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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잠 못 드는 밤
2022.12.04.



“……과자를 준 할머니라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채하였다.

이어 영문을 알 리 없는 권강호가 우주에게 다가와선, 작은 어깨에 두 손을 얹고 되물었다.


“우주야. 그게 무슨 소리니? 저 사진 속의 할머니를 본 적 있는 거냐?”

“네~ 우주한테 엄청 엄청 맛있는 과자를 줬어요!”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는 우주를 보며 채하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하. 어머니께서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신 줄은 미처 몰랐군요.”

탄식을 내뱉는 채하의 뒤에서 설원은 그저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과자를 주다니, 설마 허영주가 어린이집에 찾아와 우주를 보고 간 걸까?

참을 수 없는 불안이 설원의 가슴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아무렴 애한테 험한 짓을 하진 않았겠지.”

권강호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우주도 어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조잘거리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응~ 예쁜 할머니 우주한테 잘해줬어요! 손도 이렇게 흔들어줬어요~.”

“그랬구나. 자, 우리 아가. 여기 앉아서 과일 먹자.”

“네~!”

다행히 우주의 말대로 과자를 주고 간 것 이상의 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나 설원은 좀처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곳으로 돌아온 뒤로 아이의 존재가 탄로 날까 내내 우려했던 그녀였다.

제가 아는 허영주라면, 우주가 비록 채하의 아들이라 해도 설원의 피가 섞인 이상 곱게 보지 않을 게 자명했으니까.

그런 불안을 눈치챘는지, 채하가 설원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당신도 앉아. 내가 특별히 토끼 모양으로 깎아왔으니까.”

가벼운 그 손짓에 굳어있던 어깨가 조금은 풀어졌다.

모든 것을 걸고서 그녀와 우주를 지키겠다는, 아까 했던 진중한 약속 덕분일까.

묘하게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어 설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토끼! 우주 토끼 사과 먹을래요~.”

“좋아. 꼬마 거는 특별히 대왕 토끼다.”

“와~ 대왕 아빠 최고!”

과연 접시 한가운데 ‘대왕’이라는 호칭에 걸맞은 큼직한 사과가 놓여있었다.

우주가 사과를 집어 크게 앙 물자, 희미한 불안은 옅은 평온 속에 천천히 희석되어 갔다.

어느덧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채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도 허영주와 마주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일 터였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그래. 자주 들르고. 설원이도 우주랑 같이 언제든 오너라.”

“예. 아버님. 감사합니다. 아, 저번에 주신 목걸이도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다. 너야말로 돌아와 줘서 고맙구나. 사람이 참 어리석지.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진리를 매번 잊어버리니 말이야.”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설원이 슬쩍 채하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흐렸다.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차마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제게 미안해하는 권강호의 모습을 보는 게 마냥 편치는 않았다.

한데 권강호가 더욱 뜻밖의 말을 꺼냈다.


“설원이 네가 나아지면, 모든 게 괜찮아지면 옛날에 못 한 결혼식도 성대하게 올려주마. 우리 채하와 모쪼록 행복해다오.”

“……아버님.”

눈물이 핑 도는 바람에 설원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모쪼록 행복해다오. 그 말이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무겁게 설원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원하고 원했지만, 끝내 이룰 수 없던 바람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번에도 이루지 못할 그런 바람.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예보에도 없던 장맛비가 요란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마. 천둥 번쩍해요! 우주 무서워요.”

“이리 와. 우리 우주, 엄마가 재워줄게.”

쪼르르 설원에게 안기는 우주를, 채하가 묘하게 시샘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뭔가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그 표정에 설원이 얼른 설명했다.


“우주는 천둥 번개를 무서워해요. 오늘은 아무래도 내가 같이 자는 편이…….”

“아니.”

매몰차게 돌아온 대답에 설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는 아이를 혼자 재우라니,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였다.


“그렇게 야박한 인간 보듯 하지 마. 꼬마가 무서워하는데 나라고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겠어? 오늘은 우리 방에서 꼬마를 재우도록 하지.”

“……네?”

“어때, 꼬마. 이 대왕 아빠랑 자면 천둥 번개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서울 거야.”

“응! 좋아요! 우주 대왕 아빠랑 엄마랑 같이 자고 싶어요~.”

“이렇다는데?”

한쪽 눈썹을 씰룩 올리며 채하가 너스레를 떨자, 설원은 기가 막혀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까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지 이젠 그 끝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좋아. 꼬마, 방에 가서 베개 가져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우리 꼬마는 용감하니까.”

용감하다는 칭찬에 우주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응! 우주 베개 가지고 올게요!”

쪼르르 자기 방을 향해 달려가는 우주를 멍하니 바라보던 설원이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리 킹사이즈라고는 해도 셋이서 자기엔 비좁을 것 같았다.

게다가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우주는 잘 때 옆 사람을 끌어안는 버릇이 있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아마 권채하 씨를 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나야 더 환영이지. 당신한테도 그런 버릇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아쉽군. 당신은 기가 막히게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자던데.”

푸념 아닌 푸념을 하며 채하가 베개 두 개를 벌려 우주의 베개를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

곧 그 자리에 우주의 앙증맞은 딸기 무늬 베개가 놓였다.


“자, 그럼 사이좋게 자볼까.”

“응! 우주 코 잘래요.”

“그래. 이 대왕 아빠가 자장자장 해줄게.”

채하가 길게 팔을 뻗어 우주의 베개 너머로 설원의 베개까지 감싸자, 마치 그의 품에 둘이 폭 안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게 무척이나 아늑했는지 우주는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창문을 세차게 때리는 빗소리와 번쩍이는 번개도 아이의 잠을 방해하진 못했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설원도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어머니 일은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하지.”

눈꺼풀이 무거워지던 찰나, 불쑥 채하가 내뱉은 말에 설원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채하는 아득한 눈빛으로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속을 가늠하기 어려운 옆모습이 조명 아래 어른거렸다.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할 테니까 당신은 걱정하지 마.”

“……알겠어요.”

“민설원.”

“네?”

가라앉은 음성으로 제 이름을 부르는 채하의 옆얼굴에서 설원은 눈을 떼지 못했다.

빗소리에 섞인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으로 뚝뚝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이제 와 솔직히 털어놓는 건데, 사실 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게 참 많아.”

“권채하 씨…….”

“하지만 지금 당장은 사과하지 않으려고 해.”

“마음대로 해요. 난 어차피 생각…… 안 나요.”

작은 목소리로 설원이 답하자 순간 채하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마치 처음부터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처럼.


“왜인지 묻지 않아? 왜 당장 사과하지 않는지.”

“내가…… 기억을 못 하니까.”

“아니.”

설원을 향해 채하가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어느새 우주는 채하 쪽으로 방향을 틀고 그를 바디 필로우처럼 꼬옥 껴안고 있었다.

자그마한 아이를 품에 가득 안은 채로, 채하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무엇에 대해 사과해야 할지, 당신이 겪은 일들을 다 알아낸 뒤에 하기 위해서야.”

“…….”

“민설원. 당신한테 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나는…….”

“괜찮아. 말하지 않아도. 내가 다 알아낼 거니까, 당신 입으로 힘들게 말할 필요 없어.”

어쩐지 시선을 마주치기 힘겨워져 설원은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우주를 안고 있는 그의 커다랗고 듬직한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진 세월 속에서도,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던 손이었다.

잊으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속에서조차 어른대던 그리운 손…….

딱히 그녀의 대답을 원해 하는 말이 아닌 듯, 채하는 독백 아닌 독백을 이어갔다.


“그저 지금은 당신이 이렇게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만약 민설원, 당신이 설령 평생 날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살아 있어 주기만 한다면 난 죽을 때까지 노력할 거야.”

“권채하 씨…….”

“그러니 도망가려고만 하지 마. 옆에 있어. 내 옆에. 아무도 당신과 우주를 해코지하지 못하게 할 테니까.”

어느새 제 불안을 꿰뚫어 본 걸까.

채하는 그녀에게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고 홀연히 떠날 결심을 하고 있는 설원에게, 자신의 곁에 머물러 달라는 말을.

대답 대신 설원은 길고 매끄러운 그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시 한 침대를 쓰기 시작한 뒤에도, 언제나 거리를 유지하느라 손끝도 닿아본 적 없던 두 사람이었다.

한데 이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그의 손을 잡고 싶다는. 우주를 안고 있는 듬직한 저 손에 제 손도 살포시 얹고 싶다는.

그리하여 세 사람의 온기로 이 여름밤을 나고 싶다는.


“…….”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설원은 채하의 손끝에 닿기 직전이던 손을 조용히 거두었다.

그러고는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버리자 채하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창밖의 세찬 장맛비가 잦아들고 있었지만, 좀처럼 잠 못 드는 밤이었다.

*

한편 그 밤,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허영주였다.

뒤척이다 권강호에게 한 소리 들을까 싶어, 허영주는 아예 거실로 나와 어둠 속에 홀로 멀뚱히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물도 마시고 차도 마시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도무지 심장이 진정되질 않았다.


“아유, 미치겠네.”

답답함에 허영주는 제 가슴을 퍽퍽 쳐댔다.

조금 있으면 동이 틀 텐데, 눈만 감으면 우주라는 아이의 모습이 환영처럼 두둥 떠올랐다.

사실 그녀는 오늘 모임에 가지 않았다.

얼마 전 권강호가 채하에게 전화해 아이를 데리고 오라 하는 걸 엿들은 허영주는, 참석을 취소하고 몰래 3층 난간 구석에 숨어 있었다.

1층에서는 아무리 올려다봐도 보이지 않지만, 위에서는 아래 거실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사각지대였다.

민설원과 채하의 뒤를 졸졸 따라 들어온 아이를 본 순간 허영주는 숨이 멎을 뻔했다.

저번에 어린이집에서 잠깐 봤을 때보다도 통통하게 살이 올라 귀여움은 배가 되었고, 권강호에게 배꼽 인사를 하는 모습은 어찌나 예의 바른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걱우걱 숨어서 빵을 먹으며 허영주는 그들의 모습을 CCTV처럼 감시했다.

우주가 노래하고 춤추며 권강호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리는 걸 봤을 땐 정말이지 한계였다.

당장이라도 뛰어 내려가 내가 할머니라고 당당히 소개하고, 품에 안고 어화둥둥 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채하가 비교적 이른 시간에 둘을 데리고 돌아가지 않았다면, 저도 제 폭주를 장담할 수 없었을 터였다.


“대체 왜 그렇게 귀여워 가지곤, 사람을 돌게 하는 거야!”

어두운 거실 소파에 홀로 앉은 채 허영주는 긴 탄식을 내뱉었다.

이젠 한 대 쥐어박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통통한 뺨에 뽀뽀를 해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이건 거의 상사병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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