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약속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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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약속하지
2022.11.30.
“자, 그럼 어떤 걸 심을지 씨앗부터 골라 볼까?”
“좋아요! 우주 엄청 엄청 큰 걸로 심을래요!”
“…….”
우려와는 달리 채하는 딱히 전화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어차피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설원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다만 눈앞에 직면한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큰 나무는 묘목이 당장 없는데, 어쩌지. 우주야.”
“없어요? 우주 동생이 열리는 나무를 갖고 싶었는데.”
여전히 동생의 탄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우주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실망스러운 표정에 설원이 괜스레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채하가 이 상황을 재빠르게 무마해 주었다.
다만 무마하는 방식이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꼬마. 언젠가는 동생을 심어줄게.”
“진짜요? 대왕 아빠! 약속한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야광별 보면서 혼자 잘 자야 해.”
“계속이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요?”
“응. 혼자 자야 동생을 심을 수 있거든. 어때? 꼬마. 할 수 있겠어?”
“으응~ 우주 혼자 잘 수 있어요! 동생 기다리면서 잘 거예요.”
우주와 채하는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진중하게 약속을 나누었다.
두 부자의 순수한 듯 순수하지 않은 대화에, 설원은 애써 귀를 닫고 못 들은 척했다.
앞으로 우주에게 가르쳐줘야 할 일들이 아주 많을 것 같았다.
그날, 우주의 정원 꾸미기는 결국 조만간 살구나무 묘목을 들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동생이 열리진 않더라도 무언가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갖고 싶다고, 우주가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살구꽃이 필 즈음…….
그때면 이미 이곳에 저와 우주는 없지 않을까 하는 쓸쓸한 생각이 가슴을 스쳤지만, 설원은 애써 그런 기분을 떨쳐냈다.
하지만 약속의 부질없음을 알고 있는 어른들과는 달리, 우주의 순수한 마음이 상처받을까 걱정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설원은 혼자서 속으로 결심했다.
섬으로 돌아가면 우주 이름을 달아서 커다란 나무를 심어줘야겠다고.
*
“우주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고요?”
“그래. 저번 주에 정작 아버지는 당신 얼굴도 못 봤다고 아쉬워하셨어.”
“아…….”
그 말에 민망한 기억이 불쑥 떠올라 설원의 뺨이 홧홧해졌다.
지난주, 라 쁠뤼의 론칭 파티.
권강호 회장의 일이 예정보다 늦어진 바람에, 그들은 결국 파티에서 대면하지 못했다.
거기다 허영주와 백사라가 소란을 일으키고 퇴장해 버린지라, 오래 있기에도 멋쩍은 상황이었다.
해서 둘은 손 회장 내외와 라 쁠뤼의 오너에게 인사를 전한 뒤 빠르게 자리를 파했다.
손가락 위를 스치던 그 뜨거운 숨결을 떠올린 설원은 슬쩍 한 발짝 물러났다.
여전히 비어 있는 네 번째 손가락을 괜스레 의식하면서.
다행히 채하는 그런 행동에 개의치 않은 채 덤덤히 말을 이었다.
“며느리가 돌아왔는데 인사도 못 나누고, 게다가 손주까지 생겼다니 당연히 보고 싶으시겠지.”
“…….”
“어때? 갈 거지?”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설원은 입술을 달싹였다.
권강호는 늘 제게 잘해주었기에 그를 만나는 게 싫거나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슨 걱정하는지 알아. 어머니는 그날 집에 안 계실 거야.”
“네?”
“어머니는 모임에 가실 거라 없어. 그래서 아버지도 일부러 그날 부르신 거고.”
“아…….”
확실히 권강호다운 배려였다.
하지만 그래도 고민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허영주가 이 집에 멋대로 쳐들어온 것과, 설원이 제 발로 걸어서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으니까.
어찌할지 고민 중인 그때, 문득 채하의 눈이 가느다래지는 것이 설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왜 그렇게 봐요?”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 건가?”
“그건…….”
움찔한 설원이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려 했지만, 채하 쪽이 더 빨랐다.
“괜찮아. 아버지는 옛날에도 당신한테 잘해주셨던 걸로 알고 있거든. 그리고…….”
채하의 깊은 눈매가 더욱 가늘어지더니, 언뜻 눈동자에 장난기가 감돌았다.
곧 그가 느른한 웃음을 흘리며 설원을 자극했다.
“내가 좀 지켜보니까 당신은 당신한테 잘해준 사람은 다 기억하는 것 같던데.”
“……!”
이번에는 속절없이 설원의 뺨이 활활 달아올랐다.
완전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내, 내가 언제요?”
“흐음. 아버지는 기억 안 나는 걸 보니, 합격점은 아니었나 보네. 나중에 귀띔 좀 해드려야겠어.”
“……쓸데없는 소리 전하지 말아요.”
“어쨌든.”
실없는 농담인지 도발인지에 걸려든 그녀에게 채하가 성큼 한 발짝 다가왔다.
눈치채지 못한 줄 알았는데, 이미 뒷걸음질 쳤다는 사실을 들켰던 모양이었다.
“가자. 나도 아버지께 우주를 보여드리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채하는 설원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손등을 쓸어내렸다.
토닥이듯, 허락을 구하듯.
겨우 그런 동작에 마음이 약해지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설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겠어요.”
*
“와~ 엄청 엄청 큰 궁전이에요!”
채운 가.
입구에 서자마자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다만 아이의 시선은 다른지, 우주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설마 이곳에 다시 오게 되리라곤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던 설원이었다.
권채하의 아내로 이 집에 들어왔던 게 벌써 8년 전의 일이었다.
채 어린 티도 가시지 않았던 스물셋의 나이였고, 당시 채하 또한 겨우 스물여섯에 지나지 않았다.
제법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여겼는데도, 막상 이 높다란 담과 대문 앞에 서니 쓰라린 상처가 고스란히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 안에서 겪어야 했던 모진 일들과 결국 피할 수 없었던 비극까지.
“민설원.”
어느새 제 손이 떨리고 있었음을, 채하가 단단히 손을 붙잡아준 덕에 설원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설원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채하의 눈빛은 늘 그랬듯 강건했다.
“두려워하지 마. 이제 당신이 상처받을 일 같은 건 절대 없을 거야.”
“권채하 씨…….”
“내가, 모든 것을 걸고 약속하지. 당신하고 우주를 지키겠다고.”
언제나 이런 눈빛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저도 모르게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도, 다시 만난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설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외로이 적진으로 향하는 것 같았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양손을 꼭 붙잡고 있는 채하와 우주가 있었으니까.
“오, 드디어 왔구나.”
“안녕하세요~ 대왕 할아버지.”
신문을 접곤 일어서는 권강호 회장을 향해 우주가 재빨리 달려가 배꼽 인사를 건넸다.
이 귀여운 인사를 받은 권강호 회장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
외부에서는 그저 엄격한 호랑이로 통했지만, 의외로 권강호는 다정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네가 우주구나?”
“네! 제가 우주예요. 대왕 할아버지. 만나서 반가워요~.”
또 한 번 공손히 배꼽 인사를 하며 허리까지 90도로 숙이는 우주의 머리를, 권 회장이 기특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그래. 우주야. 그런데 대왕 할아버지는 뭐냐?”
“응~ 엄마가 그러는데 할아버지가 대왕 아빠의 아빠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대왕 할아버지예요!”
반쯤 이해는 했으나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권강호가 우주의 뒤에 서 있는 제 아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채하가 능청스럽게도 대꾸했다.
“뭐든 대왕은 좋은 겁니다.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허허. 그래. 대왕 할아버지 하자. 우리 우주, 이 대왕 할아버지한테 와 보렴.”
“네~!”
다정한 손길로 우주를 토닥이며, 마찬가지로 다정하게 권강호가 설원을 바라보았다.
“설원이 너도 네 집처럼 여기고 편하게 있다 가라.”
“……예. 아버님.”
“채하한테 들었다. 몸이 아파서 기억에 문제가 좀 생겼다고. 난 그런 건 개의치 않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그냥 평범한 시아버지일 뿐이니.”
“감사합니다.”
힐끔, 설원이 채하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어색할 것을 우려해, 그가 미리 언질해 둔 것이 틀림없었다.
“아, 이러지 말고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구나. 설원이 네가 불편해할까 봐 아주머니는 오늘 일찍 돌려보냈다. 대신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차려두고 갔으니 다들 실컷 먹거라.”
물을 순 없었지만, 그가 말하는 아주머니는 왠지 안산댁인 듯했다.
허영주가 기함할 정도로 집안일을 시킬 때마다 늘 그녀는 몰래 뒤에서 일을 돕곤 했다.
익숙한 사람을 언급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우주는 대왕 할아버지가 대번에 마음에 들었는지 이미 무릎에 올라가 안겨 있는 상태였다.
그런 우주를 번쩍 안아 들어, 권강호가 다이닝 룸으로 앞장섰다.
그 안에는 정말 말 그대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게다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그 역시 채하처럼 우주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새였다.
“자, 우주가 온다고 해서 어린이 의자도 준비했다.”
“와~ 우주가 좋아하는 거 잔뜩 있어요!”
“많이 먹으렴. 많이 먹고 쑥쑥 커야지.”
“응! 우주 많이 먹고 대왕 아빠랑~ 대왕 할아버지처럼 클 거예요!”
방글거리는 우주를 향해 쏟아지는 채하와 권강호의 애정 어린 시선에, 괜스레 설원의 가슴이 찡해왔다.
핏줄이란 건 정말 묘한 힘을 지닌 모양이었다.
“자, 들자.”
“네.”
식사하는 내내 권강호는 불편한 주제나 질문 따윈 꺼내지 않았다.
오직 최근 돌아온 뒤의 일상적 생활이라든지, 우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설원도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아주머니 안 계시니까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아버님.”
“됐다. 거기 둬라. 이따 너희들 가면 내가 하면 돼.”
“아버지야말로 됐습니다. 누굴 불효자 만들 일 있습니다. 제가 할 테니, 거실에서 차라도 들고 계세요.”
“허허. 이거, 설원이가 오니까 천하의 권채하가 설거지를 하는 날도 있구만.”
“매일 한다고 하면 더 놀라시겠군요.”
부자가 설거지를 가지고 실랑이하는 사이, 우주가 이번에는 권강호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우주야. 할아버지 귀찮게 하지 말고 이리로 와.”
“아니, 괜찮으니까 그냥 둬라.”
“응~ 우주 대왕 할아버지 좋아요! 멋쟁이 할아버지예요!”
“우주도 참…….”
채하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설원과 권강호, 우주는 거실에서 담소를 이어 나갔다.
3대가 함께 있으니 묘하게 북적이는 기분이었지만, 왜인지 싫지 않았다.
갖은 재롱에 이어 우주가 최근 어린이집에서 배워 온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어쩜 그렇게 동물 흉내를 잘 내는지, 권강호는 손뼉을 치느라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설원 역시 그 깜찍함에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였다.
한창 토끼 흉내를 내고 있던 우주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명랑하게 외쳤다.
“어? 저 할머니!”
“할머니?”
난데없는 말에, 설원과 권강호는 우주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설거지를 마치고 과일 접시를 들고 나오던 채하의 시선도 그리로 향했다.
이어 우주의 해맑은 목소리에 반가움이 그득 섞였다.
“예쁜 할머니! 저번에 우주한테 과자 준 그 할머니예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름 평온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우주의 짧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권강호와 허영주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