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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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비밀
2022.12.25.
“잠깐.”
쪼르르 달려오는 우주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재윤을, 채하가 저지하며 막아섰다.
동시에 우주도 어리둥절해하며 발을 멈췄다.
“뭡니까?”
재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채하가 대뜸 우주에게 물었다.
“꼬마. 어떤 아빠한테 올 거지?”
“으응?”
“……유치하게 뭐 하는 겁니까?”
재윤의 표정이 더욱 노골적으로 떨떠름해졌다.
“그렇게 말하면서 최재윤 씨도 한 발 앞으로 나간 것 같은데.”
“안 그랬거든요?”
어이없어하는 재윤을 당당히 무시한 채 채하가 다시 우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 어떤 아빠가 엄청 엄청 좋은지, 꼬마 네가 직접 선택해 봐.”
“…….”
다섯 살 인생에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듯 우주의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고민의 기색이 스쳤다.
또르르, 우주의 눈이 재윤을 향하자 재윤이 눈에 힘을 팍 주었다.
섬에서의 추억을 벌써 잊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채하를 향하자, 채하는 눈빛으로 동심을 저격하는 텔레파시를 보냈다.
자신을 고르면 엄청난 과자 세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자그마한 발을 차마 떼지 못한 채 우주가 앵두 같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우주는 대왕 아빠도 좋고 재윤 아빠도 좋은데…….”
“꼬마. 세상엔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때도 있는 거야.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이지.”
“으응~.”
채하의 채근에도 순진하고 착한 우주는 차마 한 명을 고르지 못했다.
친아빠를 앞에 두고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한다니, 혀를 찰 일이었다.
질투에 눈이 먼 채하가 결국 뒷주머니에서 슬그머니 사탕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어머! 우주네 대왕 아버님 아니세요.”
“…….”
“그리고 최 기사님은 왜 거기서 그러고 계세요? 얼른 같이 아이들 태워주시지 않고~.”
어딘가 토끼를 닮은 토끼반 선생님이 때마침 나와 두 사람의 정신을 퍼뜩 차리게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유치함의 절정으로 치달을 뻔했던 상황은 그녀로 인해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우주, 그럼 내일 보자.”
“네!”
손을 흔드는 재윤을 향해 우주가 방글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그 웃음마저도 아까워, 채하는 아이를 잽싸게 안아 세단에 태웠다.
아무래도 우주에게 자신이 생물학적 아빠라는 사실을 최대한 빠르게 주입해야 할 듯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우주의 생물학적 엄마이자 그의 아내, 민설원.
“……왜 그렇게 봐요?”
“당신, 나한테 말 안 한 거 없어?”
우주를 재우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설원에게 뾰족한 물음표가 날아들었다.
조금 뜨끔했지만, 설원은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으니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재윤 씨가 어디서 일하든 제가 막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일까.
제가 섬으로 돌아가고 나면 재윤도 돌아갈 거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채하의 눈을 보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한데 그는 타오르는 시선을 거두기는커녕 뚫어질 정도로 설원을 쳐다보았다.
“아침에 말했었지.”
“네?”
“내가 질투의 화신이라고.”
“…….”
“역시 나만 속태우는 건 억울해. 당신도 내 심정을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어.”
“그게 무슨?”
설원의 심장이 이상하게 콩닥거렸다.
지금까지 권채하의 곁에는 딱히 견제할 만한 여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쉽사리 다가갈 수도 없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백사라조차 일방적으로 주변을 맴돌았을 뿐, 거의 투명 인간 취급을 당했으니까.
한데 제가 없던 동안 모르는 새 다른 여자라도 있던 걸까.
다른 여자를 이용해 질투라도 유발하겠다는 건지, 설원은 괜히 두려워졌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채하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곤 아주 재미있다는 듯 설원을 도발했다.
“질투 나서 딱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을 당신도 느껴보란 뜻이지.”
그 말의 뜻을 설원은 곧 알게 되었다.
토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채하가 우주를 앙증맞게 차려 입히곤, 손을 붙들고 둘이서 현관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말했잖아. 나도 당신한테 질투 좀 유발해 보겠다고.”
“엄마! 우주 대왕 아빠랑 놀이동산 가요~ 거기 가면 엄청 엄청 큰 풍선을 탈 수 있대요!”
“놀이동산?”
“그래. 꼬마가 한 번도 안 가봤다고 하길래.”
“거긴 사람도 너무 많고 정신없을 텐데, 나도 같이…….”
“아니.”
아주 단호하게 채하가 설원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여유 넘치는 승자의 웃음을 지으며 우주를 품에 안아 들곤 뺨을 문질렀다.
“오늘은 우리 둘이서만 데이트하기로 했어.”
“응! 엄마. 오늘 우주, 대왕 아빠하고 데이트해요.”
“…….”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할 줄이야.
설원이 무어라 더 미련을 표하기도 전에, 채하는 우주와 함께 손을 흔들고는 현관을 나가버렸다.
홀로 거실에 남은 설원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정말로 질투가 났다. 그것도 엄청 엄청 많이.
*
“우와아~!”
우주의 자그마한 머리통이 요리조리 돌아가는 걸 보며, 채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리 와. 꼬마. 사람 많은 데선 손을 꼭 잡고 다녀야 해.”
“네! 대왕 아빠!”
채하의 손을 꼭 붙들면서 우주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두 사람의 앞에는 그야말로 어린이들의 원더랜드, 거대한 놀이동산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은 육아 초보인 채하가 아이만 셋인 정 실장에게 물어 얻어낸 고급 정보였다.
아이들은 이런 시끌벅적한 곳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
특히나 섬에만 살았던 우주에게는 별세계나 다름없을 거라고, 정 실장은 자신 있게 단언했다.
역시나 우주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이 동심의 세계에 빠져드는 중이었다.
“마음에 들어, 꼬마?”
“엄청 엄청요! 여기 텔레비전에서만 봤던 게 잔뜩 있어요!”
“원하는 건 전부 타도 돼. 대왕 아빠한테 아주 좋은 게 있거든.”
잔뜩 들떠 발갛게 상기된 우주의 뺨을 보며 채하가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바로 자본주의의 특권, 프리패스권이었다.
“와아~ 까르르~!”
붕붕카를 시작으로 회전목마, 비행접시까지 우주는 작은 몸을 바쁘게도 움직였다.
놀이기구를 타는 우주의 표정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자, 이쪽 봐. 꼬마.”
“김치~ 치즈~ 어흥!”
찰칵! 귀여운 모습이 거의 나노급으로 촬영되었다.
채하가 이날 핸드폰으로 담은 우주의 사진은, 그가 평생 찍은 사진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핸드폰 갤러리가 금세 우주의 환한 미소로 채워졌다.
“응? 저거!”
풍선 열기구를 타러 가던 두 사람의 눈에 기념품 가게가 눈에 띄었다.
냉큼 우주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대왕 아빠! 우주도 호랑이 귀 달고 싶어요~.”
우주의 손끝을 따라간 곳에 있는 건 각종 동물 귀 모양의 머리띠와 모자들이었다.
그걸 보자 마침 채하에게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군. 저걸 쓰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면 되겠어. 꼬마, 호랑이를 원하나?”
“응! 우주 호랑이 좋아해요. 어흥!”
우주가 호랑이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흑호랑이 사건으로 잘 알고 있던 채하였기에, 그는 자연스레 호랑이 귀를 들어 계산하려 했다.
그때였다. 우주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채하의 셔츠 자락을 붙들었다.
“왜 그러지?”
“대왕 아빠도 같이해요!”
“같이?”
“네! 우주, 대왕 아빠랑 아빠 호랑이 아기 호랑이 하고 싶어요~!”
생글거리며 아빠 호랑이 아기 호랑이를 운운하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채하가 씩 웃었다.
“꼬마. 사람을 꼬시는 법을 다섯 살에 터득하다니, 역시 대단하군.”
어리둥절해하는 우주의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그는 호랑이 귀 머리띠를 더 집어 들었다.
설원의 것까지 총 세 개를.
거기에 우주 얼굴의 두 배만 한 솜사탕까지 사 들고, 둘은 고대하던 풍선 열기구에 올랐다.
자그마한 아이의 몸을 번쩍 들어 잘 보이도록 안아주자 우주가 환호를 질렀다.
행여 위험할까 주의를 기울이던 채하는 자신의 변화가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그동안 아이라는 존재는 생각도 해본 적 없던 그였다.
어디 그뿐이던가.
이렇게 사람 많고 번잡한 곳에 올 생각도 예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오직 일만 하며 살았고, 그 단순함에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애초부터 채운 그룹의 차남으로 태어난 이상은 어느 정도 길이 정해져 있는 삶이었다.
딱히 행복이랄 것을 느낀 적도 없지만, 그런 추상적인 감정을 갈구하지도 않았다.
본디 모르는 존재에 대해서는 갈증도 느끼지 않는 법이기에.
한데…….
“맛있어, 꼬마? 볼에 수염이 생겼다.”
“엄청 엄청 맛있어요. 대왕 아빠도 먹어요. 아~.”
솜사탕을 뚝 떼어 제 입에 넣어주는 끈적한 손가락이, 이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니 그저 감회가 새로울 뿐이었다.
동그란 볼이 씰룩일 때마다 저절로 웃음이 나게 할 수 있다니 이런 마법이 또 없었다.
민설원이, 그녀가 제게 이 놀랍고도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주었다.
물끄러미 우주를 바라보던 채하는 문득 떠오른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꼬마.”
“네! 대왕 아빠~.”
“그…… 재윤 아빠는 뭐 하는 사람이야?”
말하고도 살짝 유치한 감이 있었으나, 우주와 둘이 있는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적기였다.
가장 마음에 걸리던 최재윤이라는 존재를, 아이의 시각으로 들을 기회이기도 했다.
“응~ 재윤 아빠는 우리 섬 1호 아빠예요!”
볼에 끈적한 설탕을 묻힌 채 우주가 해맑게 답해주었다.
1호 아빠라는 호칭이 여전히 거슬리긴 했지만, 그래도 1호보단 대왕이 위인 것 같아 이 문제는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재윤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랑 배도 타고~ 가게도 해요!”
“우주랑 엄마한테 잘해줬어?”
“네! 엄마도 자주 도와주고, 우주하고도 맨날 놀아줬어요. 먹을 것도 많이 갖다 주고요!”
둥실둥실 풍선이 공중에 떠가는 동안, 우주는 재잘재잘 섬 생활을 늘어놓았다.
그걸 들으며 채하의 가슴속에는 자연스러운 의문이 피어올랐다.
저번엔 다소 격앙되어 보상을 운운했으나 실은 제대로 충분하게 보답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과연 생판 남에게 이렇게까지 온정을 베풀 수 있을까?
우주의 이야기만 들으면 정말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라 해도 믿을 판이었다.
단순히 섬에 떠밀려 온 여자를 돕는 것치곤, 과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꼬마. 엄마는 어땠어? 섬에서 잘 지냈나?”
“응~ 엄마도 우주하고 잘 지냈어요! 어린이집 가면 꽃집에서 우주가 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래?”
“네! 음. 그런데~.”
“그런데?”
우주가 잠시 머뭇거렸다.
어린아이의 머릿속에서 이걸 말해도 되나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채하는 얼른 솜사탕을 떼어 입에 넣어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꼬마. 괜찮아. 대왕 아빠랑 비밀로 하면 되잖아.”
“비밀?”
“응. 비밀.”
그 신비로운 단어는 곧 효력을 발휘해, 우주의 자그만 입술을 다시 열게 만들었다.
우주가 살짝 시무룩한 말투로 채하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엄마가 바다 저쪽을 자주 쳐다봤어요. 그리고 그럴 때 엄마가 엄청 엄청 슬퍼 보였어요. 우주 몰래…… 엄마가 울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