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천생연분끼리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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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천생연분끼리 하는 일
2023.01.01.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나?”
“하하. 표정 풀래도. 우리 사라가 어디서 주워듣고 온 모양인데, 이해하게. 자네도 알다시피 오매불망 채하만 바라보고 산 아이 아닌가.”
딱딱하게 굳어진 권강호의 얼굴을, 백 회장이 빙글거리며 응시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판을 깔고 유도해나가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면이 거북해 차츰 거리를 두게 된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백영 그룹이 삼키고 싶어 했던 기업 중 일 순위가 바로 채운이었다는 사실을, 권강호는 잘 알고 있었다.
쉽사리 손댈 수 없을 정도로 권강호가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더라면, 언제고 백영은 채운부터 집어삼켰을 것이다.
“부지 건은 너무 걱정하지 말게. 철없는 딸이 사랑에 눈이 멀어 하는 소리인지라, 내가 타이르는 중이니까.”
“그럼 그 김에 다른 것도 좀 타일러 주면 좋겠군. 굳이 임자 있는 남자를 탐내서 좋을 게 뭐 있겠나? 자네도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이 소박맞고 다니는 걸 보는 게 맘 편하지 않을 텐데.”
노골적으로 심기를 건드리자 백 회장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권강호로서는 늘 벼르고 있던 말이었기에 은근히 속이 시원했다.
무엇이 되었든 맹목적으로 품은 비틀린 욕망을, 권강호는 늘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한참이나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젓가락질하는 소리만이 이어지던 식사 끝에, 백 회장이 묵직하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언뜻 배려를 위장했으나 실은 이빨을 숨긴 경고였다.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지 말게. 자네와 난 뼛속부터 사업가잖나. 무엇이 중요한지 사리 판단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아빠!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그러는 사라 넌 또 왜 여기 와 있는 거냐?”
“어휴~ 술 냄새!”
그에게만큼은 살가운 딸인 백사라가 백 회장을 야무지게 부축해 가죽 소파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얼른 꿀물과 숙취해소제를 가져다주었다.
“우리 아빠 이렇게 매일 과음하시면 몸 다 상한다니까요~? 이제 연세도 생각하셔야죠.”
“우리 막내 잔소리하는 거 들으니 반갑고 좋구만, 왜. 이참에 다시 집에 들어와서 살지 그러냐.”
“어휴. 저야말로 엄마 잔소리 못 견디는 거 아시잖아요. 그나저나 엄마는 어디 가셨어요? 좀 전에 왔는데 집에 없으시네요. 모처럼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했더니.”
투덜거리는 딸의 얼굴을 백 회장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딜 내놓아도 부족할 것 없이 완벽한 딸인데, 왜 하필 권강호의 아들에게 빠진 건지 생각할수록 통탄스러웠다.
‘굳이 임자가 있는 남자를 탐내서 좋을 게 뭐 있겠나?’
아까 권강호가 한 말이 뇌리를 맴돌아, 취기와 함께 분이 치밀어 올랐다.
백 회장이 주먹을 꽉 쥐곤 가죽 소파를 짓누르자 피시식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났다.
“네 엄마는 미술관 일 때문에 늦을 거다. 차라리 다행이지. 네 엄마가 너 이러고 다니는 꼴 보면 속이 뒤집어질 거 아니냐.”
“아빠도 참. 많이 취하셨네. 얼른 숙취해소제 드세요. 방 안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백사라가 꿀물을 비운 잔을 받아들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백 회장은 그 손을 도로 밀어 치우곤 딸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오늘 이야기가 잘 되었는지 궁금해서 본가에 행차한 게 분명한 막내딸을.
“사라야.”
“네. 아빠.”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사라 너 정도면 재계는 물론이고 정계의 유망한 집안 청년들까지 줄을 서는데, 왜 채운에 넙죽 엎드려야 하는지. 말해봐라. 권채하가, 그렇게까지 해야 할 가치가 있는 남자냐?”
일순 백사라의 눈동자가 한밤중 담벼락을 걷는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반짝 빛났다.
그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백 회장은 제가 부질없는 질문을 던졌음을 깨달았다.
이윽고 백사라가 붉은 입술을 열고선 질문에 대답했다.
“세상에 태어나 딱 하나 가져야 할 것을 못 가진다면, 다른 건 다 부가적인 것에 불과해요. 야망이 넘치시는 아빠라면, 제 마음 누구보다도 이해하실 텐데요?”
“협박이냐?”
“그럴 리가요~ 당연히 애교죠.”
웃음을 듬뿍 머금으며 백사라는 백 회장을 일으켜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그가 자신의 성향을 많이 물려받은 이유로 그녀를 아끼는 만큼, 백사라 역시 자신의 야망을 이해하는 아빠를 사랑했다.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타고난 본능으로 욕망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겐 그만큼 든든한 아군이 없었다.
애교 가득한 딸의 말투에 백 회장은 더욱이 분이 치밀었다.
이런 딸을 마다하고 하찮은 여자를 며느리로 들인 권강호의 어리석음에.
“솔직히 이야기가 잘된 건 아닌 것 같다. 일이 쉽게 풀리진 않겠어.”
“……뭐, 예상한 대로네요.”
“권 회장도 나이가 들더니 마음만 약해빠졌어. 우리와 사돈을 맺었으면 순식간에 경영 흑자로 돌아섰을 것을, 뭘 천천히 정직하게 가겠다는 건지. 사업가가 되어선 숙맥 같은 소리만 한다니까.”
“그래도 아빠랑은 오랜 친구시잖아요. 저도 진짜로 압박을 가하고 싶진 않은데 말이죠.”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백사라의 속도 부글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그 집 식구는 허영주 말고는 구워삶을 만한 인물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그녀도 요즘은 어찌 주물러야 할지 통 고민되는 중이었고.
우주라는 아이가 등장한 뒤론 연락도 뜸해진 것이, 조짐이 좋지 않았다.
아쉬우나마 아버지의 힘을 빌려보려 했건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분함과 초조함을, 백사라는 애써 감췄다.
침대에 백 회장을 눕혀주자 그가 끙 골치 아프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괜히 네 엄마 눈에 띄지 말고 얼른 가라. 아빠도 일찍 잘 테니까.”
“네. 불 꺼드릴게요.”
탁, 하고 방의 불이 꺼졌다.
하지만 백사라의 마음속에서 권채하에 대한 갈망은 꺼지지 않고 타오를 뿐이었다.
그것은 그를 손에 넣을 때까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대한 불씨였다.
자신마저 삼켜버릴 것 같은 그 불씨에, 백사라는 본격적으로 장기 말 하나를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맨 위, 정점과의 협상이 실패했다면 이번에는 가장 밑바닥부터 더럽히기로.
*
“무슨 일 있어?”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피치 못하게 늦게 퇴근한 채하는, 거실 소파 위 설원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민설원. 여보.”
“…….”
대답 대신 반쯤 넋이 나간 설원의 표정만이 어둠 속 통유리창에 비쳤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아 채하가 급히 가방을 내려놓곤 성큼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얼굴이 왜 그래?”
“……권채하 씨?”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설원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다.
무척이나 심각한 얼굴로, 채하가 제 옆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당신하고 우주, 무슨 일 생긴 거야?”
“아아…….”
설원이 맥없이 중얼거리자, 채하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져 갔다.
그 표정을 보니 빨리 털어놔야 할 거 같아 설원은 결국 저녁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뭐? 우주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아직 여자친구는 아니에요. 고백을 받았다는 거죠.”
시무룩하게 설원은 아까 우주에게 들은 이야기를 회상했다.
오늘따라 더욱 밝은 얼굴로 집에 돌아온 우주는 가방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폭탄 발언을 투척했다.
‘엄마, 엄마! 천생연분이 뭐예요?’
‘뭐? 천생연분?’
‘응! 오늘 우리 토끼반에 별이라는 친구가 우주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우주랑 별이는 이름만 들어도 천생연분 같다고 했어요!’
너무도 귀엽고 깜찍한 이야기였지만, 설원에겐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 채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곤 있는 힘껏 웃음을 참았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 우리 아들한테 여자친구가 생겨서 이렇게 울적한 건가?”
“아직 여자친구 아니라니까요? 우주한테 물어보니까 그냥 사이좋은 토끼반 친구랬어요.”
“그런데 뭘 그리 근심하고 있어?”
“그냥…….”
시름시름 설원의 말끝이 흐려졌다.
결국 채하는 손을 거두고 낮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거, 우리 아들이 벌써부터 여자애들을 울리고 다니려나. 아무렴, 꼬마가 인물은 인물이지.”
“당신도 참 태평한 소릴…….”
설원이 야속하다는 듯 채하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채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더 놀리듯 웃음을 지었다.
“난 나만 질투의 화신인 줄 알았더니, 이 집에 한 명 더 있었군. 민설원, 당신 말이야.”
“……질투하는 거 아니에요.”
“뭘 아닌 척해. 넋이 나가서 멍하니 바깥만 보고 있었으면서.”
“그건…… 풍경이 좋아서.”
“우리 아내가 가끔 이렇게 어설프게 굴 때면, 내가 딱 돌아버릴 것 같단 말이지. 밖이 이미 깜깜한데 혼자 무슨 풍경을 감상했다는 거야.”
“…….”
속절없이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설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올라가서 자야겠어요.”
“잠깐.”
채하의 옆을 지나쳐 계단으로 향하려는 그녀의 손을, 채하가 붙들었다.
그의 눈은 설원의 사과처럼 말간 뺨 위를 헤매고 있었다.
곧 채하가 나직한 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말은 끝까지 듣고 가야지. 민설원. 사실 나도 질투 나거든.”
“…….”
“그래도 당신과 부모로서의 동질감을 느끼는 기분이, 나쁘지 않네.”
그 말에 설원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놀리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실은 그도 자신의 마음에 공감하고 있을 줄이야.
세상에서 제 마음을 가장 모르는 사람이 권채하라고 생각했는데, 이 순간 설원은 그가 우주의 아빠임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밤의 거실에서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묘하게 야릇한 기류를 형성했다.
“아, 저기…….”
일단 붙잡힌 손부터 빼내야겠다 싶어 설원이 손끝을 꾸물거렸다.
한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
급격히 변한 시야에 설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만 끔벅거렸다.
분명 벽이 보여야 할 눈동자에 비치는 건 놀랍게도 천장과, 채하의 얼굴이었다.
그랬다. 그가 설원을 번쩍 들어 안은 것이었다.
얼굴과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었다.
게다가 가슴팍에 완전히 파묻혀 있어, 그의 심장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저보다 빠르면 빨랐지, 결코 느리지 않은 설레는 심장 소리가.
이윽고 채하가 느른하게 입을 열고 속삭였다.
“마음껏 질투해도 돼. 당신한테는 내가 있잖아.”
“권…… 채하 씨.”
“우리 아내가 의기소침해 있는 것 같으니, 내가 특별히 2층까지 서비스하지.”
“아니, 아니에요. 걸어갈 수 있어요.”
설원이 다급히 두 손을 펄럭이자 채하가 더욱 힘껏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더 가까이 얼굴을 붙여왔다.
마치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감에 위기를 느낀 설원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못 걸어가서 이러는 거 아니란 건 잘 알잖아. 걱정하지 마. 침대에 곱게 눕혀 줄 테니까 몸에 힘 풀고.”
“힘, 힘 안 줬어요!”
억울하다는 듯 설원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채하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이지 잘못된 행동이었다.
그의 눈이 까맣게 타오르는가 싶더니, 낮은 속삭임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일부러 이러는 거면, 내가 졌어. 민설원.”
“……?”
“우리도 해보자고. 천생연분끼리 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