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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좋아서 (40/111)


40. 좋아서
2022.12.18.


그날,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 제임스와 로라 부부는 설원에게 제안을 하나 건넸다.

파트 타임이어도 괜찮으니 원한다면 언제든 와서 일하라는.

망설이던 설원은 결국 그 제안을 수락했다.

어머니의 유서를 두고 채하와 약속한 기간은 이제 한 달 반 정도 남아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그저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것이 일이든, 혹은 자신의 마음이든 간에.


“조심해요.”

잠든 우주를 품에 안고 앞서 걷는 채하에게 설원이 조용히 속삭였다.

밤인지라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까지 가는 길이 제법 어두웠다.

센서 등만으로는 혹 부족할까 싶어 핸드폰 불빛을 비춰줄까 하던 찰나였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설원의 이마에 톡 하고 닿았다.


“……?”

고개를 들어보니 부딪친 곳은 채하의 너른 등이었다.

그가 걷다 말고 멈춰 선 것이었다.


“……왜 멈춰요? 어두운데 얼른 들어가지 않고.”

“좋아서.”

“네?”

잘못 들었나 싶어 설원이 되묻자, 어둠 속에서 그의 낮은 목소리가 유난히 부드럽게 들려왔다.


“당신이 나를 걱정해 주는 게, 너무 좋아서.”

“…….”

뜻밖의 대답이 돌아오자 설원도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잊고 말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정말 많은 일이 있지 않았는가.

저번 파티에서도 그렇고, 옛날부터 저를 괴롭히던 일당들 앞에도 주저 없이 나서주었다.

거기다 로라가 은밀하게 전해준 이야기로는 그가 일부러 저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 했다.


‘설원 남편이 설원을 무척 아끼는 것 같아요.’

 
왜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 건지, 설원의 뺨이 훅 달아올랐다.

어둠 속이라 다행이었다.


 


“얼른 들어가지. 꼬마를 눕히고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아.”

어딘가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설원의 심장이 속수무책으로 뛰었다.

어색한 태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설원은 불빛을 밝히는 대신 걸음을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곧 집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는 우주를 조심스럽게 내려준 뒤, 채하는 금세 방으로 되돌아왔다.

왜인지 평소보다 방이 비좁게 느껴져 설원은 슬그머니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

순간, 등 뒤로 지독하리만치 유혹적인 음성이 내려앉았다.


“씻겨줄까?”

“…….”

이번에는 우주가 아닌, 정확히 저를 겨냥한 말이었다.

뒤돌아보기도 쑥스러워 설원이 고개를 다급히 젓자 낮은 웃음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권채하는, 저 남자는 저런 식으로 웃는구나.

새삼 새로운 발견을 한 기분이었다.


“아니에요.”

“그래, 뭐. 꼭 욕실 안에서만 외조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씻고 나와. 기다릴게.”

“먼저 자도 되는데요.”

“그럴 수야 있나. 고생한 아내를 주물러주는 게 남편의 도리지.”

“씨, 씻고 올게요!”

분명 별말 아닌데, 왜 이토록 야릇하게 들리는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손발이나 어깨를 주물러주겠다는 뜻일 텐데,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는 게 부끄러워 설원은 잽싸게 욕실로 몸을 숨겼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채하는 느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일부러 이중적인 의미를 담아 던진 말인데, 설원을 조금은 싱숭생숭하게 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방금 한 말들은 그녀를 안고 싶은 제 욕망을 돌려 표현한 것이었다.

다만 채하는 결심했었다.

그녀를, 아내를 안는 것은 저를 기억하고 있음을 인정한 뒤여야 한다고.

설원의 마음을 얻어내고 나서,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여야만 의미가 있을 테니.

그럼에도 제 앞에서 그 단단한 눈동자가 흔들릴 때마다, 숨기지 못하고 수줍어할 때마다.

미칠 듯이 그녀를 향한 갈증이 일었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했던 그녀의 감촉이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만큼은 채하로서도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밤 설원은 평소보다 조금 바짝 붙어서 잠들었다.

손끝이 닿을락 말락 하는 게 더 심장을 간지럽혔지만, 채하는 그저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왜인지 오늘, 그는 행복의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다음 날, 푹 자고 일어난 설원은 제 손등을 감싸고 있는 채하의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깨어 있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늘 저보다 일찍 일어나곤 했던지라 이렇게 깊게 잠든 걸 보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벌써 오전 11시였기에 더욱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 틈을 타 설원은 천천히 잠든 그의 얼굴을 훑어내렸다.

남자치곤 유독 맑은 피부에 새까맣고 긴 속눈썹, 높은 콧대를 따라 완벽하게 이어지는 고운 입술 선까지.

새삼 무척이나 또렷하면서도 섬세한 이목구비라는 감상이 들었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점차 뺨이 뜨거워지고, 소녀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설원은 채하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우주의 방으로 향했다.

조용한 것을 보니 아직 자는 듯해, 설원은 1층 거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손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재윤의 어머니였다.


“여보세요.”

[설원이니? 나다. 주말인데 혹시 지금 시간 되니?]

“시간이요?”

[그래. 아저씨랑 나랑 재윤이랑 서울에 올라왔거든. 금방 온다고는 하는데, 우리가 우주가 눈에 밟혀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아아…….”

[괜찮으면 밥이나 같이 먹자고 전화했단다. 우주랑 나올 수 있니? 근처까지 왔거든.]

안 될 리가 없었다.

우주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인데, 어찌 반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계를 한 번 보곤 설원은 얼른 알겠다고 대답했다.

지금 우주를 깨워서 씻기면 얼추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채하도 깊이 잠들어 있으니, 조용히 나갔다 올 작정이었다.

*



“설원아! 우주야! 여기다, 여기.”

“아주머니. 아저씨.”

“와~! 할머니, 할아버지다! 재윤 아빠도 왔어요~.”

“우주야. 잘 있었어?”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극적으로 우주를 끌어안는 세 사람을 보며, 설원이 미소를 지었다.

친손주가 아직 없는 탓도 있겠지만, 재윤의 부모님은 우주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뻐했다.

할아버지의 품에 어느새 쏙 안긴 우주의 얼굴에도 반가움이 그득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선 매일 보던 사람들을 못 보게 된다는 건 상당히 커다란 변화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우리 아가, 그새 부쩍 통통해진 거 같다?”

재윤의 아버지가 둥실둥실 우주를 흔들며 만면에 웃음을 드리웠다.

고된 뱃일 탓에 많이 그을린 데다 웃을 때면 주름이 도드라졌지만, 언제나 설원의 마음을 편해지게 하는 사람 좋은 미소였다.


“너무 잘 먹어서 그래요.”

“설원이 너도 얼굴이 좋아졌구나.”

“아…….”

그 말이 어딘가 멋쩍어 설원이 제 뺨을 쓸어내렸다.

재윤이 그제야 설원에게 가까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봐. 어머니 말씀대로 혈색이 좋아진 것 같아.”

“뭐…… 그럭저럭 지냈어요.”

“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밥 먹으러 가자. 재윤이가 예약을 해놓고 올라왔거든.”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인사를 중간에 끊고, 재윤 어머니가 앞장섰다.

그 뒤를 설원과 재윤이 나란히 걸으며 오랜만의 근황을 나누었다.

몇 번 전화를 하긴 했었지만, 대부분 우주가 통화했기 때문에 둘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다행히 별일은 없나 보네.”

“네. 덕분에요. 재윤 씨도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죠?”

“나야 뭐 늘 똑같지.”

아버지를 꼭 닮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재윤이 덤덤히 답했다.

기분 탓인지 조금 불편해 보였지만, 설원은 깊이 캐묻지 않았다.

그녀가 우주를 데리고 채하의 곁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뒤부터,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생겨난 것도 사실이었기에.

곧 일행은 예약해 둔 식당에 도착했다.


“자, 우리 우주. 많이 먹어라.”

“네~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이 드세요~.”

“아이고. 우리 아가 효자네, 효자야.”

넘치는 음식만큼이나 도란도란 정다운 대화가 넘쳐흘렀다.

섬에서 지낼 때도 자주 함께 식사했던 그들이기에, 이런 일상은 우주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주는 재윤의 부모님을 할머니 할아버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아주 지극히 평범한 가족으로 보일 것 같다고, 문득 설원은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허영주와 권강호를 떠올리자 왠지 입안이 썼다.

둘이야말로 진짜 우주의 할머니 할아버지였지만, 어딘가 조화롭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권강호는 그렇다 쳐도 허영주는 만날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저를 노려보지 않았던가.

제 아이인 우주 역시 탐탁지 않게 여길 게 자명했다.

한데 어째서 어린이집까지 찾아와 과자를 주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좋은 의도가 아닐 것만은 분명했으니, 절대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갑자기 심각해져선.”

“아…….”

퍼뜩 정신을 차리니 재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설원은 얼른 표정을 풀고 웃어 보였다.

안 그래도 이곳에 오는 걸 반대했는데, 재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재윤 씨도 많이 먹어요. 여기 맛있네요.”

설원이 살뜰히 재윤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

그 모습을 재윤의 부모님은 약속이나 한 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 재윤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설원아.”

“네. 아주머니.”

“재윤이한테 얘기는 들었다. 사정이 있어서 3개월 동안 여기에 있기로 했다고.”

“네……. 그렇게 됐어요.”

“당연히 돌아올 거지?”

순간 설원의 말문이 턱 막혔다.

대답이 빠르게 나오지 않자, 그들의 눈동자가 모두 설원에게로 모였다.

이상했다. 그럴 거라고 말하면 되는데,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데.

허공에 멈춘 젓가락처럼 설원의 입술도 움직임을 멈춘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재윤의 아버지가 새삼스레 강한 어조로 권유했다.


“돌아오거라. 설원이 너하고 우주, 우리랑 섬에서 평화롭게 살자. 아무 풍파 없이.”

“아저씨…….”

“네 아버지가 너를 우리한테 보낸 건, 끝까지 지켜주라는 뜻이 아니겠니. 네 아버지께서 그리해주신 것처럼 말이야. 우리는 설원이 너랑 우주가 힘든 꼴은 눈 뜨고 절대 못 본다.”

“……명심할게요.”

“그래. 늘 하는 말이지만, 남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생각해주렴.”

“네. 아주머니, 아저씨. 감사해요.”

“감사는 우리가 해야지. 너한테는 아무리 해줘도 다 갚을 수가 없을 테니까.”

대화에 끼지는 않았으나 재윤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돌아올 거냐는 질문은, 아마도 그가 가장 묻고 싶었던 말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설원의 대답이 예상을 빗나갈 것이란 것도 틀림없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이는 와중, 설원 또한 제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오늘 아침 보았던 권채하의 얼굴이었을까.

어째서 5년 전에는 그녀를 떠나게 만든 남자가, 지금은 떠나기 어려운 이유가 되는 걸까.

혼란스러웠다.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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