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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당신이 더 예뻐 (38/111)


38. 당신이 더 예뻐
2022.12.11.


그의 말대로 도통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으나 설원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

다행히 채하가 새로운 제안을 건네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오늘 오후에 같이 우주를 데리러 갈까?”

“같이요?”

“그래. 생각해 보니까 둘이서 같이 데리러 간 적은 없잖아.”

확실히 둘이 함께 가면 우주가 무척 좋아할 터였다.

하나 계속 이런 식으로 그의 지분을 늘려도 되는 걸까.

길어지려는 고민을, 채하가 냉큼 잘라냈다.


“이런저런 어려운 생각 하지 마. 그냥 나도 꼬마가 보고 싶고, 당신도 우주가 보고 싶으니까 데리러 가는 것뿐이야. 어차피 대왕 아빠라고 부르는데 복잡할 것도 없잖아.”

그러니까 그게 제일 복잡한 거라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채하를 이길 말재간이 떠오르지 않아 설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럼 이따가 내 차로 다시 데리러 올게.”

“네? 아니에요. 알아서 어린이집으로 가면 되는데…….”

“외조를 하려면 확실히 해야지. 시간 맞춰서 올 테니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

혹시 실직이라도 했나 싶어 설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채운의 부사장이 실직할 일은 없을 테니, 그의 말대로 외조의 일환이라고 봐야 할 터였다.

게다가 어쩐지 그가 저와 우주를 우선시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해서 설원은 결국 그에게 또 휘말리고 말았다.


“알겠어요.”

 

 


“엄마! 대왕 아빠!”

잎새 어린이집을 빠져나오던 우주가 두 사람을 발견하곤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뒤에서 함께 나오고 있던 어린이들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어? 그때 그 멋진 아저씨다!”

“우주네 대왕 아저씨!”

“대왕 아저씨 아니야. 대왕 아빠야~.”

우주가 작은 어깨를 으쓱하더니만 두 사람에게 뛰어왔다.

무릎을 껴안는 우주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채하가 양손 가득 들린 것을 건네주었다.

수북한 과자 봉지였다.


“자, 우리 꼬마. 친구들 나눠주자.”

“우와! 과자 엄청 엄청 많아요!”

“우주네 대왕 아빠가 과자 준다!”

“나도! 하율이도!”

“나도 먹을래!”

곧 우주의 주변으로 아이들이 쪼르르 모여들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들 뒤로 어린이집 선생님이 나오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곤 냉큼 다가왔다.


“어머, 안녕하세요. 우주 어머님. 그리고 아…….”

말을 이으려던 선생님이 흠칫하며 말을 흐렸다.

슬쩍 설원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얼른 주제를 아이들로 돌렸다.


“우주 데리러 오신 거예요? 과자도 사 오시고, 번번이 감사해서 어쩌죠?”

“네? 번번이라뇨?”

설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선생님이 더 의아한 눈으로 채하 쪽을 바라보았다.

이걸 비밀로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그 기류를 보아하니 듣지 않아도 대충 자초지종을 알 것 같았다.

채하가 이 잎새 어린이집에 퍼다 나른 것들이 꽤 되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과자를 주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면서요?”

“사람 나름 아니겠어?”

은근히 핀잔을 건네는 설원을 향해 채하가 곧바로 능청스레 응수해 왔다.

그의 대꾸에 설원도 결국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둘의 시선 너머 우주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친구들과 과자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풍경을 보게 해주는데 그를 더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채하와 약속했던 3개월의 기간 중 어언 반이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7월의 꽃 페스티벌이 찾아왔다.

여름 기운이 물씬 풍기는 해안 도시엔 주말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설원은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함께 오긴 했지만, 우주와 온전히 놀아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주야. 엄마는 일하고 와야 하니까, 여기 아…… 아니, 대왕 아빠랑 잘 있을 수 있지?”

“응! 우주 대왕 아빠하고 있을 거예요.”

“내가 잘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마.”

어느새 우주를 한 팔에 가볍게 안아 든 채 채하가 여유롭게 답했다.

너무도 듬직해 보이는 그 모습에, 설원의 말이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


“오전에는 전반적으로 꽃들 상태 체크하느라 바쁠 거예요. 중앙정원은 오후에 오픈하니까, 그때 우주랑 같이 구경하러 와요.”

“로라랑 제임스는?”

“행사 개막이라 책임자 만나러 갔어요. 두 사람도 오후에 중앙정원에서 만나기로 했고요.”

“그렇군. 오붓하게 우리 가족끼리 있으면 되겠어.”

우리 가족이라니……. 설원은 신기한 듯 채하를 물끄러미 보았다.

하지만 그는 제가 한 말에서 조금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하기야 방금 그녀 자신조차 그를 자연스레 우주에게 ‘아빠’라 칭할 뻔하지 않았는가.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채하가 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럼 일 잘하고 있어. 우주랑 이따 갈게.”

“엄마! 우주, 대왕 아빠랑 놀다 올게요~.”

채하의 품에 안긴 채 우주가 앙증맞게 두 손을 흔들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덩달아 손을 흔들며 미소 짓던 설원은, 채하의 시선이 제 입가에 머문 것을 보고 퍼뜩 손을 거뒀다.

그러자 그가 느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계속해도 되는데, 왜.”

“당신한테 흔든 거 아니에요.”

“그래? 아쉽군. 당신이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손 흔들어주니까 설레던 참인데.”

“예…….”

불쑥 들어온 멘트에 설원은 입을 달싹거렸다.

안 그러던 사람이 매일 같이 이런 말을 쏟아내니 좀처럼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예전엔 안 그러지 않았느냐고 따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런 그녀를 살피듯 지그시 응시하더니, 채하가 웃음기 어린 말투로 능청을 떨었다.


“민설원 씨가 또 쑥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는군. 뭐, 그래도 여기 어떤 꽃보다 당신이 더 예쁜 건 사실이야. 안 그래, 꼬마? 엄마가 제일 예쁘지?”

“응!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최고로 예뻐요!”

봐, 하는 표정으로 채하가 설원에게 의기양양한 눈빛을 던졌다.

동심까지 이용해 공격하다니 반칙이었다.


“가, 가볼게요!”

빠르게 달아오르는 뺨을 두 손으로 가리며 설원이 급히 퇴장하자, 뒤에서 채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예쁘다는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쿵쿵 뛰었다.

아무래도 설렌 쪽은 오히려 자신인 것 같았다.


 
시야에서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던 채하가, 이어 품 안의 우주를 다정히 바라보았다.


“자, 그럼 꼬마. 우리도 꽃구경 좀 해볼까?”

“응! 우주 꽃 좋아해요!”

해맑게 방글거리는 우주의 뺨에다 채하는 아쉬움을 달랠 겸 입을 맞추었다.

보드라운 감각이 너무도 순수하고 순수해 감동적일 정도였다.

설원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제 아이.

꽃보다 아름다운 두 사람과 함께 주말을 보낼 수 있다니, 이런 게 바로 행복일 터였다.

이런 행복을 진작 알지 못했던 저를 새삼 탓하며 그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행사장은 무척이나 넓었다.

보통 꽃 축제는 봄철이 주를 이루지만, 이 해안 도시에서는 여름철 피서객들의 발길을 이끌기 위해 이번에는 파격적으로 여름철에 개막하는 시도를 했다.

다양한 꽃들로 꾸며진 거대한 조형물들은 단번에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물론 채하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는 건 해맑게 웃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우주의 모습이었다.


“와! 여기 엄청 엄청 큰 공룡이 있어요!”

“신기하다~ 이 꽃은 색깔이 파래요!”

지치지도 않고 조잘대며 우주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행여 하나라도 놓칠세라 채하는 분주히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 갤러리가 아이의 사진으로 채워지는 날이 오다니, 스스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분수대에서 물도 튀기고, 어린이용 열차도 타고, 핫도그도 사주고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오물오물 소시지를 씹고 있는 우주를 내려다보니 저절로 입매가 느슨해졌다.


“슬슬 엄마한테 가 볼까?”

“응! 엄마도 핫도그 줄 거예요.”

“우리 꼬마, 아주 효자로군.”

빙긋 웃으며 채하가 우주의 입가에 잔뜩 묻은 케첩을 닦아주었다.

자그마한 손을 꼭 붙잡고서 채하는 설원이 일하는 곳으로 향했다.

제대로 점심도 챙겨 먹지 않을 게 훤했기에, 그녀 몰래 아침에 싸둔 도시락을 챙겨 들고.

목적지는 다행히 두 사람이 있던 곳에선 그다지 멀지 않았다.

넓은 페스티벌 부지 중에서도 가장 안쪽, 뒤로 산자락을 끼고 있는 곳이 바로 중앙정원 구역이었다.


“어? 엄마다!”

우주가 잽싸게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간이 펜스가 쳐진 구역 안쪽에서, 그녀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가움에 얼른 엄마에게 달려가려는 우주를 채하가 붙잡았다.


“쉬잇, 우리 잠깐 엄마 일하는 거 지켜볼까?”

“응! 대왕 아빠. 쉿!”

채하가 입술에 손을 얹자 우주가 깜찍하게도 똑같이 동작을 따라 했다.

덕분에 채하는 조금 멀찍이서 설원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5년 만에 재회해 어찌어찌 집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설원의 표정엔 늘 희미한 불안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안에 커다란 상처가 기반하고 있을 것은 자명했고.

그녀의 매력적인 눈망울이 전과 달리 눈물로 번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던 채하였다.

한데 지금 그의 앞에서 열심히 꽃을 점검하는 설원의 눈빛은 예전 그대로였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던, 긍지를 가진 눈동자.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 잊지 못했던 민설원의 단단한 눈빛.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사랑스러워, 채하는 저도 모르게 우주의 손을 꼬옥 쥐었다.

그러자 기특하게도 우주가 자그마한 두 손으로 커다란 손을 감싸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

순간 채하는 숨이 턱 막혔다.

눈앞에 그녀를 꼬옥 닮은 예쁜 눈망울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 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채하는 생각했다.

목숨이라도 버리라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때였다.

부자의 다정한 분위기를 훼방 놓는 앙칼진 음성이 저쪽에서 들려왔다.


“이야~ 이게 누구야? 민설원 씨 아니신가?”

“……선배?”

“선배는 무슨! 네가 언제 선배 대접이나 해줬다고 그렇게 불러?”

“세상에. 몇 년 만이죠. 민영 언니? 우리가 얘 때문에 로라 앤 제임스에서 괜히 모함이나 당하고 잘린 거 아니에요!”

“그러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여기서 널 다 보네.”

설원을 둘러싸고 있는 세 사람은 채하도 일면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그녀를 처음 만난 날, 일을 죄다 떠넘기고 뒤에서 험담이나 하다가 결국 설원을 곤란에 빠트린 주역들이었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손상된 은방울꽃에 대해서도 설원에게 독박을 씌웠던 인간들이었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들은 조금도 변함이 없어 보였다. 특히 인성이.

저마다 화분이며 꽃삽 등 짐을 들고 있는 걸 보아, 그들도 업무차 온 모양이었다.

이윽고 민영이라는 여자가 심술보가 그득한 얼굴을 씰룩이며 시비를 걸었다.

그야말로 앙심이란 앙심은 다 품고 있는 표정이었다.


“듣자 하니 너 무슨 재벌가에 시집갔다면서?”

“…….”

“예전엔 오너한테 알랑대더니, 이젠 더 돈 많은 남자로 갈아탔나 보네? 몸뚱이라도 팔…….”

순간 와장창, 세 여자의 주위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옆으로 날아와 깨진 화분 파편에 놀란 그들이 꺅 비명을 질렀다.

하나 그 비명은 서슬 퍼런 채하의 목소리에 도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그 입, 말조심하지.”

“……!”

화분이 아니라 이번엔 그들을 던져버릴 기세로, 채하가 잇새로 거친 분노를 토했다.


“예나 지금이나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들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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