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꼬리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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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꼬리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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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꼬리잡기
2023.01.22.
마음이 이어졌음을 깨달은 덕분일까.
두 사람의 입맞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솔하고, 또 깊었다.
채하는 도무지 설원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입술로 그녀를 뜨겁게 휘감았다.
그 바람에 한참이 지나서야 설원은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설원이 눈 한가득 들어온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여전히 열띤 눈빛이 가시지 않은 채하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또다시 삼켜버릴 듯한 그 눈빛에, 설원의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
이곳이 방안이 아니라 숲속이라서 다행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 만큼.
이윽고 그가 연이은 입맞춤으로 촉촉이 젖은 입술을 열었다.
그러고는 조금도 장난기가 담겨 있지 않은 말투로 진중하게 말을 꺼냈다.
“민설원.”
“……네. 채하 씨.”
다정하게 들리는 그 호칭에, 채하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시선을 계속 마주한 채 그가 한숨 어린 듯 호소해왔다.
“당신을 사랑하기엔 3개월은 너무 짧은 것 같아. 이대로 계속 내 곁에 남아 있어 주는 게 어때. 우주랑 함께.”
“그건…….”
역시나 촉촉하게 흔적이 남은 입술을, 설원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달싹였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마음은 어쩌면 이 질문에 당도하기 위해서였을까.
이 풍경에 취해 그저 그러겠다고, 그러고 싶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자신 역시 그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아직은 둘 사이에 놓인 간극이 너무도 컸다.
단순히 감정만으로 움직이기엔 풀어야 할 문제 또한 너무 많았고, 이것을 당장에 설명하기엔 버거운 일이었다.
고맙게도, 그런 복잡한 감정을 채하 쪽에서 먼저 정리해 주었다.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거 아니야. 단지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 알고 있으라고.”
“……알겠어요.”
“자, 그럼 깜찍하게 우리를 속인 꼬마를 찾으러 가볼까? 오매불망 기다리던 딸기 사탕이 이렇게 야릇한 데 쓰였다는 걸 알면 꼬마가 놀라겠군.”
“무, 무슨 소리예요! 절대로 우주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
“뭘 말이지?”
어둠 속에서도 채하의 입꼬리가 느른하게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설원은 다급함에 설득하듯 말을 이었다.
“당연히…… 우리가…… 키…….”
그러나 그 말은 끝맺음을 하지 못했다.
입맞춤은 끝났는데도, 어째서 온몸의 열기는 도통 가라앉지 않는 건지.
설원은 속절없이 쑥스러움에 잠기고 말았다.
그러자 채하의 낮은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키스. 그것도 아주 진한 키스를 했지.”
“…….”
“그리고, 이다음에는 더 진한 걸 할 거야.”
“정말.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기대하고 있으라는 거지. 이제 와 말하는 건데, 당신을 안고 싶어서 그동안 미칠뻔했어.”
도무지 대꾸할 재간조차 없어 설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아래쪽에서 제 손을 붙드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손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닿은 것 같다고, 설원은 순간 생각했다.
곧 그가 자연스레 그녀를 이끌며 숲 밖으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아주 당연한 것처럼.
왜일까.
이렇게 캄캄한데도, 꼭 붙잡은 채하의 손이 어둠을 밝히는 반딧불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믿고, 따라가면 모든 게 괜찮을 것 같다는.
“엄마! 대왕 아빠!”
숲 밖으로 나온 순간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는 그런 믿음에 더욱 확신을 실어주었다.
채하와 손을 잡고 걸어간 곳에, 두 사람의 우주가 있었기에.
쏜살같이 쪼르르 달려온 우주가 설원과 채하의 다리를 번갈아 끌어안으며 활짝 웃었다.
그러더니 신이 나서 작은 입술로 조잘거렸다.
“반짝반짝 벌레 많이 보고 왔어요? 아줌마가 그러는데 우주가 텐트 속에 잠깐만 숨어 있으면 엄마랑 대왕 아빠가 예쁜 걸 볼 수 있다고 했어요!”
밝혀진 내막에 두 사람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다섯 살 우주는 정말이지 효자, 그 자체였다.
어린 마음에 자기도 보고 싶었을 텐데 엄마와 대왕 아빠를 위해 이런 귀여운 짓을 하며 양보하다니.
새삼 울컥해진 마음에 설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채하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꼬마. 대왕 아빠가 반짝반짝 벌레 꼭 보여줄게.”
“응! 우주 반짝반짝 벌레 좋아해요~.”
본 적도 없는데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 순수한 아이를 보며, 설원과 채하는 붙잡고 있던 두 손을 더욱 꼬옥 맞잡았다.
*
해변 캠핑장의 밤이 완전히 저물었다.
이름 모를 별들이 수면 위에 어른거리는 가운데, 정 실장과 채하는 둘이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쌍둥이들과 우주는 각자 엄마와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잠든 지 오래였다.
덕분에 둘은 터놓고 이런저런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정 실장님한테 텐트 치는 방법은 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패기 좋게 나서긴 했는데, 사실 어렵긴 하더군요.”
“에이~ 저렇게 튼튼하게 잘 치셔놓고 겸손은요. 그나저나 아이들이 좋아해서 다행입니다. 우주를 보니 우리 딸들이 아주 신이 났네요. 역시 저도 아들을 갖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아직 젊은데 천천히 생각해보시면 되죠.”
“그게…… 우리 집사람이 보통이 아니라서 말이죠. 휴. 제가 육아 다 도맡아 할 자신 있는데!”
정말로 아쉬운 듯 정 실장이 흘깃 텐트를 한번 바라보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두 가족의 텐트 안은 이제 완전히 조용해져, 새근새근 숨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정 실장이 문득 목소리를 더 낮췄다.
그러더니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리곤, 이내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작은 사모님 사건에 대해서 저희 아버지께 조사를 부탁하셨다면서요?”
“아. 아무래도 당시엔 정 비서님이 이쪽의 최측근이라면 최측근이었으니까요. 제 아내와의 사이도 좋은 편이었고.”
“……들어 보니 잘 되어가진 않는다고 하던데요.”
언뜻 수심 어린 목소리에, 채하가 덤덤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생각보단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군요.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 그땐 그저 사고라고만 인지했으니까요.”
“아아…….”
“다 내 불찰입니다. 내가 더 의심하고 철저히 조사했어야 했는데.”
“……부사장님은 그때 슬픔에 빠져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작은 사모님을 찾는 일을 포기한 적도 없고요.”
“아뇨. 한참이나 부족했습니다.”
채하가 스스로 용서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잔을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는 것이, 정 실장의 눈에 여실히 들어왔다.
“사실 전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망설였습니다만…….”
“……?”
“저한테 여동생이 있었던 건 아시죠?”
대답 대신 채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딸에 대한 아픔을, 정 비서는 평생 안고 살았으니까.
당연히 그 아픔은 오빠인 정 실장 또한 지고 있을 터였다.
무겁게 처진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도 모르지만, 사실 제 동생이 그렇게 된 건 백영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놀란 채하가 정 실장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평소엔 밝기만 하던 그의 옆모습엔 형용할 수 없는 시름이 담겨 있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백영의 장남, 백재영과 관련이 있다고 해야겠지요.”
“…….”
그 말만으로 채하는 모종의 사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알기로는 정 비서의 딸은 백영 그룹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 동생은 백재영의 아이를 임신했었습니다.”
“……!”
뜻밖의 진실에 거센 충격이 채하를 강타했다.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작정한 듯, 정 실장은 과거의 사실을 채하에게 가감 없이 말해주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백재영의 눈에 그녀가 들어온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고, 두 사람은 만남을 갖게 되었다.
당연히 사랑이라 믿었던 그녀는 백재영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결혼을 원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 고백에 돌아온 것은 매몰찬 반응과 싸늘한 거절이었다.
거기에 그간의 시간을 환산한 수표 몇 장. 그것이 그녀에게 남겨진 전부였다.
자기 발목 잡지 말고 아이를 당장 지우라는 말은 덤이었고.
그럼에도 차마 그녀는 아이를 지울 수 없었다.
망나니 같은 백재영의 아이라도 그녀에겐 소중한 생명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 것을 알기라도 하듯, 손안의 모래처럼 허망하게 그녀를 떠나갔다.
살아갈 이유를 전부 잃은 그녀는, 파도 속에 몸을 던졌다.
“아버지는 세상에 진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그냥 사고라고 주변에 둘러댔죠. 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또…….”
정 실장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채하를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은 한없이 쓸쓸해 보였다.
“당시에는 부사장님께서 백영과 연을 맺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었죠.”
“그야말로 헛소문이었습니다.”
“압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어요. 평생 채운에 몸 바치신 분 아니십니까. 권 회장님의 친우였기도 하고요.”
“설마…….”
“예. 아버지께선 혹여 이 일이 채운에도 누를 끼치게 될까 봐서 입을 다무셨던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간 정 비서에게서 입수한 정보가 어딘가 늘 핵심에 닿지 못하고, 빙빙 돈다는 느낌을 받았었던 게 이런 이유였다니.
채하가 힘겹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왜 제게 이런 얘길 하시는 겁니까? 정 비서님이 아시면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요.”
“저는 아버지랑 다르니까요.”
한없이 가라앉는 듯하던 정 실장의 목소리에 문득 힘이 실렸다.
“저는 진실이 묻히길 바라지 않습니다. 백재영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이니까요.”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갔기에, 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더욱 뜻밖의 말을 정 실장이 꺼냈다.
“부사장님. 작은 사모님의 일도 백사라 쪽만 파지 마십시오. 그래선 절대 꼬리를 잡지 못할 겁니다.”
“그 말은…….”
“예. 진짜 꼬리는 아마 백재영일 겁니다. 그쪽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셔야 할 거예요.”
실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백재영, 백사라. 두 남매는 사이가 안 좋기로 재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만 해도 사라 코스메틱을 설립하는 문제며, 리조트 부지며, 이래저래 트러블이 많았다 들었고.
그런 채하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정 실장이 더욱 큰 힌트를 던졌다.
“생각해보십시오. 오히려 그 남매가 철저히 이득 관계로 움직이는 사이였다고 한다면요?”
“……그렇군요.”
이제야 채하도 서서히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흔하고 평범한 남매간의 정 따위가 아닌, 모종의 거래가 둘 사이에 있었다면.
둘의 사이가 워낙 좋지 않아 접점을 아예 짐작하지 못했던 것은, 나름 허를 찌른 셈이었다.
어쩐지 백사라와 허영주의 뒤를 팠을 때 나온 게 별로 없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오래전 마주쳤던 시시껄렁한 백재영의 모습을 떠올리니, 채하의 가슴에 불길이 일었다.
그때도 설원을 두고 얼굴이니 몸매니 이러쿵저러쿵했던 놈이었다.
워낙 딸 가진 부모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인간이라, 채하 또한 무시하고 지나갔었다.
그 망나니 같은 놈이 설원의 사고와 관련이 있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모조리 갈아 마셔줄 것이었다.
권채하의 세상에서 민설원을 사라지게 한 인간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