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상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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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상사병
2023.01.04.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밤, 두 사람은 선을 넘지 않았다.
다만 채하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줌과 동시에 기어이 제 의사도 관철했다.
그리하여 둘은 한 침대에서 껴안고 자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옛날에도 으레 그랬듯 채하가 춥다고 우겼기 때문이었다.
그땐 겨울이었고, 지금은 한여름 밤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어쩐지 설원도 그의 온기가 싫지 않았다.
덕분에 이 집으로 돌아온 이래 가장 깊고도 편하게 잠든 밤이었다.
반면 허영주는 생전 없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든 풀처럼 시름시름 앓는 꼴이, 중병을 얻었다고 해도 무방할 판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던 윤 실장이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사모님. 부르셨으면 그냥 털어놓으세요.”
“뭐? 뭘 털어놔?”
“눈 밑이 퀭한 게, 백 년 묵은 근심이 있는 표정이시잖아요. 오 분에 한 번씩 한숨만 푹푹 쉬시고요. 속 시원히 말씀하세요. 그러려고 저 부르신 거 아닙니까?”
“윤 실장은 참 예리하고 얄미운 구석이 있어.”
“칭찬하실 거면 칭찬만 해주시죠.”
윤 실장이 냉담하게 대꾸하자 허영주는 그를 한참이나 흘겨보았다.
얄밉긴 해도 그의 말대로였다.
이렇게 속으로 혼자 끙끙 앓다간 병이 날 것만 같았다. 아니, 벌써 났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차마 권강호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모님 지금 꼭 상사병에 걸린 사람 같다니까요?”
“사…… 상사병?”
허영주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병이 무슨 병인가 했더니 바로 상사병이었다!
답을 속 시원히 듣게 되자, 허영주는 구세주를 만난 듯 윤 실장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자꾸 꿈에 그 애가 아른거려. 사실 눈 뜨고 있을 때도 아른거리는 것 같아. 왜, 그 환영이라고 하지? 막 보인다니까! 다른 사람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 애 이름이 저절로 튀어나와. 우주야, 하고…….”
중얼중얼 고해성사라도 하는 듯한 허영주의 눈은 이미 우주에게 푹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시죠.”
그런 허영주를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는 윤 실장이 냉큼 건져냈다.
“응? 어딜?”
벌써 자리에서 일어선 윤 실장을 올려다보며 허영주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사모님 아주 중증입니다. 그러니 치료하러 가야지, 별수 있습니까?”
“치료……?”
“보러 가자고요. 우주라는 아이.”
“뭐어?”
놀라서 지르는 건지, 기뻐서 지르는 건지 알 수 없는 고성이 허영주의 목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혹시라도 채하나 민설원이 어린이집에 오기라도 하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번에도 쉬는 시간에 가서 본 거잖습니까. 부사장님도 작은 사모님도 지금은 어린이집에 올 시간이 아니에요.”
속을 다 들여다보는 듯 윤 실장이 허영주를 안심시켰다.
우려할 것이 없다는 그의 말에, 허영주는 미처 ‘작은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지적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우주…….
예쁜 할머니라고 저를 불러주던 앵두 같은 입술과 해맑은 미소를 지닌 아이.
배꼽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가던 동그란 뒤통수가 도무지 잊히질 않았다.
사실 그날 이후로 몇 번이나 우주와 시소를 타는 꿈을 꾸었던 허영주였다.
“그래, 뭐. 윤 실장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네네. 사모님은 크게 내키지 않으셨는데, 제가 등 떠밀어서 가는 겁니다. 할 수 없이요.”
“흥. 아, 잠깐! 윤 실장. 빈손으로 가면 어떡해! 기다려. 집에 이것저것 사다 놓은 게…….”
후다닥 간식을 챙기러 가는 허영주의 뒷모습을, 윤 실장은 한숨을 쉬며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품 안 가득 온갖 간식과 장난감을 들고 나타났을 땐, 그 한숨은 땅이 꺼질 듯 깊어졌다.
어디다 숨겨두고 있었는지 몰라도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둔 게 분명했다.
“나 예뻐?”
“네에?”
주인 모시기가 갈수록 힘겹단 생각이 윤 실장의 가슴에 마구 밀려들었다.
그가 기겁하는 표정으로 미러 너머 허영주를 바라보자,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발언을 내뱉었다.
“애들 눈에 예뻐 보이겠냐고.”
“아아……. 그 뜻이셨군요. 저는 또 뭐라고.”
“뭐? 무슨 뜻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럼?”
선글라스 속에서도 허영주가 눈을 치켜뜨는 게 보여, 윤 실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모님이야 늘 아름다우시죠. 여배우까지 하신 몸인데요.”
“윤 실장 지금 나 비꼬는 거지?”
“그럴 리가요. 예뻐요. 충분히 예쁘시니까 그 선글라스는 벗으세요. 아이가 알아볼까 봐 걱정하시는 거면 그편이 훨씬 수상합니다.”
흥! 콧방귀를 뀌면서도 허영주는 선글라스를 곱게 벗어 핸드백에 넣어두었다.
사실 알아볼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알아봐 주길 기대하는 거였는데.
윤 실장의 예리함은 섬세한 여심까지 헤아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무사히 잎새 어린이집 앞에 도착했다.
비밀 임무에 투입된 요원이라도 된 것처럼 허영주가 먼저 잽싸게 담벼락에 몸을 붙였다.
그 수상한 행동에 동참하는 대신 윤 시장은 멀찍이서 상황을 파악하는 역할을 맡았다.
예상한 대로 잎새 어린이집의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는 누구라고 일러줄 것도 없었다.
허영주의 눈길이 정확히 우주의 정수리에 가 꽂혔기 때문이었다.
“얘! 얘!”
“어? 예쁜 할머니다!”
“쉿! 너 조용히 여기로 와 봐라.”
“네~.”
이번에는 배꼽 인사 대신 손을 밝게 흔들며 우주가 쪼르르 허영주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무척 반가운 듯 그녀의 옷자락을 붙들곤 쫑알거렸다.
“우주, 대왕 할아버지 집에서 예쁜 할머니 사진 봤어요~.”
“사, 사진?”
“네! 대왕 할아버지 옆에 예쁜 할머니가 웃고 있었어요~.”
그 말에 윤 실장은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거실에 대문짝만하게 사진이 걸려 있으니, 못 보고 지나치기도 어려울 것이었다.
이 우주라는 아이는 무척이나 총명한 것 같았기에 윤 실장은 어쩐지 불안함을 느꼈다.
이러다가 허영주가 누구인지 알아채기라도 하면…….
한데 우려해야 할 쪽은 아이가 아니라 정작 반대였다.
허영주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이, 자신이 대왕 할머니라고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게 틀림없었다.
긴급 사태를 막기 위해 윤 실장은 둘 사이에 냉큼 끼어들었다.
“자자. 안녕? 귀여운 꼬마?”
“어? 아저씨는 누구세요?”
“여기 이 예쁜 할머니를 도와주는 사람이란다. 오늘은 우주한테 맛있는 과자랑 장난감을 선물하러 왔지~ 자, 받으렴.”
“고맙습니다~.”
우주가 작은 품에 버거울 정도로 과자를 받으며 인사를 건네자, 허영주가 옆에서 눈을 부라렸다.
그 매서운 눈길에 윤 실장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다 여기 예쁜 할머니께서 우주한테 주는 거란다.”
“정말요? 고맙습니다. 예쁜 할머니~.”
두 손이 꽉 차 있어 배꼽 인사를 하기 버거워지자, 우주는 화사하고 해맑은 미소를 날려 인사를 대신했다.
이쯤 되니 허영주는 거의 반쯤 혼이 나가 있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더라면, 허영주는 그 자리에서 우주를 업고 안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앙증맞은 두 손을 휘휘 흔들며 우주가 어린이집 안으로 사라진 후에도, 그녀는 여운에 빠져 한참이나 서 있었다.
그런 허영주를 보며 윤 실장은 저번에 권강호 회장이 했던 지시를 떠올렸다.
당분간 사모님을 예의주시하고 철저히 행동을 감시하라는.
벌써 어린이집에 찾아갔었다는 사실을 의리상 고하지 않았던 윤 실장이었지만, 그 말에 그는 이미 들켰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권강호도 완전히 경고 차원에서 던진 말은 아닌 듯했다.
차라리 허영주가 손주를 예뻐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넌지시 뜻을 비쳤으니까.
물론 예뻐하는 정도가 저 지경에 이를 거라곤 그도 미처 예상 못 했을 터였다.
뭐가 됐든, 무고하고 순수한 아이를 미워하는 것보단 예뻐하는 게 나았다.
“사모님. 이제 가셔야죠. 여기 서 있어도 또 안 나와요.”
“어떻게…….”
어린이집 문에 눈을 붙박은 채 중얼거리는 허영주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번뇌가 섞여 있었다.
“네?”
“어떻게 하면 저 애를 데려올 수 있을까? 응? 윤 실장.”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세요? 설마 작은 사모님한테서 아이만 뺏어오겠다거나, 그런 못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죠. 사모님?”
허영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골똘히 뭔가를 궁리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윤 실장은 역시나 권강호가 시킨 대로 철저히 감시하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름 오래 모신 주인의 업보가 여기서 더 쌓이도록 놔둘 수는 없었기에.
*
“흐응~ 그래? 우리 허 여사님이 잎새 어린이집에 갔단 말이지?”
어린이집 앞에 심어둔 수행비서에게서 들어온 소식에, 백사라는 입매를 비틀었다.
제가 만나자고 했을 땐 몸이 안 좋다는 둥 둘러대더니 역시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네. 쉬는 시간에 와서 과자를 잔뜩 주고 가더군요. 잠깐 왔다 가긴 했습니다.]
“알았어. 최재윤 쪽은?”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권채하 씨와 한번 만난 뒤로 다시 접촉은 없었습니다.]
“잘 살펴봐. 눈 떼지 말고. 그쪽도 재미있는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백사라는 한참이나 물건을 집어 던지며 분을 삭였다.
입안의 혀처럼 굴 땐 언제고, 그깟 아이 때문에 제 연락도 회피하는 괘씸한 꼴이라니.
아직 다 준비가 된 건 아니었지만, 더는 잠자코 있는 것도 한계였다.
백사라는 얼마 전 소개받은 백재영의 끄나풀에게 은밀하게 연락을 취했다.
이번 일에 쓰기 위해 특별히 소개받은 남자였다.
그렇게 그녀의 손톱 끝에서부터, 추문은 시작되었다.
*
“부사장님! 부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정 실장?”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서요.”
그 말대로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정 실장이 핸드폰 화면을 채하에게 들이밀었다.
온통 자극적인 가십으로 난무한, 이른바 재계의 숨겨진 비밀을 파헤친다는 SNS 계정이었다.
거기엔 아주 황당한 찌라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게 뭐죠?”
“보시다시피…… 누가 이상한 추문을 흘렸습니다! 그…… 작은 사모님께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정 실장을 대신해 채하가 제 입으로 똑똑히 그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채 모 그룹의 며느리 실종 사건. 거기에 숨겨진 놀라운 진실. 사실은 섬에 남자가 있었다…….”
“읽지 마세요. 읽을 가치도 없는 글입니다.”
“그런 것 같군요.”
단칼에 답한 채하가 정 실장에게 도로 핸드폰을 밀어주었다.
그러고는 검토하고 있던 서류를 향해 다시 시선을 내렸다.
무던한 그의 태도에 얼떨떨해진 정 실장이 우물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부사장님. 대응 안 하실 겁니까? 화나지 않으세요?”
정 실장의 말에 채하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며시 들곤 대꾸했다.
“대응이라면?”
“그…… 해명이라든지.”
“읽을 가치도 없는 글인데, 해명할 가치는 더더욱 없죠. 이런 추문에 일희일비하는 것이야말로 추문을 낸 자가 가장 바라는 일일 겁니다.”
“아아. 역시 부사장님은 현명하십니다!”
안심했는지 정 실장이 핸드폰 화면을 끄곤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하지만 채하가 한 손에 쥐고 있는 만년필엔 부서져라 악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분노. 그의 손끝에 응축된 감정은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