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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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확신
2023.01.15.
언제 나를 기억해 줄 거냐…….
참으로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물음이었다.
그렇기에 설원은 아무런 대답도 꺼낼 수 없었다.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처음부터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꽁꽁 봉인해둔 마음을 한번 입 밖으로 꺼내고 나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5년 전 그의 곁을 떠나야 했던 아픈 날들로.
권채하라는 남자를 가장 사랑했던 이별 직전의 시간으로.
그래서 설원은 또다시 마음을 깊숙이 숨겼다.
너덜너덜해진 심장이라도 부여잡고 살아가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 올라가 볼게요. 우주가 아마 깨어 있을 거예요.”
“나도 같이 올라가.”
“아니에요. 지금은 우주랑 둘이서만 있고 싶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네. 쉬어요.”
쉬다니, 제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두 사람이 힘들어하는데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채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겨우 조금 좁혀졌나 싶었던 거리가 허영주의 방문으로 다시 멀어져 버렸다.
이쯤에서 또 무언가 돌파구가 될 만한 게 필요할 것 같았다.
뜻밖에도 그 돌파구를 제시한 건 정 실장이었다.
“캠핑……?”
“네. 부사장님. 우주가 다 나았다면서요? 며칠 못 놀았으니 심심할 겁니다. 지난번엔 비 오는 바람에 기대했던 소풍도 못 가지 않았습니까~ 아마 캠핑을 가자고 하면 무척 좋아할 겁니다.”
“캠핑. 캠핑이라…….”
“제가 애들 데리고 자주 다녀봐서, 좋은 데를 알아요. 그리고…….”
부사장실 안임에도 신중하게 눈치를 살피며 정 실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찌라시 기사는 곧바로 내리게 했지만, 암암리에 회사 안에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럴 때 오붓하게 가족 캠핑을 가면 괜한 소문이 불어나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기에 채하는 곧바로 수락했다.
정 실장에게 캠핑 장비는 하나도 빠지지 말고 아낌없이 준비하라는 지시와 함께.
물론 비용의 출처는 채하의 한도 없는 카드였다.
“와~ 바다다, 바다!”
“이야, 신난다!”
“바다에서 물고기 잡을래!”
남해안의 자그마한 해변, 함성과 함께 우르르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익숙지 않은 상황에 설원의 정신이 금세 혼미해졌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뇽하세요~.”
“아, 안녕…….”
나란히 서서 꾸벅 90도로 인사를 하는 정 실장의 아이들은 무려 세쌍둥이였다.
그것도 전부 여자아이.
덕분에 설원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우주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다래졌다.
“엄마! 똑같은 누나들이 세 명이나 있어요.”
“쌍둥이 누나들이야. 우주야.”
“하하. 똑같이 생겨서 구분하기 힘드시겠지만, 성격은 다 다르답니다. 왼쪽부터 봄이, 여름이, 가을이에요. 8살이죠.”
“어머. 이름이 사계절이네요.”
설원의 감탄에 짐을 내리다 말고 정 실장이 불쑥 히죽대며 끼어들었다.
“아직 미완이죠. 겨울이가 하나 더 있어야 하니까요. 아들 이름으론 겨울이가 안 어울릴 것 같아서 고민입니다.”
“저이는 낳을 생각도 없는데 무슨 주책이람. 어쨌든 반가워요. 부사장님 부부 말씀은 많이 전해 들었어요! 전 그냥 편하게 쌍둥이 엄마라고 불러주세요.”
동글동글 유한 인상의 부인이 숨김없는 반가움을 드러냈다.
이어 그녀가 능숙하게 아이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자, 너희들은 여기 귀여운 동생이랑 놀고 있어.”
“네에~!”
“네!”
“넵!”
일사불란하게 세쌍둥이가 우주의 손을 붙들고서 모래사장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우주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졌다.
“여자애들끼리만 놀다 보니, 남동생이 신기한가 봐요.”
“그러니까 우리도 남동생 하나 더 낳…….”
“아, 당신은 조용히 하고 짐이나 내려요! 당신이 낳나? 내가 낳지!”
“당신도 참~ 같이 낳자는 거지.”
잠시 후, 차를 세우러 갔던 채하가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뜨거운 여름 햇빛 아래 손으로 차양을 드리운 그의 얼굴엔 감탄이 담겨 있었다.
“정 실장님. 용케 이런 곳을 알아냈군요. 조금 안쪽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이렇게 조용할 줄이야.”
“그렇죠? 이 정도면 거의 전세 낸 거 아닙니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정 실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대로 이곳은 완전히 보물 같은 장소였다.
뒤로 조성된 소나무 숲이 바깥쪽 해변과의 연결을 차단해, 아예 별개의 구역이나 다름없었다.
“넉넉하게 텐트를 쳐도 될 겁니다. 저희야 뭐 아이들이 많아서 늘 초대형 텐트지만요.”
정 실장이 이미 모래놀이에 한창인 아이들을 향해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우주도 누나들을 따라 폴짝폴짝 맨발로 모래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설원의 입가도 절로 부드러워졌다.
입가가 풀어진 건 설원뿐만이 아니었다.
채하 역시 우주가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꼬마가 신난 것 같군.”
“네. 원래 살던 섬은 워낙 작아서 이렇게 넓은 해변은 없었거든요.”
“하긴, 정작 꽃 페스티벌 때도 바빠서 바닷가엔 못 들렀지. 신날 만하겠어.”
즐거워하는 우주를 물끄러미 보다 보니, 설원도 괜스레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았다.
캠핑 같은 건 가족들끼리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는데, 설마 그와 함께 오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 아이들 놀고 있을 동안 텐트부터 칠까요.”
“그러죠.”
“보자. 이쯤이 좋겠네요.”
정 실장이 자리를 가늠하자, 채하가 자연스럽게 준비한 텐트를 가지고 왔다.
“어? 부사장님께서 직접 하시려고요? 놔두세요! 제가 할게요. 처음 해 보시면 어려우실 겁니다. 은근히 힘들어요.”
“됐습니다. 무슨 여기까지 와서 부사장입니까. 똑같은 아빠들끼리.”
“진짜로 어려울 텐데요.”
정 실장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뒤에 서 있던 부인은 생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할 수 없이 설원이 나섰다.
“그럼 저도 도울게요.”
“아니야. 당신한테 이런 일을 시킬 순 없지. 편하게 같이 쉬고 있어.”
“그래도…….”
말문이 막혀 입술을 달싹거리자, 쌍둥이 엄마가 설원의 손을 냉큼 잡아 이끌었다.
“자자. 작은 사모님은 이쪽으로 오세요.”
“아. 편하게 불러주세요. 저도 이런 곳까지 와서 그런 호칭은 좀 어색해요.”
“그럼 설원 씨라고 해도 될까요? 안 그래도 이름이 너무 예뻐요.”
“네. 물론이에요.”
“좋아요. 설원 씨. 그럼 우리는 그동안 해수욕이나 할까요?”
“네? 해수욕……?”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하늘에 뜬 해와 눈부시게 빛나는 바닷가를 번갈아 가리켰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바다에 왔으니, 당연히 물에 들어가야죠! 마침 설원 씨네 예쁜 아드님이 우리 말괄량이들의 시선을 잡고 있을 때요.”
“아아…….”
사실 해수욕 같은 걸 할 생각은 전혀 없던 설원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고 싶은 쌍둥이 엄마의 심정을 차마 모른 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승낙이 떨어지자 얼굴이 해님만큼이나 밝아진 그녀가, 곧 과감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자, 벗어요. 벗어.”
“어엇?”
억척같은 손길이 민소매 위에 두른 설원의 얇은 셔츠를 재빠르게 벗겨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 쌍둥이 어…… 어머님?”
“물속에 그 셔츠 입고 들어갈 거 아니잖아요. 어디 보자. 바지도 너무 기네.”
후루룩, 무릎까지 오던 청바지가 그녀의 과감한 손길에 의해 허벅지 위까지 훅 올라갔다.
뽀얀 허벅지가 햇빛 아래 드러나자 설원은 괜히 부끄러워 주춤거렸다.
“어머. 설원 씨, 이름이 그래서 그런가. 피부가 어쩜 이렇게 뽀얘요~ 원래 잘 안 타나 보다. 그쵸?”
“아, 네…….”
“잘됐네요. 귀찮게 선크림 바를 필요도 없으니, 바로 가죠!”
그야말로 여장부 같은 기세에 휘말려 설원은 졸지에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채하는 힘들게 텐트를 치고 있을 텐데, 저만 노는 게 미안해 설원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바다와 자유 앞에서 신난 쌍둥이 엄마를 이길 수는 없었다.
“아유~ 시원해라!”
“아이들도 데리고 오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휴. 놔두세요. 애들까진 우리 둘이서 힘들어요. 텐트 다 치고 나면 애 아빠들한테 같이 데리고 오라 하면 돼요. 그보다 빨리 들어와서 발 담가봐요. 진짜 시원해요.”
“네에…….”
일리 있는 설득이었음에도, 설원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우주는 세쌍둥이들과 거대한 모래성을 만드는 일에 흠뻑 몰두 중이었다.
“수영을 잘하시나 봐요.”
제집처럼 물가를 좋아하는 쌍둥이 엄마를 보며 설원이 말을 건네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학생 때 수영 선수였거든요. 설원 씨는요?”
“전 수영은 조금밖에 못 해요.”
“그래요?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여긴 그렇게 깊지 않거든요. 파도도 거의 없고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열심히 발을 첨벙댔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 모습에, 조심스레 설원도 샌들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기분 좋은 시원함이 발끝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곤두서 있던 긴장을 풀어주었다.
“어때요, 좋죠? 물도 정말 깨끗하고.”
“그러네요.”
요 며칠 사실 가슴에 돌이 얹힌 듯 답답한 기분이었다.
허영주가 다녀간 이후론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를 불안감과, 우주를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잠들기가 어려워 한참을 뒤척이다, 늘 제 쪽을 향해 잠들어 있는 채하의 얼굴을 보며 겨우 잠을 청하곤 했던 요즘이었다.
그런 만큼 이런 일상의 휴식이 반갑게 여겨졌다.
물살을 따라 천천히 발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아슬아슬 허벅지 위까지 물이 차올랐다.
바지 밑단에 바닷물이 곧 닿을 것 같아, 조금 더 위로 접으려던 찰나였다.
멀리서 날카로운 외침이 고막을 찢을 듯 허공을 갈랐다.
“민설원!”
사람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 마치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외침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설원이 휙 하고 뒤를 돌아보자 물속으로 냅다 뛰어드는 채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무어라 만류할 새도 없었다.
첨벙첨벙, 요란하게 물결치는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이어 다급하고도 애타는 손길이 이쪽을 향해 뻗어왔다.
단 몇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민설원!”
어느새 다가온 그가 설원의 가녀린 두 팔을 덥석 잡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은 완전히 하얗게 질린 채였다.
“……권채하 씨?”
설원은 옷이 다 젖은 줄도 모른 채 물속에 서 있는 채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팔을 붙든 커다란 손보다도 더 세차게 떨리는 눈동자.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온 사람처럼, 그의 눈빛엔 절박함이 그득했다.
설원이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괜찮아? 민설원! 괜찮냐고!”
그렇게 묻는 그야말로 조금도 괜찮지 않아 보였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설원의 가슴 속에는 세찬 파도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근본적이면서도 본능적인 의문이었다.
말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거짓으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결코 거짓되게 꾸밀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한다.
우습게도, 순간 설원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어떤 목적도 없이 순수하게, 권채하는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