때문에 보고드리긴 했지만, 새삼 제 직업에 회의감이 드네요.”
윤 실장이 짙어진 다크서클을 보란 듯 가리켰다.
허영주는 노골적으로 보기 싫다는 표정을 짓곤 초조하게 손톱을 뜯었다.
“왜 하필 민설원이가 같이 와 가지고!”
“작은 사모님이 같이 안 오셨어도, 부사장님께서 사모님 오시는 거 보면 채운의 문을 걸어 잠글 겁니다.”
“아, 정말! 윤 실장은 대체 누구 편이야!”
“저야 늘 그랬듯 충실하고도 충실한 채운 가의 사람이죠.”
“으휴! 답답해!”
속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허영주가 소파에 털썩 몸을 기댔다.
윤 실장의 만류가 아니어도 사실 제가 버선발로 뛰어갈 처지가 못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우주를 향한 상사병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요 며칠 새에도 은밀하게 잎새 어린이집에 갈 궁리를 하고 있던 터였는데, 하필이면 여름방학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오매불망 보고 싶은 귀여운 아이가 지금 회사에 있다니…….
차마 집으로는 쳐들어갈 수 없는 허영주로서는 아주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저번에 설원에게 유학을 권유했다가, 거의 반영구적인 출입 금지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눈뜨고 놓쳐야만 하는 게 한탄스러웠다.
속이 얹힌 듯 한숨만 푹푹 쉬어대고 있는 그녀를 보며 윤 실장은 목까지 차오른 말을 꾹꾹 참아야 했다.
주인만 아니었다면 ‘그러게, 마음 좀 곱게 쓰시죠.’라고 던질 수 있으련만.
속이 답답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소식은 다른 쪽에도 전해졌다.
당연하게도 이쪽의 반응은 허영주와는 180도 달랐다.
“뭐? 그 여자가 채운 그룹에 나타났다고? 애까지 달고서?”
“네. 그렇답니다.”
콰직, 손에 들고 있던 펜이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회사인 사라 코스메틱에서, 백사라는 백재영이 붙여준 끄나풀에게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아주 그냥 막 나가네. 뻔뻔스럽게 회사에까지 가다니.”
“혼자 간 게 아니라 권채하 씨와 같이 출근한 거라고 합니다.”
“아, 시끄러워!”
“죄송합니다.”
유독 마른 남자가 진땀을 흘리며 백사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원래 백재영 밑에서 일하다가, 얼마 전부터 둘 사이의 소식통 및 은밀한 업무를 담당하게 된 참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저번에 낸 찌라시는 곧장 역추적을 당해서 일단 다 내려둔 상태입니다.”
“그딴 건 어차피 일회용에 불과하지.”
백사라가 기다란 손톱 끝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뻔하지만 손쉬운 수법으로 스크래치를 좀 내보려 했건만, 역시 그 정도로는 먹히지 않았다.
옛날처럼 간단하게 민설원을 요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 못내 분하고 또 분했다.
그녀의 보호자가 권채하라는 사실에는 더더욱.
예전엔 아내가 죽든 살든 관심도 없더니, 이젠 제품에 끼고 금이야 옥이야 하고 있으니 백사라로서는 미칠 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밑바닥을 조금 더 긁어봐야지.”
“네?”
알 수 없는 소릴 한다 싶어 남자가 목을 쭉 빼고 물었다.
그의 눈에 곧 백사라의 번들거리는 미소가 들어왔다.
한없이 흉흉한 눈빛은 덤이었다.
“그 섬사람들을 좀 매수해 봐. 금전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을 거야.”
“섬사람들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그 너튜버들 있지. 왜, 재계의 뒷이야기를 파헤치는 방송하는 애들.”
“네. 영 질이 좋지 않아서 저희 쪽에서도 절레절레합니다만.”
“돈 앞에 질 좋은 인간이 어딨겠어? 이참에 아예 생방 중계를 때려버려야겠어. 빼도 박도 못하게 사실을 박제하는 거지. 섬에서 외간 남자와 살았다는 건, 엄연히 사실이잖아?”
“그게…….”
남자가 또다시 진땀을 빼자, 백사라가 훗 하고 비웃음을 날렸다.
“왜? 조사해보니 같이 산 건 아니고 그냥 그 부모가 제공한 집에서 여자랑 아이만 살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서 그래?”
대답 대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녀가 원하는 정보를 물어다 주고 싶어도, 팩트가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심하긴. 어차피 그 남자 부모가 해준 집인데, 같이 살았는지 따로 살았는지가 뭐가 중요해. 그냥 궁한 사람 하나 매수해서 자주 들락날락했다고 은근히 운만 띄워도 충분해. 어차피 사람들 상상력에 불만 지펴주면 되니까.”
“오.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쯧. 오빠한테 신통한 인물을 붙여 달랬더니, 댁은 너무 초짜 티가 나.”
“죄송합니다.”
“뭐, 일단은 시키는 대로만 해. 시간 끌지 말고 즉시 실행하고.”
“네.”
남자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곤 사장실을 나갔다.
엊그제 갓 한 네일에 미세한 스크래치가 나 있는 것을 발견한 백사라가 츳, 하고 혀를 찼다.
요즘 그녀의 인생에는 거슬리는 게 너무나 많았다.
물론 그중 제일은 민설원과 그녀의 아이였다. 우주라고 했던가.
입술 새로 분노를 억누르며 백사라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거슬리는 건 없애버리는 게, 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