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흔들리는 마음
(47/111)
47. 흔들리는 마음
(47/111)
47. 흔들리는 마음
2023.01.11.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강한 충격이 설원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채하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다고……? 저 권채하가?
놀랄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심 원장은 설원에게 그간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늘 어머니의 상태에 촉각을 기울였다고 했다.
병원에 있던 3년 내내 어머니의 생신을 챙겼고, 돌아가신 후에는 매년 기일까지 챙겼다고.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당연한 질문이 돌아오자, 심 원장이 머쓱하게 안경을 치켜올렸다.
“작은 사모님께서 아시면 불편해하실 거라고요. 보세요.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불편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의 감정은 그랬다.
하나 심 원장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과거의 두 사람은 철저히 거래 조건이 있는 계약관계였다.
그 가장 큰 조건이었던 설원의 어머니에 대한 일이었으니, 이런 진실을 그때 알았다면 분명 이상하게 여겼으리라.
“자, 일단 올라갈까요? 아이 상태를 봐야지요.”
“네…….”
“그리고 이번에는 작은 사모님께서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제가 이걸 말씀드린 걸 알면, 경을 칠지도 모르거든요.”
허허 너스레를 떨었지만, 심 원장의 표정은 어딘가 홀가분해 보였다.
그에게서 전해 들은 이 뜻밖의 사실에, 설원은 정작 물으려던 것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미친 듯이 흔들리는 마음뿐이었다.
권채하, 자신의 계약뿐인 남편을 향한.
“뭐? 윤 실장! 지금 뭐라고 했어?”
허영주의 호통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아, 윤 실장은 두 귀를 반쯤 틀어막았다.
“우주가 감기에 걸렸답니다.”
“뭐? 감기? 왜!”
“전들 알겠나요.”
“상태가 어떤데? 어?”
“저도 모르죠. 부사장님이 휴가를 내셨다길래 왜인가 알아보니 아이가 아파서 그렇다는군요.”
“아프다고…… 그 아이가…….”
부들부들 허영주의 두 손과 눈동자가 함께 떨렸다.
곧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윤 실장에게 제 의사를 전달했다.
“가자.”
“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윤 실장은 토 달지 않고 냉큼 수긍했다.
어차피 제 주인을 말릴 도리는 없었으니까.
다만 우려되는 건 제 주인만큼이나 어려운 사람의 반응이었다.
“뭡니까?”
그 어려운 남자, 권채하가 도어 화면 너머부터 냉기를 뿜으며 정색을 표했다.
허영주가 윤 실장을 화면 가득 밀어 넣었음에도, 그는 이미 뒤에 누가 있는지 다 파악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할 수 없이 윤 실장은 허영주에게 눈짓을 했다.
이곳에 온 용건을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 문을 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허영주는 늘 그랬듯 대뜸 고함부터 질렀다. 그것도 평소보다 더 포악하게.
“엄마가 왔는데 문도 안 열어주는 거냐? 어?”
“…….”
“빨리 열어!”
“……하.”
결국 문이 열리기는 했다.
하지만 윤 실장과 허영주는 현관을 넘지 못하고 다시금 장벽을 맞닥뜨려야 했다.
한없이 싸늘한 표정으로 채하가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왜 찾아오신 겁니까? 연락도 없이 이렇게 무작정 오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채하의 시선이 윤 실장을 향하자 윤 실장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허영주의 막무가내 행동은 그가 해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에.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허영주는 아들을 피해 달아나듯 2층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뒤에서 들려오는 채하의 호통에, 허영주는 더 큰 호통으로 받아쳤다.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우리 아가 보러 온 거지!”
“…….”
“…….”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윤 실장이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아내곤,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아가…….
그 말에 채하는 어이가 없어 하, 하고 나직한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어머니를 따라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우주를 간호 중이던 설원은 대뜸 나타난 허영주 때문에 심장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정작 허영주는 설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침대로 달려와선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우리 예쁜 아가!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야, 응?”
“아, 저…….”
“세상에, 이 열 좀 봐! 넌 대체 뭘 한 거냐, 엄마가 되어서!”
“어머니!”
서슬 퍼런 채하의 음성이 등 뒤에 꽂히자 허영주가 움찔 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올라온 채하가 눈빛으로 당장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난 윤 실장은 아예 이 방엔 얼씬도 하지 않은 채였다.
“집사람한테 함부로 굴지 말고 당장 나가세요.”
“뭐? 내가 언제 함부로 굴었다고 그래? 아가가 이렇게 아프니까 그렇지!”
“많이 나았으니까 괜한 소동 벌이지 말고 얼른 돌아가세요.”
성큼성큼 허영주의 곁으로 다가온 채하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때였다.
쫓겨나기 일보 직전의 위기에 처한 허영주에게 빛이 당도했다.
“으응…….”
“아, 아가야! 우리 아가!”
침대 밖으로 꼬물꼬물 나온 우주의 작은 손을, 허영주가 덥석 붙들었다.
그러자 우주가 눈을 더 번쩍 뜨고는 제 손을 잡은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예쁜 할머니……?”
“그래! 나야. 아이고, 아가! 괜찮니? 안 아파? 응?”
요란법석을 떨고 있는 허영주를 보며 설원은 연신 곤란한 표정으로 뒤에 서 있었다.
그녀가 어린이집에 찾아갔던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우주가 허영주를 알아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우주가 그녀를 제법 반가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채하가 멈칫하게 만들 만큼.
“예쁜 할머니. 우주는 괜찮아요.”
“괘, 괜찮아?”
“네. 우주 아파서 보러 오신 거예요?”
“당연하지! 이 할머니가 우리 아가가 아프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우주 이제 많이 나았어요. 예쁜 할머니.”
꼬옥, 허영주의 손을 잡으며 우주가 대견하게도 그녀를 안심시켰다.
우주의 얼굴을 보니 채하와 설원은 무어라 끼어들 수가 없었다.
다만 지나치게 감동받은 허영주는 아이의 손을 붙들고 거의 눈물을 흘릴 판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타이밍에 등장한 윤 실장이 채하 대신에 그녀를 일으켰다.
“자자, 사모님. 일어나시죠. 아이가 놀라겠어요.”
“윤 실장…….”
“자다 깬 것 같은데, 푹 자야 낫지 않겠습니까. 내려가시죠.”
“그, 그래야지…….”
허영주가 미련 가득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우주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남은 미열 탓에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저를 향해 환히 웃어주는 아이가 사랑스럽기만 했다.
사랑스러워서, 아주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기껏 거실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나 싶었건만, 허영주는 소파에 앉자마자 시퍼런 눈을 하고 설원을 노려보았다.
“너 여기 돌아오기 전에 섬에서 살았다며. 남자가 있었다는데, 사실이니?”
“어머니.”
이제 채하의 목소리는 거의 바닥을 뚫어버릴 기세였다.
아예 작정했는지, 허영주는 아들을 완전히 무시하곤 설원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설원은 굳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너, 솔직히 말해! 기억 안 난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아이를 보셨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웬만하면 아이 앞에 자꾸 나타나지 마셨으면 해요.”
“내가 왜? 그 아이, 엄연히 채하 아들이고 채운 가의 손자야!”
“…….”
거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언제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둥, 한 대 쥐어박겠다는 둥 그러더니 완전히 딴소리를 하고 있는 제 주인을 보며 윤 실장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채하가 무어라 일침을 가하려던 찰나였다.
허영주가 먼저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이번에 무슨 축제에서 이름 좀 알렸다며? 너 옛날부터 꽃 좋아했잖아. 이참에 공부를 해 보면 어떻겠니, 응?”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유학 보내줄게. 돈은 얼마가 들든 걱정하지 말고 대줄 테니까, 원하는 대로 공부해. 아이는 여기 두고 가고. 우리가 잘 키워줄 테니까…….”
“어머니! 당장 나가세요! 자꾸 헛소리하시면 저도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채하의 벼락같은 호통에 허영주의 입이 겨우 다물어졌다.
동시에 창밖을 보고 있던 윤 실장이 냉큼 눈을 돌려, 그녀를 끌고 나갈 채비를 했다.
두 눈을 끔벅이면서도 허영주는 말을 더 잇고 싶은 눈치였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쫓겨날 것은 자명했다.
윤 실장은 허영주를 질질 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 등 뒤로 설원의 침착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전 우주를 두곤 어디에도 못 갑니다. 우주는, 제 아이예요. 누구의 아이도 아닌 제 아이요.”
한없이 차분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 서린 분노만큼은 윤 실장마저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위기를 느낀 윤 실장은 허영주가 헛소리를 더 늘어놓기 전에 현관을 빠져나왔다.
“아, 이거 놔! 놓으라니까? 윤 실장!”
“사모님. 이러시면 저 일 못 합니다. 얌전히 병문안만 하고 가겠다고 하셨잖아요?”
“얌전히 했잖아.”
“아니죠. 이게 어딜 봐서 얌전히예요? 완전히 작은 사모님한테 선전포고를 던지고 온 건데!”
“내가 뭐 못 할 말이라도 했어? 저 애가 내 손자인 건 사실이잖아!”
“네네. 그렇죠. 작은 사모님 아들인 건 더더욱~ 명백한 사실이고요!”
윤 실장의 지적에 허영주가 눈을 흘겼다.
늘 그랬듯 윤 실장은 전혀 기죽지 않고, 따끔하게 지적을 날렸다.
“저번에 어떻게 아이를 데려오냐는 둥 하시던 말이 설마 그냥 해 본 말이 아니셨을 줄이야. 제가 물렀네요. 물렀어요.”
“윤 실장. 도움도 안 될 거면 잔소리하지 마.”
“우리 허 여사님께서 갑작스레 손주 욕심이 발동하실 줄 미처 예상 못 한 제 불찰이죠. 암요.”
“아, 시끄러워! 걔가 보통 손주야? 윤 실장도 봤잖아! 그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욕심이 안 나냐고!”
두 사람이 대문을 떠나지 못하고 설왕설래하는 사이, 설원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허영주는 정말이지 처음 만난 8년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제가 채하의 곁에 머물려 해도, 그녀는 절대 눈뜨고 그 꼴을 보지 않을 것이다.
지금만 봐도 우주만 내놓고 떠나라는 말을 당당히 하지 않았던가.
“미안해. 다음부턴 아예 문도 안 열어줄게.”
“…….”
“걱정하지 마. 당신이 우려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이마 위로 듣기 좋은 목소리가 와 닿아, 설원은 그제야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무채색의 테이블로 가득 차 있던 시야에 이내 채하의 듬직한 눈빛이 담겼다.
이어 그녀의 두 손을 그의 커다란 손이 감쌌다.
마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우주하고 당신은 내가 지켜. 약속했잖아.”
“권채하 씨…….”
하염없이 흔들리는 눈망울을 들킬까 싶어 설원은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정말로 들키고 싶지 않은 건 흔들리는 제 마음이었다.
자꾸만 그의 곁에 머물고 싶어지는 마음을, 우주와 셋이서 함께 살아가고 싶어지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숨겨야 했다.
하나 그런 설원을 더욱 자비 없이 헤집는 채하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지독할 정도로 느른하고 유혹적인 목소리였다.
동시에 이상할 만큼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민설원. 언제 나를 기억해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