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 질투의 화신 (41/111)


41. 질투의 화신
2022.12.21.



 
식사를 마친 뒤 설원은 사정을 설명하고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왔다.

우주와 헤어지며 아쉬워하는 재윤의 가족을 보는 일이, 그녀로서도 맘이 편하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 진정 머물러야 하는 곳인지 혼란스러운 만큼 우주도 그럴까 싶어 걱정되기도 했고.


“휴…….”

우주에게 들리지 않도록 옅은 한숨을 내쉬며 설원은 비밀번호를 눌렀다.

0524.

채하와 자신의 결혼기념일로 된 이 번호를 누를 때마다, 언제나 손끝이 떨리곤 했다.

제가 다시 우주와 떠나버린 뒤에도 그는 이 번호를 그대로 유지할까.

애초에 3개월이라는 기간을 두고 돌아오긴 했지만, 막상 떠나게 되면 어떤 얼굴을 할까.

또다시 한숨이 새어 나오기 전, 삑 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이제야 오는군.”

“……!”

“대왕 아빠!”

열린 문 사이로 냉큼 채하에게 달려가 안기는 우주와 달리, 설원은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가 현관문 옆 벽에 몸을 붙박은 채 서 있었던 것이다.

꼭 오매불망 기다린 사람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설원은 눈을 끔벅거렸다.

왜 그러고 있냐고 물으려는데 채하가 대뜸 선수를 쳤다.


“남편을 재워놓고 몰래 둘이서만 빠져나가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우주, 재윤 아빠랑~ 할머니랑~ 할아버지 만나고 왔어요!”

“…….”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줄도 모르고, 우주가 방금 먹고 온 메뉴를 자랑스레 나열하기 시작했다.

온화한 얼굴로 우주의 조잘거림에 끄덕여주면서 채하가 흘깃 설원 쪽을 보았다.

어디 이 은밀한 외출을 해명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괜히 찔리는 기분에 설원이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게 아니라……. 권채하 씨가 너무 곤하게 자고 있길래 깨울 수가 없었어요. 다녀와서 말하려고 했고요.”

“꼬마 얘길 들어보니 둘이서만 진수성찬을 먹고 온 모양이군. 나는 혼자서 외롭게 쫄쫄 굶었는데 말이야.”

“굶었다고요? 아주머니 안 불렀어요?”

“당신 일도 끝났고, 모처럼 일요일이니 우리 셋이서 오붓하게 식사할 예정이었지. 민설원 씨가 야박하게 나만 버려두고 나갈 줄은 차마 짐작도 못 하고.”

능청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였지만, 그가 굶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명확했으므로 설원은 마냥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우주가 무척이나 가엾다는 표정으로 채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대왕 아빠…….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그래. 굶어 죽을지도 몰라.”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얼른 뭐라도 만들어 줄 테니까.”

어울리지 않게 부루퉁해 하는 채하를 지나쳐 설원은 황급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설마하니 제가 돌아올 때까지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니, 자꾸만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는 그가 당황스러웠다.


“엄마가 대왕 아빠 맛있는 거 만들어 준대요!”

“다 우리 꼬마 덕분이지. 이리 와. 목말 태워줄게.”

“와~! 신난다!”

거실에서 격한 놀이를 시작한 둘을 뒤로하고, 설원은 최대한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 간단한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좋은 냄새가 나는데.”

“아, 마침 부르러 가려고 했어요. 다 됐으니까 얼른 들어요. 배고프다면서요.”

“대왕 아빠! 우주가 옆에 있어 줄게요~ 혼자 먹으면 심심해요!”

“누구 아들인지 참 다정도 하다니까?”

빙긋 미소를 짓곤 채하가 우주와 나란히 식탁에 앉았다.

곧 그의 앞에 버터 향이 솔솔 나는 볶음밥이 놓였다.

가운데엔 모양이 잘 잡힌 반숙 달걀프라이까지 앙증맞게 올라가 있었다.

정말로 배가 많이 고팠던 건지, 채하는 냉큼 수저를 들었다.

입안으로 가져간 밥을 음미하듯 천천히 맛보며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먹을 만해요?”

괜히 긴장되어 설원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고 보니 돌아온 뒤로 채하가 음식을 해준 적은 있어도, 그녀 쪽에서 해준 적은 없었다.

평가받는 것도 아니건만 저도 모르게 시선이 채하의 입술에 머물렀다.

이윽고 그가 이 음식에 대해 감상을 내놓았다.


“변함없이 맛있네. 아주 그리운 맛이 나. 당신 반숙 만드는 솜씨도 여전하고.”

그렇게 말하며 채하는 계속해서 수저를 바삐 놀렸다.

정작 설원은 그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다.

이번에는 기억 안 나는 척하는 상황을 이용해 떠는 능청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설원의 음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에 본가에서 함께 살 때 채하가 유독 늦는 날이면, 허영주는 퇴근한 안산댁 대신 밥을 지으라고 시키곤 했다.

어차피 집에서는 그가 저녁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괜한 심술이었다.

시킨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설원은 반숙 달걀프라이를 올린 간단한 볶음밥을 만들어 식탁에 올려두곤 했었다.

만에 하나라도 굶었다면 먹어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그걸 진짜로 먹었다고?’

설원이 아침에 나와 보면 식탁은 항상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당연히 안산댁이 치웠다고만 여겼지, 정말 채하가 먹었으리라곤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거기다 제가 아는 권채하는 일 외의 모든 것에 무심했기에, 안산댁이 한 요리와 제가 한 요리의 차이 따위를 구분할 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한데 그게 설원이 만든 음식이라는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니.

자꾸만 과거의 그녀가 알던 그가 전부가 아닌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민설원. 당신, 그거 알아?”

“……네? 뭐요?”

화들짝 놀란 설원이 고개를 들어 채하를 마주 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볼이 불룩해진 그가 뜬금없는 소리를 꺼냈다.


“내가 질투의 화신이란 거.”

“…….”

“당신이 개인적으로 만나도 되는 남자는 나하고 여기 꼬마뿐이야. 명심해.”

“권채하 씨가 언제부터…….”

토를 달려던 설원이 흠칫 말을 멈췄다.

몇 번이나 반복된 이 패턴에 이젠 단단히 걸려들어 꼼짝도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움찔거리는 설원을 보며 채하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기억 안 나겠지만, 난 원래 질투심이 강했어. 그러니까 나 빼놓고 몰래 다른 남자 만나러 나가지 마.”

“그 사람들은…….”

“알아. 당신을 도와준 분들이란 거.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질투 나는 건 질투 나는 거지. 안 그래, 꼬마?”

“응! 우주 엄청 엄청 질투 나요~.”

무슨 소린지도 모르면서 채하의 말이라면 냉큼 응수하는 우주가 귀엽고도 어처구니없어, 설원은 결국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가슴이 술렁거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질투라니, 권채하에게도 그런 감정이 존재한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묘하게 설레고,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꼭 그에게 그녀의 존재가 그만큼 크다는 것처럼 들려서.

*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개운하게 눈을 뜬 설원은 오랜만에 우주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페스티벌 개막을 무사히 마친 덕분에 모처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채하가 붙여준 기사님의 차를 타고 가는 거라 힘들 것도 없었다.


“어머, 우주. 오늘은 엄마랑 왔구나?”

“네! 엄마가 우주 데려다줬어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설원과 토끼반 선생님이 살짝 고갯짓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처음부터 상황을 귀띔해 둔 덕도 있지만, 잎새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센스 있고 눈치도 빨랐다.

덕분에 채하가 등·하원을 시킬 때도 호칭 등으로 인해 우주가 곤란해질 일은 없었다.


“자. 우주 들어가자. 아! 잠깐만. 친구들도 도착했나 보네~.”

우주의 손을 잡고 들어가려던 선생님이 어린이집 버스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곧 버스가 어린이집 앞에 멈춰서자, 줄줄이 아이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반갑게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우주의 모습을 설원은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버스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사람을 보곤, 그만 얼굴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재윤 씨?”

“어? 설원이구나.”

놀랍게도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은 재윤이었다.

다행히 선생님은 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을 인솔하느라 이쪽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사이 재윤이 그녀를 향해 반가운 기색을 비치며 다가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재윤 씨가 왜 여기에? 어제 섬으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요?”

“아아. 사실은 나 당분간 서울에 있기로 했어. 마침 여기 어린이집 버스 운전사님이 그만두셨다길래.”

“…….”

뜻 모를 소리에 설원의 당혹감은 더욱 커졌다.

그러자 재윤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항변하듯 말을 이었다.


“너랑 우주가 걱정도 되고……. 들어보니 설원이 너도 일하게 되었다면서. 그럼 우주를 옆에서 지켜봐 줄 만한 사람이 없잖아.”

“그건…….”

“권채하라는 남자는 더욱이 바쁠 테고.”

맞는 말이기에 설원은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재윤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지 않거니와, 또한 어디서 일하든 그의 자유였기에.


“설원아. 항상 우주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불안해했잖아.”

“……재윤 씨.”

“내가 근처에 있으면서 잘 살필게. 무사히 아무 일 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나도 돕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재윤의 눈동자는 이미 확고한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보다 한 살 위인 최재윤. 그는 언제나 친오빠처럼 듬직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불안을 잘 알고도 남는 사람.

더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설원으로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지키지 못한 어머니와는 달리, 우주는 반드시 지켜내야만 했으니까.

*

반면 재윤의 상경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보시는 대롭니다. 권채하 씨. 오늘부터 잎새 어린이집 버스를 운전하기로 했거든요.”

“그거 이상하군. 최재윤 씨는 섬에서 살고 있지 않았나?”

평소보다 이르게 어린이집 앞에 도착한 채하는, 버스에 기대 서 있던 재윤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반면 재윤은 별반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기왕이면 설원이랑 우주랑 가까이서 일하고 싶어서 말이죠.”

그의 말에 채하의 이마에 곧바로 핏발이 곤두섰다.


“왜 남의 아내와 아이 옆에 얼씬거리려는 거지? 보상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줄 수 있는데.”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권채하 씨.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꼭 바라는 게 따로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이를테면 설원이랑 우주라든가.”

채하가 대놓고 으르렁거리자, 재윤도 비스듬히 있던 몸을 반듯하게 일으켜 세웠다.


“아니라곤 못 하겠군요.”

“……하!”

결국 채하가 이마를 짚었다.

별렀던 사람처럼 재윤은 차분하게 그의 신경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어차피 권채하 씨와 설원이, 계약 결혼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그 기간은 옛날에 끝났고요. 지금은 당신이 억지를 부려서 붙잡아두고 있지만, 사실상 이번에 섬으로 돌아오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겠죠.”

마음을 드러낸 재윤도 보통은 아니었다.

채하를 도발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재윤이 강한 어조로 선포했다.


“당신 때문에 늘 괴로웠던 설원입니다. 더는 기대하게 하지 말고 놓아주세요.”

놓아주라……. 선 넘는 발언에 채하가 마침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어린이집 마당에서 해맑은 외침이 들려왔다.


“어? 재윤 아빠랑 대왕 아빠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우주가 가방을 메고 총총 마당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순간 채하의 가슴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질투가 폭발했다.

재윤이 우주 쪽에서 먼저 보이는 곳에 서 있긴 했지만, 그의 이름을 먼저 부른 것에 대한.

이 순간 권채하는 말 그대로 질투의 화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