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남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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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남편이니까
2022.12.14.
“뭐…… 뭐야. 당신……!”
“그, 그래요! 뭔데 우리 일에 끼어드는 거예요?”
일행 중 유독 마른 한 여자가 민영이란 여자 옆에 지원군처럼 나섰다.
하나 그 지원 태세는 되레 채하의 분노만 부추길 뿐이었다.
“글쎄, 그쪽들이 말하는 재벌이 바로 나 같아서 말이지.”
“……!”
“또 하나. 당신들,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나 본데.”
채하가 성큼 다가와 서자, 큰 체격만으로도 위협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서늘하다 못해 살기를 뿜는 그의 모습에 세 여자가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채하는 냉랭한 눈빛으로 한순간에 그들의 발을 묶어버렸다.
“민설원은 아무것도 판 게 없어. 그 누구에게도. 오히려 내가 민설원한테 영혼을 팔았지.”
“뭐……?”
“기대와는 달라서 실망인가? 내 아내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려서 재벌을 낚았을 거라고 멋대로 떠들었나 보군.”
움찔, 어깨를 떠는 것을 보니 여기저기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닌 건 기정사실인 모양이었다.
제임스의 말에 의하면 자연스럽게 세 사람이 퇴사했다고 했는데, 그것마저도 ‘모함을 당했다’고 표현하는 걸 보니 퍽 억울했던 듯했다.
자기가 뿌린 씨앗은 생각 못 하고 남에게만 어긋난 앙심을 품는 꼴이, 채하로서는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그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들.
“어쩌나. 내가 민설원 씨랑 결혼하고 싶어서 엄청나게 매달렸는데. 아무리 비싼 선물을 안겨주고 빌어봐도 밀어내고 또 밀어내서, 얼마나 힘겹게 결혼했는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해.”
“권, 권채하 씨.”
당황한 설원이 끼어들려 했지만, 채하는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세 여자를 향해 피식 비웃음을 흘리더니, 이번에는 정반대로 아주 다정한 얼굴을 하고 설원을 바라보았다.
“내 아내는 누구들하고는 격이 다른 여자라서 말이야.”
그 말에 세 여자의 얼굴이 일제히 벌게졌다.
여전히 채하는 서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고 있었다.
두 여자는 이미 쭈그러져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민영이란 여자는 보통은 아닌 듯했다.
그녀가 악에 받쳐 표정을 구기며 채하와 설원,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명색이 재벌이라는 사람이 여자들 사소한 싸움에나 끼어들고, 할 일도 되게 없나 봐요?”
“어, 언니! 우리 그냥 가요.”
“그래요. 민영 언니.”
“아, 이거 놔 봐! 저따위 말이나 듣고 왜 우리가 물러서야 해?”
“안 물러서면, 어쩔 건데?”
콰직, 바닥에 깔린 화분 파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두 여자가 그 소리에 소스라치며 민영의 팔을 냉큼 붙들었다.
“가요. 언니! 일단 가요.”
“이거 놓으라니까! 재벌이면 다야?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짜증 나!”
서로를 질질 끌며 사라지는 세 사람을 보며 채하가 다시 혀를 찼다.
생각 같아선 아주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런 걸 설원이 원하지는 않을 터였다.
보아하니, 어차피 머지않아 자멸할 것 같았고.
“권채하 씨.”
어느새 다가온 설원이 채하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러고는 저 뒤쪽에 서 있는 우주를 발견하곤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아마 채하가 얌전히 서서 기다리라고 지시한 모양이었다.
곧 우주가 쪼르르 달려와 채하의 다리에 매달렸다.
팔다리 모두를 모자에게 붙잡힌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긋 입가를 풀며 웃어 보였다.
“대왕 아빠! 악당 물리친 거예요?”
“그래. 도망가는 거 봤지?”
“응! 엄마 괴롭히는 나쁜 사람들! 악당이에요!”
해맑게 좋아하는 우주를 보니 여기서 심각하게 굴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설원은 가볍게 핀잔을 건넸다.
“……굳이 안 끼어들었어도 됐는데요.”
“아니. 끼어들 자격은 충분하지. 옛날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당신 남편이니까.”
마치 벼르고 있기라도 했던 듯한 채하의 말투에, 설원도 항변하듯 말을 이었다.
“나도 어차피 참고만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뭐라도 던지려고 했다고요.”
그녀의 말에, 우뚝 채하가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있던 우주가 어리둥절해하며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채하의 시선이 설원의 손에 들린 꽃에 머물더니, 아주 심각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 그 예쁜 손으로 아무한테나 꽃 던져주지 마.”
“…….”
말문이 턱 막혀 설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즘 들어 그는 점점 더 표현에 거침이 없어지고 있었다.
다소 느끼하다면 느끼할 수도 있는 말을, 집에서나 밖에서나 이렇게 숨 쉬듯 쉽게 내뱉는 권채하라니.
하지만 채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우주가 작은 턱을 마구 끄덕이고 있어, 이번에도 무어라 세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곧 채하가 자신의 발언에 정당한 이유를 덧붙였다.
“꽃은 저런 인간들에게 던지기엔 너무 아까워. 안 그래, 꼬마?”
“응! 예쁜 꽃 아까워요!”
자꾸만 우주의 입을 빌리는 채하가 우습기도 해 설원은 이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예전에도 로라 앤 제임스에서 일할 때 그 세 사람을 보며, 꽃을 만지기엔 적절치 않은 사람들이라 여기지 않았던가.
“자, 화분 얼른 치우고 가자.”
“으응~! 우주도 도와줄게요!”
“안 돼. 꼬마는 위험하니까 엄마 손 꼭 붙잡고 있어. 대왕 아빠가 금방 치울게.”
“알았어요. 대왕 아빠! 우주 말 잘 들을 거예요~.”
우주가 방긋거리며 다가와 설원의 손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 채하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던 아이의 손에서, 무척이나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아마도 그의 온기일 터였다.
손뿐만이 아니라, 마음이 따스해지는 기분에 설원은 아이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부서진 화분 파편을 남김없이 치우는 채하의 모습을 보며 설원은 방금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당신 그 예쁜 손으로 아무한테나 꽃 던져주지 마.’
객관적으로도 설원은 분위기 있는 미인이었기에, 예쁘다는 말은 늘 아쉽지 않을 정도로 들어왔다.
인사치레든 진심이 담긴 찬사든.
하나 권채하가 입에 담은 ‘예쁘다’는 발언만큼, 그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 것은 없었다.
어째서일까.
그가 변한 것처럼 자꾸만 자신도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된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권채하라는 남자는 자꾸만 설원이 쌓은 벽을 허물어뜨렸다. 그것도 너무나 손쉽게.
‘어……?’
설원의 생각이 문득 어떤 생각에 가 닿았다.
설마 그가 은방울꽃을 좋아한다는 이유라는 게…….
‘아냐. 아냐.’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설원은 방금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몰아냈다.
둘 사이에 첫 만남의 계기가 된 것이 은방울꽃이라서, 라니.
이 얼마나 자만 가득한 생각인지, 채하는 그저 은방울꽃이 값비싸고 고귀한 꽃이라 좋아하는 것일 터였다.
곧 설원이 아는 가장 고귀한 남자가 손의 흙을 털며 일어섰다.
“자, 다 치웠으니까 가지.”
*
“그럼 중앙정원을 공개하겠습니다~!”
펜스가 사라진 자리엔 리본과, 그 리본을 자르러 모인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윽고 행사의 총책임자가 가운데를 싹둑 잘랐다.
“너무 예쁘다!”
이곳저곳에서 감탄사가 쏟아져나왔다.
채하와 우주도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미니 정원들 사이로, 설원이 조성한 중앙정원이 존재감을 뽐냈다.
그녀의 작품은 한눈에 봐도 어떤 테마인지 알 수 있었다.
지구와 태양, 그리고 달. 고리를 달고 있는 토성과 반짝이는 금성까지.
어린이의 눈으로 봐도 쉽도록, 간결하면서도 신비로운 우주가 색색깔 꽃들로 표현되어 있었다.
“우주예요! 대왕 아빠.”
곧바로 알아본 우주가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우주네. 엄마가 꽃밭에 우주를 옮겨왔나 보군.”
잘 보이도록 우주에게 목말을 태운 채로, 채하는 바로 앞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지방 신문사에서 나온 기자가 설원을 인터뷰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정원의 테마가 참 독특한데요. 어떤 작품인지 직접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디 보자. 작품명이 ‘나의 우주’로군요!”
“네. 여름의 생명력 넘치는 꽃들을 행성처럼 배치해 보았습니다. 중간에 이게 지구라고 한다면, 주변의 꽃들은 행성인 셈이죠.”
“아하! 그래서 꽃들 색깔도 이렇게 특색이 있군요! 우주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네. 저의 세상이니까요.”
그 말을 하는 설원의 시선이 문득 맞은편에 있는 두 사람에게 닿았다.
어느 순간 그녀의 세상이 되어버렸던 남자, 권채하.
그리고 그와의 사이에서 얻은 소중한 아이, 우주.
두 사람은 그야말로 그녀의 우주였으므로.
“설원! 원더풀! 너무 멋진 정원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비로소 자유로워진 설원을 향해, 로라와 제임스가 화색을 띠며 다가왔다.
“역시 우리 설원 씨야. 정원이 아니라 이거 거의 예술 작품 아닌가?”
“사장님도 참…… 그렇게 추켜세우지 마세요.”
제임스의 과찬에 설원이 부끄러워하며 웃음을 지었다.
“진짠데. 그나저나 우주랑 미스터 권은?”
“아. 우주가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해서요.”
“오케이. 우리도 일 대강 끝냈으니까, 오늘 저녁엔 이 근처에서 축하 파티나 열어요. 설원! 내가 오기 전에 찾아봤는데 맛집이 많대요.”
“고마워요. 로라.”
설원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로라 앤 제임스 앞에 걸어두겠다며 설원의 작품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였다. 로라가 슬그머니 설원에게 다가오더니, 손나팔을 만들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설원. 사실 이건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
“실은 설원 남편이 일을 부탁한 거예요. 저번에 설원 집에 놀러 갔을 때요.”
“네? 그게 무슨……?”
뜻밖의 말에 놀라는 설원의 귀에 로라가 손을 더욱 바짝 붙이곤, 진실을 털어놓았다.
“미스터 권이 설원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했거든요. 아내가 다시 일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하길래, 마침 우리도 설원이랑 일하고 싶어서 제안한 거예요.”
“아…….”
“내가 말했다고 하면 안 돼요?”
이윽고 손을 떼어낸 로라가 설원을 향해 생글생글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평소의 발랄한 모습과 달리 조금 진지하게, 그녀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설원한테 그동안 어려운 일이 많았을 거란 건 짐작해요. 그래도 미스터 권을 한번 믿어보는 건 어때요? 이건 내 느낌이지만, 설원 남편이 설원을 무척 아끼는 것 같아요.”
“로라…….”
“힘들 땐 좀 기대어도 되지 않겠어요? 설원 남편이니까.”
남편이니까…….
채하도 아까 같은 말을 했었다. 남편이니까 끼어들 자격은 충분하다고.
설원은 본디 말보다 행동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과거의 권채하가 자신을 얼마나 무정하게 취급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달라졌다는 점은, 확실히 부정할 수 없었다.
권채하의 행동은 로라의 말대로 누가 봐도 그녀를 아끼는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혹여 옛날에도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무언가 오해가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와 진실한 대화와 마음을 나눌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엄마! 우주 쉬야 하고 왔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를 향해 저쪽에서 우주가 밝은 목소리로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 듬직하게 우주의 손을 붙잡고 있는 채하를 바라보며, 설원은 순간 낯설면서도 솔직한 희망을 품었다.
어쩌면…… 지금부터라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