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외조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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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외조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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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외조의 정석
2022.12.07.
다음 날, 거짓말처럼 날이 맑게 개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설원이 눈을 떴을 땐 이미 채하가 우주를 씻기고 등원 준비까지 다 마친 후였다.
이쯤 되니 육아에도 소질이 있다는 그의 주장을 부정하기도 어려워졌다.
반짝반짝 말간 얼굴을 빛내며 우주가 채하를 향해 공손한 배꼽 인사를 건넸다.
“대왕 아빠, 회사 잘 다녀오세요~.”
“그래. 꼬마. 저녁에 만나자.”
어느새 자연스레 출근 인사까지 나누는 둘을 보는 설원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회사 잘 다녀오라는 말에도 배꼽 인사를 곁들이다니, 예절 하나는 잘 가르친 것 같아 무척이나 흡족했다.
“당신은?”
“네?”
저도 모르게 풀어지던 입가를 설원이 잽싸게 동여맸다.
그러자 채하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유혹적인 눈빛을 던졌다.
“꼬마도 이렇게 다정하게 인사해주는데, 정작 아내의 인사가 없으면 서운하지 않겠어?”
“새삼스럽게 인사는 무슨 인사예요.”
“예전에 늘 하던 대로 해 달라는 거지. 골라봐. 넥타이 매주기, 가벼운 포옹, 아니면 모닝 키…….”
“우, 우주야. 얼른 나가자. 기사 아저씨 기다리실 거야.”
설원이 총총걸음을 옮겨 우주를 낚아채듯 현관으로 달아나자, 뒤에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그럴수록 난 오기가 생긴단 말이지.”
“…….”
“반드시 전처럼 진한 인사를 받고 말 거야.”
못 들은 척하며 설원은 우주를 데리고 밖으로 먼저 나섰다.
진한 인사라니, 둘 사이엔 있던 적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꾸만 틈새를 노리는 채하의 도발에 괜히 쑥스러워진 그녀는 평소보다 더 걸음을 서둘렀다.
30분 뒤, 로라 앤 제임스 플라워숍.
날이 개어서 그런지 유독 통창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눈부셨다.
마침 가게 문을 열고 있던 제임스가 설원을 발견하곤 반갑게 손을 휘저었다.
“설원 씨! 굿모닝.”
“좋은 아침이에요. 제임스. 꽃 내리는 것 좀 도울까요?”
“아냐. 편하게 설원 씨 할 일 해. 이런 자잘한 일까지는 신경 안 써도 괜찮아.”
“그래도 숍 일도 바쁘잖아요.”
“지금은 바쁜 시즌이라고 할 수도 없지. 자자, 얼른 들어가. 우리 설원 씨는 끝내주는 중앙정원을 꾸며서 로라 앤 제임스의 명성을 높여줄 생각만 하라구~.”
“사장님도 참.”
그의 너스레에 설원이 눈웃음을 지었다.
로라 앤 제임스는 더 이상의 명성이 필요 없을 수준이 된 지 오래였기에.
하지만 특유의 상대를 편하게 만들어주는 배려가 그녀는 늘 고마웠다.
“그럼 오늘은 제가 점심 살게요. 사장님께서 저번에 맛있는 거 사주셨으니까요.”
“좋아. 비싼 거 먹을 거니까 각오해둬. 설원 씨?”
“알겠어요. 드시고 싶은 걸로 생각해두세요.”
몇 마디 더 담소를 나누고 난 뒤 설원은 숍 뒤쪽의 화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로라 앤 제임스는 도심 한복판에서도 뜰을 가꾸며 숍을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설원도 이곳을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아주 넓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 들판 같은 기분을 갖게 하는 곳.
화원 안에 들어서면 밀려오는 꽃향기들은 언제나 그녀의 마음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인공적인 느낌 없이 자연스럽게 배치된 형형색색의 꽃들 사이를 지나자, 설원이 작업 중이던 공간이 나왔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테이블 위에 놓인 앞치마를 두르며 설원은 그 소중한 공간에 쪼그려 앉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꽃을 만질 때 가장 행복한 그녀였다.
그렇기에 섬을 떠나 여기서도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해준 제임스가, 그저 고마웠다.
*
몇 시간이 지났을까.
화원 건너편, 본 건물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라 앤 제임스는 큰 규모만큼 고용된 직원과 아르바이트생도 많아 늘 복작거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소란스러운 일은 짐작 가는 게 없었다.
해서 설원은 직접 알아보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다 된지라 마침 약속대로 밥을 사주러 나갈 타이밍이기도 했다.
“설원! 원더풀! 이것 좀 봐요.”
“로라. 무슨 일이에요?”
“오! 설원 씨. 마침 잘 왔어. 안 그래도 부르러 가려고 했어.”
“……?”
흥분 가득한 로라와 제임스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 한 곳을 향했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긴 설원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거기엔 아침에 본 근사한 슈트 차림의 권채하가 여유롭게 서 있었다.
게다가 그의 등장만큼이나 설원을 놀라게 한 건 숍 입구에 늘어선 푸드 트럭들이었다.
누가 봐도 그가 끌고 온 게 분명한 것들.
호화로운 뷔페 차와 커피 차가 로라 앤 제임스 직원들의 환호 속에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어서 마음껏 드시죠.”
“와, 감사합니다!”
“두 분도 편히 드세요. 한식, 양식, 중식. 종류별로 다 준비해 왔으니까요.”
“와우! 미스터 권. 아주 훌륭해요! 전 한식 좋아해요.”
로라가 제임스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끌고 가다시피 트럭으로 데려갔다.
이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넋이 반쯤 나간 설원과, 여전히 태연자약한 채하 뿐이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남편을 반겨주지 않고.”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채하를 한참 빤히 보던 설원이 겨우 입술을 뗐다.
“이게 대체 무슨……?”
“열심히 일하는 아내를 위한 외조지. 밥을 차려주는 건 아주 기본적인, 외조의 정석 아닌가?”
“일은 나보다 권채하 씨가 더 많이 하잖아요.”
“그거하곤 다르지. 그리고.”
채하가 성큼성큼 설원 쪽으로 걸어오더니 훅 몸을 숙였다.
그러더니만 일부러 귓가에 대고 속살거렸다.
“어젯밤에 말했잖아. 노력하겠다고.”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요.”
“아니, 아직 멀었지. 당신 마음에 들기 위해선 뭐든지 할 거야.”
능청스럽게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그가 눈짓으로 뷔페 차량을 가리켰다.
“사실 점심이나 같이 먹고 싶어서 왔어. 겸사겸사 당신 일하는 모습도 볼 겸.”
“그렇다고 이렇게 요란하게…….”
“내가 점수를 좀 따둬야 우리 아내가 일하기 수월하지 않겠어?”
토를 달기도 버거워진 설원은 그의 말대로 얌전히 밥이나 먹기로 했다.
뷔페에서 음식을 덜고 있는 직원들의 눈이 모두 그들에게 내리꽂히고 있어, 시선을 피할 필요가 있었다.
“알겠어요. 같이 먹어요.”
채하의 짙은 눈동자가 순간 통창에 든 햇살처럼 밝아졌다.
그것을 보며 설원의 마음 한구석도 밝아지는 것을,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어젯밤 한 말처럼 그는 그 나름대로 계속해서 노력하려는 것일 터였다.
망망대해만큼 멀어진 마음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음식은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아마 지나칠 정도로 비싼 뷔페를 부른 덕분일 게 분명했다.
그에 대해 설원이 슬며시 언급하자, 채하는 재력이란 이럴 때 쓰는 거라며 일축해버렸다.
민설원의 점심값과 우주의 과자값 만큼 돈 쓰는 보람이 있는 곳이 없다면서.
식사를 마친 설원은 시계를 한 번 보곤 힐끔 채하의 눈치를 살폈다.
“안 가요?”
“아직 후식으로 커피도 안 마신 남편한테 너무 매정한 거 같은데.”
“권채하 씨 바쁘니까…….”
“바빠. 바빴지. 앞으로도 바쁠 거고.”
입버릇처럼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을 잽싸게 채하가 끊어버렸다.
이윽고 그의 강건한 눈빛이 마치 진중한 다짐을 하듯 설원을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든 난 민설원과 우주가 최우선이야.”
“…….”
확실히 이 남자는 변했다.
옛날 같았으면 언제나 일에 치여 제 존재는 그의 삶에 맨 끄트머리에나 존재했을 텐데.
그런 그가 이제는 저를, 우주를 최우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분명히 설탕 없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이상하게 달게 느껴져 설원은 채하의 눈을 피했다.
왜인지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그때였다.
저쪽에서 제임스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미스터 권! 덕분에 식사 맛있게 했어요. 여기 커피, 안 가져간 것 같아서 갖고 왔는데.”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지금 딱 커피가 필요했거든요.”
반갑게 커피를 받아드는 채하에게 제임스는 마치 보답이라도 하듯 제안했다.
“시간 여유 있으면 우리 설원 씨 일하는 화원 좀 구경하고 가면 어때요? 아주 잘 가꿔놔서 둘이 가볍게 데이트하기 좋을 거예요.”
“사장님!”
데이트라니, 설원의 뺨이 속절없이 붉어졌다.
제 속도 모르고 채하는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죠. 역시 제임스는 센스가 좋아요.”
“센스는 나도 안 지는데! 호호.”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갑자기 채하와 설원의 사이로 로라가 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설원을 아예 빨갛게 만들어버릴 발언을 투척했다.
“내가 준 결혼선물도 참 센스 있었죠? 왜 그때 미스터 권이 아주 미쳐버릴 뻔했다고…….”
“궈, 권채하 씨! 빨리 가요. 화원, 화원 구경시켜줄게요!”
“응?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황급히 도망치듯 채하의 등을 떠밀어 화원으로 사라지는 설원을 보며 로라가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제임스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아주 적절할 때 잘 등장해줬어. 달링.”
화원으로 건너온 뒤에도 설원의 홍조는 빠르게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그녀는 채하가 보지 못하도록 앞장서 걸었다.
다행히 그는 화원을 찬찬히 둘러보느라 늦은 걸음으로 뒤따르는 중이었다.
“꽃 종류가 많군.”
“네. 제임스가 평소보다 더 많은 종류를 가져다 뒀거든요.”
“좋은 사람이야. 나는 꽃은 잘 모르지만, 이곳이 당신이 아낄 만한 공간이라는 건 바로 알겠어.”
그렇게 말하며 채하가 우뚝 발을 멈췄다.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여름을 맞아 잎을 떨구고 있는 수선화였다.
꽃 문외한의 눈에는 아름답지만은 않은 모습일 터였다.
한데 그는 왜인지 애틋한 눈길로 그 수선화를 내려다보았다.
“저번에 그랬지. 당신은 수선화를 좋아한다고.”
“아…… 네. 맞아요.”
“찾아보니까 수선화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기품 있는 꽃을 피운다고 하더군. 확실히 당신이 좋아할 만한 것 같아.”
“……그런 걸 찾아봤어요?”
“그래. 당신이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여기 이 알뿌리도, 죽은 게 아니라 이 상태로 여름을 나고 다시 꽃피울 순간을 기다리는 거라고 하던데.”
스쳐 가듯 한 말을 잊지 않고 찾아봤다니, 왠지 마음이 찡해져 설원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채하가 덤덤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난 우리도 이 알뿌리처럼 다시 꽃피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내 안에서 당신은 한 번도 진 적이 없으니까.”
“권채하 씨…….”
능청도 너스레도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곧은 진심에, 설원의 눈꼬리가 금세 촉촉해졌다.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설원은 애써 밝은 척 물었다.
“그런 권채하 씨는 왜 은방울꽃을 좋아해요?”
“나?”
“네. 당신도 그때 그랬잖아요. 솔직히 은방울꽃하고는 하나도 안 어울리는데…….”
솔직한 설원의 평에 채하가 느른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그녀에게로 몸을 틀어 시선을 맞췄다.
숨 막힐 듯 타오르는 눈빛이 순식간에 설원을 잠식했다.
곧이어 그가 짙은 감정이 농축된 음성으로 낮게 읊조렸다.
“아마 당신은 그 이유를 짐작도 하지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