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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열병 (46/111)


46. 열병
2023.01.08.



“그…… 혹시 백사라 양일까요?”

뜻밖에도 정 실장 쪽에서 먼저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평소 밝기만 하던 그의 낯빛엔 왠지 모를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뭐 그럴 가능성이 지금으로선 제일 크겠죠. 아, 아내한테는 말하지 마십시오.”

“네? 하지만…….”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최대한 모르게 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내 아내를 온실 속 화초처럼 보호하기에도 모자랄 때라서.”

“하긴 그렇죠.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그런데 저…….”

정 실장이 슬쩍 채하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네. 뭡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했으나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해서 뒷말을 재촉하는 대신 채하는 그에게 일단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물론, 법적 대응은 확실하게 준비해 주시고요.”

“네?”

“대응하지 않겠다는 건 개인적으로라는 뜻이지, 공적으로까지 가만히 있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배후를 추적하세요.”

그 말에 정 실장의 어둡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부사장실을 나가자 채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예상한 일이었지만, 역시나 공격하는 방식이 더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의 권채하가 아니었다.

설원에게 던져지는 돌은 모두 그가 기꺼이 맞을 작정이었다.


 


“권채하 씨?”

“이젠 권은 빼고 채하 씨라고 불러줄 때도 되지 않았나.”

“…….”

상체 위로 묵직하게 실린 무게감에 설원의 대답은 이어지지 못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채하가 거실로 성큼 걸어와 저를 껴안았기 때문이었다.

술 냄새를 풍기는 것도 아니었으니 분명 제정신인데, 평소와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무 일 없어.”

“그런데 왜…….”

설원의 가녀린 한쪽 어깨에 채하가 더욱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다.

얇은 여름옷 탓에 간지러운 나머지 설원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자 채하가 두 팔로 두르고 있던 그녀의 허리를 더욱 바짝 옭아맸다.

완전히 밀착된 자세가 낯 뜨거워, 다시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채하의 뜨거운 숨결이 어깨를 간지럽혔다.


“남편이 아내를 무슨 일 있어야만 껴안는 건 아니잖아.”

“피곤해 보이는데 얼른 올라가서 자요. 우주도 잠들었어요.”

“우주가 벌써 잠들었다고?”

“네. 어린이집 갔다 오자마자 살짝 감기 기운이 있는 거 같길래, 일찍 재웠어요.”

“흠. 우리 꼬마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일단 좀 떨어져서 얘기해요. 간지럽단 말이에요.”

더는 견디지 못한 설원이 채하를 밀어내려 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입술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어깨 위에 새겨지는 것 같아, 저절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채하는 떨어지기는커녕 더 찰싹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왜 이래요……?”

어처구니가 없어 설원이 중얼거리자, 채하가 이 밀착의 이유를 밝혀왔다.


“감기 걸리면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추워. 민설원. 오늘도 당신 껴안고 자야겠어.”

“네? 아니, 이 한여름 밤에 춥긴 뭐가 춥…… 꺅!”

“쉿. 우주 깰라.”

솜 베개 안듯 설원의 몸을 번쩍 들어 올린 채하가 야살스럽게 속삭였다.

아이 엄마로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협박이었다.

결국 설원은 다시 입을 열지 못한 채 그에게 사뿐히 들려 2층 침실로 옮겨졌다.

그러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그의 품에 완전히 갇혀 잠들어야만 했다.

*



“엄마. 우주 추워요~.”

다음 날.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결국 우주가 여름 감기에 걸리고 만 것이었다.

어린이집에 휴원한다고 연락을 취한 뒤, 설원은 회사를 쉬겠다는 채하를 설득해 출근시켰다.

정 실장에게 언뜻 듣기로는 그가 요즘 부쩍 우주의 등‧하원에 시간을 할애 중이라 했다.

아무렴 채운의 부사장이 그렇게 한가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드물게 크게 앓는 우주 때문에 결국 채하는 반차를 내고 집에 돌아왔다.


“나랑 놀이동산 가서 너무 무리했던 모양이야.”

“아니에요. 그나저나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설원이 말끝을 흐렸다.

열이 올라 끙끙대던 우주가 하필이면 조금 전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깨우지 마. 주치의를 집으로 불렀어.”

“주치의요?”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이야. 심 원장님, 기억하지?”

“……네.”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채운 가의 주치의인 심 원장은 설원의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돌봤던 의사였으니까.


“일단 당신 점심부터 먹어. 아주머니가 차려두셨을 거야.”

“난 괜찮아요.”

“엄마가 건강해야 아이도 빨리 낫는 거야. 당신이 굶고 있으면 우주가 걱정해.”

“네…….”

채하의 듬직한 말에 설원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하지 않으려 하는데도 가끔 이렇게 너무도 아빠 같고, 남편 같은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수긍하고 마는 그녀였다.

잠시 후 우주를 진찰하러 심 원장이 방문했다.

그는 곧바로 설원을 알아본 듯했지만, 아이가 더 급한지라 가볍게 눈인사만 건네고 방으로 향했다.


“음. 열이 좀 높군요. 콧물이 많이 나긴 하는데 목은 괜찮습니다. 한 2, 3일 약 먹고 푹 쉬면 나아질 겁니다.”

“여태껏 잔병치레 한번 없던 아이였는데…….”

“아무래도 아이가 이 집이 편한 모양입니다.”

“네?”

“아무리 잔병치레가 없어도 아이가 아프지 않을 수는 없거든요. 아마 늘 괜찮은 척하다가 긴장이 풀려서 이렇게 크게 앓는 걸 수도 있습니다.”

“아…….”

그 말에 설원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동시에 뒤에 서 있던 채하 역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마냥 명랑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민설원의 아들이긴 아들이었다.

어린아이 주제에 웃음 뒤로 아픔을 숨길 줄 알다니.

채하는 우주 옆에 꿇어앉아 있는 설원의 작은 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마 제가 없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늘 혼자서 이렇게 아이의 곁을 지켰겠지.

아무리 이제 혼자 두지 않겠다 결심했어도 지나간 세월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었다.

그 냉정한 사실이 채하의 가슴을 칼로 후벼파듯 도려내고 있었다.


 

*



“으음…….”

중얼거림과 함께 퍼뜩 눈을 뜬 설원은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제 기억으론 어젯밤 우주의 침대 옆에서 잠든 것 같았는데, 창가를 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그 사실에 더욱 놀란 설원이 황급히 우주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다급한 손길로 문을 연 설원은 방안 풍경을 보자마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가 앉아 있던 자리엔 당연한 듯 채하가 대신해 앉아 있었다.

우주의 자그마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그는 한숨도 자지 않았는지, 눈빛이 또렷했다.


“……권채하 씨?”

“아. 당신 일어났군.”

“설마 날 방에 데려다 놓은 게 당신이에요?”

“그럼 누구겠어.”

천연덕스레 말하는 채하의 얼굴을 보며 설원은 기가 찼다.

회사도 안 가고, 이렇게 밤까지 새 가면서 우주의 곁을 지킬 줄이야.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요. 어제 당신도 들었을 텐데요. 약 먹고 푹 쉬면 낫는다고…….”

“똑같이 그렇게 들은 민설원 씨는 그럼 왜 잠도 안 자고 꼬마 곁을 지켰나?”

“…….”

“나도 당신하고 같은 마음이야. 잊지 마.”

채하의 표정을 보니 이 이상 말을 얹는 건 불필요할 듯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우주의 아빠였다.

아픈 아이 앞에서 서로 다른 마음일 수 없다는 건, 당연지사였으니.

다행히 우주는 어제보단 한결 숨쉬기 편한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오히려 우려되는 건 채하 쪽이었다.


“당신까지 안색이 안 좋아요. 주스라도 좀 만들어올게요.”

“고마워.”

이 상황에서 그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리는 게 이상해, 설원은 빠르게 1층으로 향했다.

영영 우주의 부모는 저 하나라고만 생각했었다.

혼자서도 잘 키우겠다고 다짐했음에도, 이따금 서글퍼지곤 했던 그녀였다.

한데 이곳으로 돌아온 뒤 아빠의 몫을 거뜬히 해내는 채하를 볼 때마다, 자꾸만 이대로 우주에게서 아빠를 없는 존재로 만들어도 좋을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내내 열병을 앓고 있는 건 정작 자신인지도 몰랐다.

1층 계단에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심 원장이 방문하기로 한 시간이었다.

설원은 얼른 현관문을 열고는 그를 기다렸다.

마침 혼자일 때,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물어야만 하는 것이.

곧 집으로 들어선 심 원장이 설원을 발견하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 작은 사모님. 댁에 계셨군요.”

“네. 선생님.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어요.”

“저도 마찬가지죠, 뭐.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소식 듣고 저도 무척이나 걱정했습니다.”

“저…… 선생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저희 어머니 말인데요.”

“아. 김선화 여사님 말씀이시죠. 참 안타깝습니다.”

어머니의 이름 석 자에 마치 어제 일처럼 그때의 고통이 밀려오는 듯했지만, 설원은 애써 평온을 유지했다.

심 원장이 유감이라는 듯 말을 이었다.


“상태가 나름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급격히 위독해지셨어요. 손써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만큼 사실 수 있었던 것도 다 선생님 덕분인 걸요.”

그가 말한 대로 설원의 어머니는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되었다.

살리기 위해, 어머니를 위해 그런 선택을 했음에도 그녀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설원은 자신의 선택 때문에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당시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깊이 생각할 여력조차 없었다.

하지만 백사라에게 속은 사실을 깨달은 후 내내 가시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어째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던 어머니가, 하필 채하와의 계약 결혼이 끝날 무렵 급격히 상태가 악화되었던 걸까.

그건 정말로 우연이었던 걸까.

설원은 잠시 고민했다.

심 원장은 애초에 채운에 속한 사람인 만큼, 제가 하는 말이 자칫 채하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갈 우려가 있었다.

과거의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채하에게 괜한 흔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심 원장 쪽에서 오히려 고심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저…… 작은 사모님. 이제 와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네?”

“사실 전 옛날부터 말씀드리고 싶었거든요. 이제 이렇게 부사장님 곁으로 돌아오셨으니, 지금은 아셔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뭘…… 말씀이시죠?”

힐끗, 2층 난간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곤 심 원장이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그러고는 케케묵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저희 병원에 어머님을 모셨던 3년 동안, 부사장님께서 정말로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들러서 직접 어머님을 살피셨어요.”

“……네?”

뜻밖의 이야기에 설원은 깜짝 놀랐다.

저조차 허영주의 눈치를 보느라 병원에 자주 드나들지 못했는데, 채하가 어머니를 살폈다니.

어머니에게서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를, 곧 심 원장이 밝혀주었다.


“어머님과 산책도 자주 하시고…… 참 보기 좋았습니다. 하지만 멋쩍은지 작은 사모님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어머님도 그리 말씀하셨고요.”

“…….”

“이거야말로 절대로 말하지 말라 하셨지만…… 사실 어머님 임종을 지키신 것도, 부사장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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