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팔불출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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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팔불출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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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팔불출 Ⅱ
2023.01.25.
정 실장이 제안했던 ‘캠핑’이라는 돌파구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지지부진하던 과거 조사에 새 국면을 맞게 된 것은 물론이고, 역시 가장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였다.
황홀할 만치 로맨틱했던 반딧불이의 숲.
마침내 설원이 그를 기억하고 있음을 토로한 뒤론, 서로의 눈망울만 봐도 심장이 격하게 고동쳤다.
비록 아직 곁에 계속 머물겠다고 답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채하는 전처럼 초조하진 않았다.
그 밤, 서로가 나눈 입맞춤에서 짙은 진심을 느꼈으니까.
맹더위가 위세를 떨치는 7월의 마지막 주.
잎새 어린이집도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한동안 친구들과 복작복작한 일상을 보냈던 우주는, 어색한 심심함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꼬마, 방학인데도 일찍 일어나다니 기특하네. 역시 착한 어린이야.”
“우주 착해요?”
“그럼.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쁘고, 귀엽지.”
배웅하려 채하를 뒤따라 나오던 설원은 두 부자의 대화에 실없이 웃어버렸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거하게 칭찬해주는 대왕 아빠에게, 우주는 단단히 길드는 중이었다.
물론 아이에게 칭찬이 중요하다는 것은 설원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다소 심했다.
밥을 크게 떠먹어도, 물을 많이 마셔도, 일찍 자도, 늦게 자도.
거의 우주의 일거수일투족이 채하의 칭찬 범주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의 그런 양육 태도는 우주에게도 부쩍 자신감을 상승시켰다.
말간 얼굴을 한 우주가 마침 잘됐다는 듯 그의 허벅지에 매달렸다.
놀아달라는 뜻이었다.
그런 우주를 설원이 나름 엄격하게 달랬다.
“우주야. 대왕 아빠는 회사 가야 해. 놔줘야 갈 수 있겠지?”
“회사? 대왕 아빠는 방학 없어요?”
“꼬마. 어른은 방학 같은 거 없는 거야. 일을 해야 꼬마 과잣값을 벌 수 있거든.”
“으응~.”
대답은 하면서도 의아한지 우주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다가 곧 좋은 생각이 난 듯 눈을 반짝 빛내며 채하를 올려다보았다.
“대왕 아빠! 우주도 대왕 아빠랑 같이 회사 가면 안 돼요?”
“응?”
“우주야. 아빠는…… 아니, 대왕 아빠는…….”
당황한 설원이 우주를 말리려 했지만, 되레 채하가 먼저 그녀를 막았다.
우주의 깜찍한 계획을 반드시 듣고 싶다는 표정으로.
“계속 얘기해 봐. 꼬마. 회사에 가고 싶어?”
이러다간 아주 부사장직을 달라고 해도 줄 판이라 설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를 너무 물렁하게 교육해도 안 된다고, 나중에 슬쩍 귀띔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의 우려를 알지 못한 채, 자신감을 얻은 우주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주도 대왕 아빠하고 같이 일할래요~.”
“호오. 우리 꼬마가 일도 하려고?”
“우주도 과잣값 벌 거예요~.”
“들었지? 우리 꼬마가 이렇게 기특해.”
“……일일이 들어줄 필요 없어요. 그냥 심심해서 조르는 거예요. 우주야. 이리 와. 우주는 엄마랑 놀자.”
“아니.”
채하가 단호히 말을 끊곤 우주를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 꼬마의 부탁인데 어떻게 안 들어주나. 자, 그럼 세수하고 대왕 아빠랑 같이 출근할까?”
“응! 우주도 출근해요~.”
“네? 같이 출근이라뇨. 아무리 그래도 그건…….”
해사하게 밝아진 우주와는 달리 설원의 낯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채운 그룹은 아이와 어울리는 장소도 아니었거니와, 그가 회사 내에서 어떻게 불리는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냉혈한, 얼음 인간 등등…….
그런 채하가 대뜸 아이를 데리고 출근했다간, 틀림없이 구설에 오르게 될 터였다.
하지만 두 부자는 이제 다루기가 통 쉽지 않았다.
다시금 만류하려는 설원의 입술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채하가 느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걱정되면 당신도 같이 오든지.”
“……네?”
“어차피 우주 방학 동안엔 당신도 별다른 일 없잖아.”
“그렇긴 한데…….”
“당신이 뭐라고 해도 난 꼬마랑 같이 갈 거야. 선택해. 집에 혼자 남아서 궁상맞은 하루를 보낼 건지, 우주랑 회사에 놀러 갈 건지.”
“궁상이라뇨.”
설원이 슬며시 눈을 흘겼다.
애초에 저를 끌어들이려고 우주의 어리광을 받아준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회사가 놀이터도 아니고, 정말로 가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난감했다.
느른한 시선으로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채하가 우주를 품에 안은 채 성큼 다가왔다.
“민설원. 잊은 모양인데, 당신은 채운 가의 작은 사모님이야. 갈 자격은 충분해.”
“아…….”
“어디 보자. 딱 십 분 줄게. 안 꾸며도 예쁘니까 대충 준비하고 나와.”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요.”
“예쁜 걸 예쁘다고 하지, 뭐라고 말해? 꼬마, 엄마 예쁘지?”
“응! 우리 엄마 공주님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봐, 하는 표정으로 채하가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점점 강도가 세져 가는 그 능글거림에 결국 설원은 항복하고 말았다.
*
그의 말대로 채운 가의 며느리이자 작은 사모님이긴 하나, 채운 그룹 본사에 방문하는 것은 설원으로서도 처음이었다.
그래선지 어색함에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커다랗고 높은 빌딩 안에 들어서자마자 우주는 입버릇인 ‘엄청나요!’를 연발하며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엉겁결에 같이 오긴 했지만, 그녀를 따라오는 시선이 통 민망해 설원은 진땀을 뺐다.
한데 그 시선을 우주는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왜 사람들이 대왕 아빠한테 인사를 해요? 다 아는 사람이에요?”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장면이, 어린아이의 눈에 퍽 신기한 모양이었다.
순수한 그 질문에 채하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우주에게 속닥였다.
“내가 대왕이라서 그래.”
“와~ 대단해요! 대왕 아빠 최고!”
어떤 의미로는 맞는 말이었지만, 설원은 얼른 위로 올라가고만 싶었다.
모두가 부사장인 채하 옆에서 걷고 있는 그녀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하고 있었기에.
하나 정작 부사장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을 땐, 난감함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통유리로 된 도어가 열리고 품에 우주를 안은 채하가 들어오자마자, 직원들의 눈이 마치 자석을 따라오듯 이쪽을 향한 것이었다.
동시에 마치 음 소거를 한 듯한 침묵이 층 내에 감돌았다.
그 적막을 깨며 입을 연 것은 입구에 가까이 서 있던 부장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부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예.”
“그…….”
머리가 반쯤 벗겨진 부장의 눈동자가 또르르 우주를 향했다가, 다시 설원에게로 돌아왔다.
애처롭게도 질문을 잇지 못하는 그를 위해 채하가 명확히 짚어주었다.
“제 아들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고요.”
“아. 아아~.”
넋이 나간 듯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부장의 뒤로, 마찬가지로 눈이 휘둥그레진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기린이라도 된 양 목을 위로 쭉 빼며 우주와 설원을 살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또다시 밀려드는 민망함에 설원의 어깨가 움츠러들려던 찰나였다.
문득 어깨 위로 힘이 실렸다. 따스한 온기도 함께.
자연스럽게 채하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것이었다.
“다들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 자주 올 것 같으니.”
“네. 무, 물론이죠!”
자주 온다는 말에 토를 달 겨를도 없었다.
채하가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이쪽을 지켜보던 직원들의 동공이 일제히 확장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벗어나야겠다 싶어 설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채하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찾아?”
“아. 당신 부사장실이 어딘가 해서요. 그리고…… 정 실장님은 또 어디 계신지. 그리고 또…….”
피식, 채하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만 더욱 보란 듯 어깨를 끌어당기곤, 고개를 훅 숙여 설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황했어? 나도 부사장실에서 당신과 둘이서만 있고 싶지만, 모처럼 우리 꼬마를 회사에 데려왔는데 회사는 구경시켜줘야 하지 않겠어?”
“…….”
대답조차 못 한 채 설원은 애꿎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때였다. 완전히 수렁에 빠진 그녀의 눈에 드디어 구세주가 들어왔다.
“오! 부사장님, 작은 사모님! 게다가 우주까지, 이거 무슨 바람이 부신 겁니까?”
“정 실장님!”
“여기서 뵈니까 새삼 또 반갑네요.”
정 실장이 가까이 다가오자 연신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부장이 슬그머니 자리로 도망쳤다.
두 손을 흔들며 반가워하는 우주를 따라, 설원 역시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척 슬며시 채하의 손에서 어깨를 빼냈다.
엄연히 회사인데, 남사스러운 장면을 너무 오래 연출하고 있었다.
“아저씨!”
“그래. 우리 우주도 어린이집 방학했구나?”
“네!”
“아빠…… 아니, 대왕 아빠 회사 구경하려고 온 거구나.”
“응! 대왕 아빠 회사가 엄청 엄청 커요~.”
우주의 순수한 감탄에 정 실장이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채하를 바라보았다.
“부사장님. 그럼 제가 우주랑 작은 사모님 좀 안내해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직접 구경시켜 줄 겁니다.”
“예? 부사장님께서 직접이요?”
“안 됩니까?”
“안 될 건 없지만…….”
눈치 빠른 정 실장이 힐끔 설원 쪽을 보았다.
이때를 놓칠 수 없어 설원은 도와달라는 호소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채하는 자비 없이 두 사람의 시선 교환을 차단해버렸다.
“어차피 오늘은 오전에 회의도 없습니다. 급히 처리해야 할 결재 건은 책상에 올려두세요. 돌아와서 바로 검토할 테니까.”
“예.”
“자, 그럼 꼬마. 이제 본격적으로 회사 구경을 시작해볼까?”
채하가 품에 안고 있던 우주를 바닥에 사뿐히 내려주었다.
우주의 커다란 두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동시에 설원의 손에 따스한 감각이 느껴졌다. 채하가 손을 잡은 것이었다.
“……?”
당황한 표정으로 설원이 채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속절없이 붉어지는 뺨을 감출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그가 아주 자연스레 다른 한 손으로 우주의 손을 붙들었다.
“자, 가지. 당신은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가 은근히 어린이를 위한 복지 시설이 많은 편이야.”
“알았으니까 손은 좀 놓고…….”
“안 돼. 아까 꼬마 말 못 들었어? 엄청 엄청 큰 곳이라 손 놓았다간 길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그렇지, 꼬마?”
“응! 엄마도 대왕 아빠랑 손 꼬옥 붙잡아야 해요!”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저희를 올려다보는 우주의 상기된 뺨을 보니, 뭐라 더 토를 달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설원은 그에게 이끌려 생전 와 본 적도 없던 채운 본사 탐방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 숨을 꾹 참고 있던 직원들의 흥분 어린 감탄사가 구름처럼 층을 휩쓸었다.
“세상에, 그 흉흉한 소문이 아니라 이게 진짜였네! 눈에서 꿀 떨어지는 거 봤어?”
“그러게. 정 실장님네랑 가족 캠핑을 다녀왔대서 안 믿었는데, 저 다정한 모습 뭐야? 세상에!”
“그거 알아? 부사장실에 걸린 그림, 아들이 그린 거래! 아까 그 귀여운 애가 그린 건가 봐!”
“그럼 오 분마다 지갑 열고 보던 것도 알고 보면 백지수표가 아니었나?”
“아니래. 가족사진이라고 하더라.”
“어머. 어떻게 알았어? 누가 그래. 가족사진이라고?”
“……부사장님 본인이.”
“아…….”
이 순간 부로 채운의 황태자 권채하는 명실공히 새로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팔불출. 그것도 아주 지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