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난제
(43/111)
43. 난제
(43/111)
43. 난제
2022.12.28.
울었다…….
그 말에 채하의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얼마 전 파티에서 허영주와 백사라에게 모욕당하던 설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꽃 축제에서도 그렇고, 아마 그녀는 제가 모르는 곳에서 몇 번이고 그런 일을 당했을 터였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설원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빤히 어머니 허영주의 심성을 알면서 그녀를 채운 가로 밀어 넣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필요한 ‘돈’을 빌미로 총알받이가 되어달라 요구한 건 다름 아닌 그였다.
처음 만났을 때 보여주었던 단단한 눈빛에,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것뿐이었다.
민설원은 강한 여자라고. 긍지 높은 그녀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단지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은 것뿐, 그녀는 늘 혼자 울었을 텐데.
“대왕 아빠, 슬퍼요?”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우주가 빤히 채하를 올려다보았다.
슬프다…….
이 저미는 마음을 단순히 그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의문이었지만, 채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제 감정의 동요로 아이마저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우주가 봤다고 말하면 안 돼요?”
걱정스럽게 우주가 솜사탕이 묻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볼수록 아주 효자인 것 같아, 채하는 빙긋 입가를 풀곤 미소를 지었다.
“말 안 해. 꼬마. 그러니까 너도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
“응! 대왕 아빠랑 우주 비밀이에요!”
“그래. 약속.”
우주가 내민 작고 여린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휘감으며, 채하는 이와 꼭 닮은 여린 손가락을 떠올렸다.
아직 제가 돌려준 반지를 끼지 않는, 희고 고운 손가락.
5년 만에 다시 그녀를 찾아냈을 땐 그저 서둘러 마음을 열고 싶어 초조하기만 했다.
한데 지금은 그녀가 겪은 상처를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민설원이 제게 말하지 못하는 아픔들을 전부 헤아리고 싶었다.
그러자면 역시 설원의 기억을 되찾아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애초부터 부재했던 그에 대한 신뢰를, 처음부터 하나하나 쌓아나가야 했다.
“꼬마. 풍선 한 번 더 탈까?”
“응! 우주 풍선 좋아요!”
풍선처럼 동그란 볼을 씰룩이며 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그리고 저를 밀어내기만 하는 아내를 곁에 붙잡아둘 수 있을까.
지금껏 어떤 문제든 답을 도출하지 못한 적 없던 그였건만, 채하는 인생에서 가장 큰 난제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른바 사랑이라는 난제를.
부자간의 데이트를 설원에게 실컷 자랑하며 행복한 주말을 보낸 채하에게, 월요일 오전부터 반갑지 않은 소식이 당도했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거기 앉아라.”
주인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한 회장실.
심각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채하는 느긋하게 벽을 살피고 있었다.
밋밋하기 그지없는 이곳에도 조만간 우주의 그림을 하나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권강호는 며느리와 손주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 설원이랑 우주는 별일 없고?”
“네. 없습니다. 없어야만 하고요.”
의미심장한 채하의 말에 권강호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버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백영 일입니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백 회장이 너하고 나, 식사나 함께하자는구나.”
“대답은 안 들어도 아시겠지요. 전 못 갑니다. 아니, 안 갑니다.”
“안다. 단지 각오는 되어 있는지 물어보려고 부른 것뿐이야.”
호랑이처럼 매서운 눈빛과는 달리 다소 번민이 담긴 목소리였다.
채하로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채운과 백영의 관계는 한 단어로 쉽사리 정의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내 아들이 너무 잘난 게 문제인 것 같다. 왜 하필 백 회장 딸내미 눈에 들어선.”
“아버지도 참. 실없는 농담은 관두세요.”
“정말이다. 조금만 못났으면 이 사달이 나진 않았겠지. 하하.”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권강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눈빛은 깊게 잠겨 들었다.
“사람이 한길을 올곧게 걷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
“백 회장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지금은 이렇지만, 그 친구와 평생 같은 길을 갈 지기가 될 거라 여겼던 때도 있었다.”
말끝이 흐려지며 그의 눈동자가 아련한 과거의 어느 지점을 향했다.
채운 그룹의 수장인 권강호와 백 회장은 본디 동향 친구 사이였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표현이 늘 뒤따랐던 권강호와는 달리, 백 회장은 원래부터 걸출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또 자라났다.
타고난 두뇌와 세상사를 읽어내는 뛰어난 혜안,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실행력까지.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빼어난 사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둘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고, 그 점은 좋은 친구이자 라이벌로 오랜 세월을 함께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젊은 기업인으로 나란히 성장해 어느덧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은 많은 풍파와 고초를 거쳐야 했다.
“잃은 것도, 버린 것도 참 많았지.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기업가로서의 양심은 남겨두고 싶었다.”
“……아버지.”
“백영이 몸집을 불리는 데에, 수많은 중소기업을 무분별하게 합병하고 집어삼킨 점이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걸 채하 너도 모르지 않을 거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다수의 기업이 위기를 맞았던 시절, 백영은 부도 직전에 이른 기업들을 그야말로 쓸어갔다고 해도 무방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발생했지만, 백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망하고 있던 권강호에게 ‘기업의 생리’에 무지하다며 비아냥거렸을 뿐.
“아마 백영과는 이걸로 완전히 관계가 파투 날지도 모르겠구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저는…….”
“아니. 채하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애초에 의사를 더 분명히 했다면 좋았을 것을, 나도 물렀어.”
권강호의 눈빛이 다시금 현재로 돌아왔다.
그 말 그대로 확인차 불렀을 뿐, 그의 의중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옛날부터 사라가 너를 좋아했던 건 알고 있었지만, 탐탁지 않았지. 채하 너도 그래 보였고 말이다.”
“전 한 번도 백사라를 여자로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관심도 없고요.”
“안다. 너는 원래부터 여자들한테 무심했지. 설원이만 빼고 말이야.”
“…….”
갑작스러운 기습에 채하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그러자 권강호는 재미있다는 듯 아들의 반응을 살피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얼음 같은 내 아들의 이런 얼빠진 표정을 볼 수 있다는 게, 내가 우리 며느리를 아끼는 이유지.”
“……아버지.”
“녀석. 쑥스러워할 줄도 아는구나.”
“그런 게 아닙니다.”
채하가 애꿎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자, 권강호는 목소리를 낮추곤 진중하게 읊조렸다.
“채하 네가 설원이를 데려왔을 때부터 난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었다. 그 아이한테는 뭐랄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본디 없는 무언가가 있어. 무어라 설명하긴 어렵구나.”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더니.
아내를 향한 칭찬에 채하의 입꼬리가 끝을 모르고 위를 향했다.
곧 채하가 이 대화를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압니다. 아버지. 저도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니까요.”
*
“이거, 얼굴 보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구만.”
“일찍 왔군.”
“귀빈을 모시는데, 당연히 먼저 와서 기다려야지. 어서 앉게.”
권강호가 들어선 곳은 두 사람이 막역한 사이일 때부터 함께 드나들던 한식집이었다.
일부러 이곳을 고른 게 분명했다.
백 회장은 워낙 치밀해 사소한 것 하나 계산하지 않는 법이 없는 인물이었으니.
“바쁜데 굳이 멀리까지 행차할 필요 있나. 회사 근처에서 간단하게 먹어도 되는데 말이야.”
“강호 자네도 참. 우리가 어디 그런 사이인가? 잘하면 사돈이 될 뻔했던 사이가 아닌가.”
식사도 채 나오기 전에 본론부터 끄집어내다니 한 방 먹은 기분이었으나, 권강호는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아무렴 다 옛날 일이지.”
“옛날이라……. 그래. 허 여사님은 무탈히 잘 계시고? 우리 집사람이 종종 안부를 묻더라고. 알다시피 집사람이 팬이었잖나.”
“언제 적 얘기야. 그게.”
어차피 허영주의 안부는 백사라의 입으로 들어 뻔히 알 텐데, 그 점을 지적해 주려던 찰나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굳이 꺼내서 좋을 말도 아니었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라면 타이밍이었다.
“자, 들게. 좋은 친구와 변치 않는 음식 맛을 즐기는 건 인생의 큰 기쁨이지.”
“술은 됐네. 요즘 건강 때문에 금주 중이야.”
알아주는 주당인 백 회장이 냉큼 잔을 건네려다 맥 빠진 얼굴을 했다.
옛날에는 밤이 새도록 잔을 주고받았지만,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할 판이라 술은 왠지 꺼려졌다.
“할 수 없지. 권 회장 몫까지 내가 마셔줌세.”
“마음대로 해. 너무 취하지는 말고.”
“이 사람. 나도 옛날 같진 않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백 회장은 단번에 한 잔을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은 그가 곧바로 불러낸 목적을 꺼내 들었다.
“듣자 하니 자네 아들이 지난번 라 쁠뤼 론칭 파티에서 우리 딸아이를 공개적으로 망신 줬다고 하던데.”
“허허. 망신은 무슨. 우리 며느리가 철없는 집사람 때문에 봉변당할 뻔했던 걸 겨우 수습한 거지.”
그 철없는 집사람의 동행인이 바로 백사라였음을 권강호는 일부러 빼놓고 이야기했으나, 피차 모르지 않을 터였다.
덕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을 앞에 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리 막내딸도 철이 없어서 문제지. 워낙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지, 원하는 걸 갖지 못하면 애처럼 졸라댄다니까.”
백 회장이 능구렁이처럼 웃음을 흘렸다.
말은 그리해도 그가 백사라를 얼마나 품에 끼고 키웠는지, 권강호는 잘 알고 있었다.
똑똑한 머리에 예쁜 외모, 게다가 성품 또한 제 아비를 빼다 박았다.
고대했던 장남이 통 신통치 못한 반면, 사업적인 센스와 야망을 모두 갖춘 막내딸은 그의 자랑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 자랑거리가 권채하에게 목을 매고 있다는 점만 뺀다면 백 회장은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터였다.
새삼 말을 돌릴 필요도 없다는 듯, 그가 다시금 압박을 가해 왔다.
“채운의 이번 리조트 사업, 중요한 건 아닌가? 자네도 알다시피 리조트는 부지 선정이 관건이지. 우리 딸이 알짜배기 땅을 갖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자네답지 않게 큰 걸 줬더군.”
“말한 대로 원하는 건 어떻게든 얻어내는 아이라 말이야. 여하튼 문제는 딸아이가 요즘 들어 자네 경쟁사에 부지를 넘기겠다지 뭔가? 하하.”
“땅이야 좋은 값을 쳐주는 사람에게 넘기는 게 당연한 일이지.”
태연자약하게 권강호가 차를 음미하자, 백 회장이 도발의 수위를 은근히 높였다.
“자네 그 살아 돌아온 며느리, 어차피 채하하곤 이혼할 예정이었다면서.”
전에 봤을 때보다 살집이 꽤 불어난 백 회장이 번드르르한 이마를 닦아냈다.
그러고는 마치 선심을 쓰듯 권강호의 접시에 고기 한 점을 덜어주며 말했다.
“자자. 표정 풀게. 좋게 갈 수도 있는 일을 두고 우리끼리 이럴 필요 없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