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키스, 키스, 또 키스
(49/111)
49. 키스, 키스, 또 키스
(49/111)
49. 키스, 키스, 또 키스
2023.01.18.
“괜찮아? 당신, 괜찮은 거야?”
간절히도 물어오는 그의 시야에는, 설원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겨우 대답을 쥐어 짜내자, 그제야 채하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마치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안도한 것처럼.
팔을 붙들고 있던 그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설원 씨! 무슨 일이에요?”
놀란 쌍둥이 엄마가 재빨리 이쪽으로 헤엄쳐 왔다.
모래사장 쪽에서도 다들 일어선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놀랐을까 싶어 설원은 채하의 젖은 팔을 톡톡 쳐 돌아가잔 의사를 전했다.
“……다행이야.”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중얼거린 채하가 이번에는 힘 있게 설원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앞장서 물가에서 빠져나갔다.
단호함이 담긴 그 행동을 저지할 수 없어 설원은 손을 잡은 채로 그의 등을 보며 걸었다.
다리에 닿아 첨벙대는 물살이 그녀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가 방금 보인 행동의 이유.
아마도 그는 설원이 정말로 방파제에서 떨어져 사고를 당했을 거라 믿고 있을 터였다.
과민반응이 아니라면,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권채하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었다.
왜인지 고맙다고 말하고 싶기도 하고, 미안하다 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지금은 적절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설원은 채하의 손을 힘주어 꼬옥 잡는 것으로 대신했다.
“엄마, 괜찮아요?”
“응. 우주야. 엄마 다친 거 아니야. 엄마도 우주처럼 물에서 놀았어~.”
제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우주를 보며 설원이 안심하란 듯 미소를 지었다.
그 옆으로 동그랗게 둘러앉은 세쌍둥이들도 저마다 동생을 위해 한마디씩 말을 얹었다.
“우주네 아빠가 구하러 갔잖아. 왕자님 같았어!”
“그래. 우주야. 저렇게 멋진 아빠가 있어서 좋겠다!”
“왜 대왕 아빠인지 알겠어!”
“얘들아. 여기 진짜 아빠 서운하다. 이렇게 너희들 주려고 열심히 고기 굽고 있는데~ 왜 난 멋진 아빠라고 안 해 주냐.”
정 실장이 툴툴대자 쌍둥이 엄마가 등짝을 때리며 고기나 더 구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해가 저물 무렵, 그들은 캠핑의 꽃인 바비큐 파티를 즐기는 중이었다.
“응. 봄이 누나, 여름이 누나, 가을이 누나! 우주 대왕 아빠 최고야.”
대왕 아빠의 유래를 아이들이 착각해준 덕분에, 다행히 우주도 자연스레 넘어갔다.
아이들이 넷이나 있으니 침묵이 찾아올 틈도 없었다.
게다가 정 실장은 캠핑 다 경력자여서 그런지 고기 굽는 솜씨도 무척 훌륭했다.
“맛있네요. 정말 잘 구우셨어요.”
설원이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네자 정 실장이 땀을 닦으며 헤헤 웃어 보였다.
“다 우리 부사장님이 사주신 고기 아니겠습니까. 전부 특상품으로…….”
“부사장이라고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부사장님을 부사장님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겠어요.”
“그, 음…….”
채하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눈치 빠른 쌍둥이 엄마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우주 대왕 아빠! 맞죠? 우주 대왕 아빠라고 불러요. 여보.”
“아아~ 그 뜻이셨구나! 하하하. 그럽시다.”
사실은 그냥 ‘우주 아빠’로 불리고 싶었겠지만, 채하도 차마 그렇게까진 할 수 없던 모양이었다.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곤, 그는 잘 구운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우주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기새처럼 오물오물 고기를 받아먹는 우주의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설원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때 입술 위로 따뜻한 감각이 느껴졌다.
“……?”
“자, 이건 당신 거야.”
“아……. 고마워요.”
설원에게 고기를 먹여주는 채하의 모습을 정 실장 가족이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도 보는 것처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이런 캠핑의 밤이 처음인 설원으로서는 사소한 것마저 설레었다.
“엄마. 우주 딸기 사탕 어디 있어요?”
바비큐가 다 끝나갈 무렵 우주가 불쑥 설원을 향해 물었다.
저번에 허영주가 와서 멋대로 안기고 간 과자 꾸러미 속에 들어 있던 사탕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딸기 사탕 텐트에 있는데. 왜? 우주 지금 먹고 싶어?”
“응! 누나들하고 나눠 먹고 싶어요~.”
“그럼 엄마가 가져다줄게.”
우주의 기특한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설원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아주 자연스럽게 채하가 뒤따라 일어섰다.
“같이 가지.”
“네?”
“벌써 이렇게 어둡잖아. 텐트까지 혼자 가긴 위험해.”
“…….”
설원은 눈앞에서 왠지 싱글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정 실장 부부와, 불과 스무 발짝도 떨어져 있지 않은 텐트를 번갈아 보았다.
위험하다고 표현하기엔 부적절한 거리였다.
하지만 아까의 일도 있고 해서 설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야. 엄마랑 아…… 대왕 아빠, 사탕 가지고 올게.”
“응!”
“다녀오세요.”
사탕을 가지러 가는 둘의 모습을 정 실장 부부는 연신 싱글대며 바라보았다.
이윽고 두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쌍둥이 엄마가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당신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열심히 고기 구워준 남편 서운하게?”
쌍둥이 엄마가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도록 남편을 향해 속삭였다.
“아니, 옆에서 보면서 뭐 느낀 거 없냐고.”
“뭘?”
“저 두 사람. 좀 어색한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나더러 분위기 띄워주라며.”
“그랬지. 많이 어색하지? 미안하게 됐…….”
“아이참! 답답하네. 저 둘. 눈빛만 봐도 절절하게 서로 사랑하는 게 느껴지잖아.”
“아아…… 그 뜻이야? 그건 좀 깊은 사정이 있어서. 당신도 알다시피 작은 사모님이…….”
“알아. 아는데, 뭔가 내 예감엔 설원 씨도 부사장님을 못 잊은 게 틀림없어!”
쌍둥이 엄마가 남편에게 손나팔을 만들어 붙이곤 더욱 은밀하게 중얼거렸다.
곧 두 사람의 시선이 불에 앙증맞은 손을 쬐고 있는 우주로 향했다.
“우주야.”
“네?”
“우리 재미있는 놀이 해 볼까?”
“재미있는 놀이요? 좋아요! 우주 할래요!”
상기된 뺨으로 우주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귀여운 승낙에 쌍둥이 엄마는 얼른 이 놀이의 내막을 전해주었다.
“어? 우리 우주는요?”
자리로 돌아온 설원이 텅 빈 우주의 의자를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세쌍둥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냉큼 저쪽을 가리켰다.
“우주가 반딧불이를 찾으러 갔어요. 저기, 저 숲속으로요!”
“숲속?”
어안이 벙벙해진 설원과 채하가 그들이 가리킨 쪽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거기 있는 건 낮에 보았던 해변 뒤로 자리한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다.
쌍둥이 엄마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 숲에 반딧불이가 많거든요. 그 얘기를 해줬더니 냉큼 달려가 버렸네요. 안 그래도 지금 저희가 따라가 보려던 참이었는데, 두 분이 오셨으니 얼른 같이 가보세요. 멀리는 안 갔을 거예요.”
청산유수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말에 세쌍둥이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수상했지만,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설원과 채하는 숲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숲 안으로 한참 걸어들어왔음에도 우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꼬마가 안 보이는군. 애초에 온 건 맞는 건가?”
“혼자서 이런 데 오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이상해요. 다시 가서 물어봐야겠어요. 어……?”
발길을 돌리려던 설원의 눈에 문득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반딧불이?”
길고 울창하게 드리운 나무들 사이를, 반딧불이들이 춤추듯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밤하늘의 별처럼 가득했다.
이토록 예쁜 자연의 불빛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거기다 숲 안으로 들어오니 해변의 파도 소리가 꼭 소라껍데기에서 나는 것처럼, 아득하고도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냈다.
무척이나 낭만적인 밤의 풍경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주는 이곳에 없었다.
정 실장 부부가 꾸민 작은 계략임이 분명했으므로.
그 사실을 깨달은 설원과 채하는 반짝반짝 떠다니는 반딧불이에서 서로의 눈으로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곧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의 입가에서 동시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혹여 우주가 위험에라도 처했을까 걱정했는데, 긴장감이 탁 풀린 탓이었다.
또한 이 지나칠 정도로 로맨틱한 풍경 덕분이기도 했다.
“……민설원.”
마주친 채하의 눈빛이 깊은 밤하늘처럼 까맣게 번졌다.
순간 설원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걸어오느라 이미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에도 채하는 훅 거리를 더 좁혀왔다.
내쉬는 숨결이 설원의 이마에 더운 온기를 불어넣을 만큼.
눈을 마주친 채로 채하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 속엔 아까 바닷가에서처럼, 그녀밖에 없었다.
“사랑해.”
“…….”
“당신을 다시 만나면, 가장 하고 싶던 말이었어.”
사랑한다…….
채하의 입으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영원히 들을 리 없다 여긴 말이기도 했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진심을 알고픈 마음이 그보다 컸다.
그래서 설원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질문을 이 순간 꺼내고 말았다.
“권채하 씨는…… 날 사랑하지 않았잖아요. 사랑한 적, 없잖아요. 우린 진짜 부부가 아니었는데.”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채하는 빠르게 눈치챘다.
반딧불이가 뿜어내는 미약하면서도 아름다운 불빛이, 위로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를 환하게 밝혔다.
“드디어 기억이 돌아왔군. 아니, 이제야 솔직해졌다고 해야 하나.”
숨을 작게 몰아쉬곤 설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거짓말이었어요. 당신을 모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민설원. 당신 입으로 들으니 더욱 기쁜걸. 그리고.”
성큼, 이젠 더 좁힐 수도 없을 만큼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내가 비록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설원의 눈이 반딧불이만큼이나 아련하게 빛을 뿜어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설원은 그저 이 순간 가슴에 가득 차오른 것을 내뱉었다.
“채하 씨…….”
“드디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네.”
“나는…….”
달싹거리는 입술 위로 순식간에 따스한 것이 내려앉았다.
당연하지만 그건 채하의 입술이었다.
다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한없이 달콤한 향을 내는 무언가가 그의 입술을 타고 그녀에게로 전해졌다.
“아…….”
두 사람이 방금 텐트에서 가져온 우주의 딸기 사탕이었다.
이윽고 사탕의 향과 채하의 향이 뒤섞이며 설원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설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채하가 부드러운 입술을 사탕처럼 굴리며 본격적으로 그녀를 머금었다.
촉촉한 입술을 열고 이내 젖은 숨결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너무도 달큰한 감각이었다.
입에 물고 있는 게 사탕임이 분명한데도, 아찔한 것이 꼭 취해버릴 것만 같았다.
맞물린 입술 새로 오가는 숨결이 너무도 다정하면서 따스했다.
매끄러운 움직임에, 설원은 저도 모르게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의 목에 둘렀다.
키 차이가 현저히 나는 바람에 설원의 그 행동은 두 사람의 몸이 더욱 밀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부드러운 입맞춤은 완전히 돌변했다.
가느다란 설원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고, 채하는 그녀에게로 더욱 깊이 몸을 숙였다.
마치 삼켜버릴 것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취해버릴 것처럼.
진하고도 깊은 입맞춤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반딧불이가 춤추는 숲속에서 두 사람은 키스하고,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지난 5년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