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동생을 심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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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동생을 심어주세요
2022.11.27.
“대왕 아빠! 우주 데리러 온 거예요?”
“그래. 우리 꼬마, 오늘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하고 잘 놀았어?”
“네! 우주 엄청 엄청 신나게 놀았어요~.”
“잘했네. 기특해.”
우주의 동그란 머리통을 다정히 쓰다듬는 권채하의 모습은, 얼마 전 섬에 찾아왔던 그 냉랭한 남자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와 눈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애정은 그야말로 친아빠 자체였다.
“자, 얼른 차 타고 엄마한테 가자.”
“네! 대왕 아빠~.”
권채하의 커다란 손을 듬직하게 꼬옥 붙잡고서, 우주가 차로 향하는 것을 재윤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류의 충격은 처음인지라 한참이나 넋이 나간 채였다.
그리고 그런 재윤의 모습을, 한 남자가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시키신 대로 따라왔는데 최재윤이 잎새 어린이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래? 아이하고는 인사했어?”
[아니요. 멀찍이서 그냥 보기만 했습니다. 마침 권채하 씨가 나타나서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고요.]
“흐응~ 그럼 최재윤은?”
[차 뒤꽁무니만 쳐다보고 있는데요. 아, 지금 갑니다!]
“좋아.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잘 감시해. 어차피 그대로 섬으로 돌아갈 테지만.”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백사라는 방금 제 수행비서가 보내온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을 찬찬히 뜯어보니 과연, 최재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흥. 내 것인 줄 알았던 걸 뺏긴 기분이 꽤 더럽다는 사실을, 이제 좀 알겠지?”
조금만 더 건드리면 이 남자는 꽤 쓸 만한 장기 말이 될 터였다.
아직도 라 쁠뤼의 파티장에서 저를 노려보던 권채하의 눈빛만 떠올리면 가슴에 불길이 일었다.
민설원이 없었을 때는 적어도 그런 눈으로 보지는 않았는데.
그 여자가 나타나고 모든 게 엉망이 됐다.
입술을 깨물며 백사라는 다시금 다짐했다.
“나쁜 건 민설원이야. 주제넘게 남의 것을 노린 최후가 어떤 건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알려주겠어.”
“엄마!”
“우주야.”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기는 우주를, 설원이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곤 흘끔 뒤에 서 있는 채하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당신이 또 데리러 간 거예요?”
“왜, 안 되나?”
“회사는요? 아직 퇴근 시간 아니잖아요.”
“부사장한테도 반차를 쓸 권리 정도는 있어.”
그렇게 말하며 채하가 자연스레 냉장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초코칩이 가득 토핑되어 있는 아이스크림을 꺼내 우주를 향해 흔들었다.
“덥지, 꼬마? 자. 아이스크림.”
“우와! 초코 콘이다!”
당근을 본 토끼처럼 우주가 눈을 빛내며 달려갔다.
그 모습에 설원이 우려를 표하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우주 간식을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니에요? 요즘 볼이 왜 자꾸 통통해지나 했더니…….”
“별로 안 줬는데.”
“요 며칠 덥다고 매일 아이스크림 주고, 저녁 먹고 나서 또 과자도 주고 그랬잖아요.”
“내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채하를 향해, 설원은 계속해서 우려를 표출했다.
“안 그래도 여기 올라온 뒤로 밥도 두 그릇씩 먹고 있는데…….”
“아이들은 원래 많이 먹어야 쑥쑥 크는 거야. 안 그래, 꼬마?”
“응! 우주 키 쑥쑥 크고 싶어요! 대왕 아빠처럼요!”
어느새 입가에 까맣게 초콜릿을 묻힌 채 우주가 앙증맞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걸 보니 반만 먹고 넣어두자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아, 설원도 덩달아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때였다.
“읍……?”
불쑥 입술 위로 차가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설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채하를 바라보자, 그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든 채 씨익 웃었다.
곧 채하가 방금 그녀의 입술 위에 찍었던 아이스크림을 내밀며 제안했다.
“자, 공평하게 우리 셋이 다 같이 먹자고.”
“응! 엄마랑 대왕 아빠도 우주랑 같이 아이스크림 먹어요!”
해맑게 기뻐하는 우주의 모습에, 할 수 없이 설원은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었다.
사실 그녀도 조금 목이 타던 찰나였다.
졸지에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세 사람은 도란도란 일상의 대화를 나누었다.
“일은 어떻게 되어 가?”
“네?”
“당신 일 말이야. 꽃 페스티벌.”
“아아…….”
채하가 이런 걸 물을 줄 몰랐기에 설원은 괜히 멋쩍어 아이스크림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금 질문을 덧붙였다.
“요즘 매일 플라워숍에 가던데, 준비할 게 많은 건가?”
“네. 중앙정원이 메인이다 보니 구상 단계부터 할 게 많아요. 시간도 촉박한 편이고요.”
“흐음. 제임스가 당신한테 큰 건을 줬군. 어떤 테마로 할지는 정했어?”
“아직이요. 이런 작업은 처음이라 고민이 좀 되네요.”
설원이 성심껏 답해주자 채하도 나름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제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고민해주는 권채하라니.
여전히 설원은 눈앞의 이 남자가 신기루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 둘 사이를 뚫고 발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마! 우주도 정원 꾸밀래요~.”
“응?”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선 우주가, 거실 통창 너머를 가리켰다.
거기엔 여름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우주도 화분도 심고~ 우주 이름표도 달고 싶어요! 어린이집에는 친구들 이름 달린 화분이 많아요!”
“아아…….”
아마 어린이집에서 식목일 행사 같은 때에 만든 화분을 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언뜻 뜰에 알록달록 귀여운 화분들이 나란히 놓여 있던 기억이 났다.
우주는 올라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당연히 우주 이름의 화분은 없을 터였다.
그것을 빠르게 눈치챈 채하가 설원보다 먼저 우주에게 대답해주었다.
“좋아. 우리 꼬마, 대왕 화분을 심어볼까.”
“응! 우주 대왕 화분 좋아요! 대왕으로 심을래요~.”
“자. 그럼 다 같이 해보도록 하지.”
그리하여 세 사람은 잠시 후 마당에 서게 되었다.
어디서 난 건지 정말 말 그대로 ‘대왕’ 크기의 화분을 들고 온 채하에게, 설원이 중얼거렸다.
“이건 너무 크잖아요. 어린이집에 놓을 곳도 없겠어요.”
“꼬마가 대왕이 좋다잖아.”
“꽃 화분이 아니라 이건 나무 화분이라구요.”
“그럼 나무를 심으면 되지, 뭐가 문제야. 꼬마가 원한다면 뭐든 심을 수 있어.”
“뭐든요?”
채하의 말에 우주가 돌연 눈을 빛냈다.
잠시 후, 작은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의 입가에서 동시에 무방비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엄마! 대왕 아빠! 그럼 우주를 심을래요~.”
엉뚱한 말과 함께 우주가 거대한 화분으로 쏙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더니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자기 가슴팍을 가리키며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여기다 흙 넣고 우주가 들어가 있으면 쑥쑥 클 거예요!”
“우주야. 우주는 식물이 아니라서 흙 넣어도 안 자라.”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설원이 우주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우주가 음~ 하면서 작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른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럼 우주 동생을 심어주세요!”
“…….”
“…….”
화분에서 우주를 안아 들려던 설원의 손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췄다.
그녀만큼이나 뒤에 서 있던 채하도 빳빳하게 굳어 있음이 느껴졌다.
여기서 발랄한 것은 오직 순진무구한 우주뿐이었다.
“어린이집 친구들은 다 동생이 있대요~ 응? 엄마. 우주 동생도 심으면 나무에서 열리는 거예요?”
“꼬마의 동심이 지독할 정도로 감동적이군.”
“대왕 아빠! 우주 동생도 심을 수 있는 거 맞죠?”
“……어떤 의미로는 맞는다고도 볼 수 있겠지.”
“궈, 권채하 씨!”
당황한 설원이 휙 채하를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불그스레함을 넘어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반면 채하는 빙긋 여유 넘치는 미소를 흘렸다.
“왜 그래? 별다른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진 않은데. 딱히 꼬마의 동심을 파괴하지도 않았고.”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설원은 제 뺨을 문질렀다.
이어 우주를 화분 밖으로 끄집어내곤, 재빨리 가드닝 박스를 가져왔다.
“우주야. 엄마랑 같이 심자. 어떤 꽃을 심어볼까?”
“으응~? 우주는 동생을 심고 싶은데…….”
“꼬마. 동생은 밤에 심는 거란다. 그리고 네가 심는 게 아니라, 엄마랑 이 대왕 아저씨가…….”
“삽! 삽 좀 주세요! 권채하 씨!”
설원이 소리를 높이자 채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신, 꼭 삽으로 날 묻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인데.”
“내, 내가 언제요? 해지기 전에 빨리하자는 거죠.”
“여름이라 해가 길어. 서두를 필요 없는데.”
그렇게 말하며 채하가 설원을 따라 그 옆에 허리를 굽히고 앉았다.
그러곤 방금 설원이 요청한 삽을 그녀의 손에다 곱게 쥐여주었다.
커다란 손이 설원의 손등을 스침과 동시에 한없이 유혹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이거 말고, 우주 동생을 만드는 일을 서둘러도 좋을 것 같은데.”
“……!”
설원의 귓바퀴에서부터 귓불까지 순식간에 붉어지는 것을 보며, 채하의 깊은 눈동자가 설원을 따스하게 응시했다.
“당신 표정이 좀 부드러워진 것 같군. 흐음. 우리 사이좋을 때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건가?”
그렇게 말하며 채하가 삽을 쥔 설원의 손을 감싸더니, 살며시 비볐다.
아무것도 아닌 동작인데도 이상하게 야릇하게 느껴지는 손짓이었다.
“당신은 손이 참 부드러워.”
“……우주가 보고 있어요.”
“우주는 지금 흙에만 관심이 많아.”
능청스러운 채하의 태도에 설원이 슬그머니 몸을 옆으로 틀려 했다.
그러나 그는 설원을 놓아주기는커녕 더욱 유혹적인 멘트를 던졌다.
“생각해보니 입술은 더 부드러웠던 것 같네.”
“무,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당신도 언제든 입 맞추고 싶으면 사양 말고 말해. 매일 하던 일을 반복적으로 해야 기억이 빨리 돌아오지.”
정말이지 한계였다.
설원은 옆으로 피하는 대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거짓말처럼 전화가 걸려 왔다.
덕분에 그녀는 어색한 행동을 무마하며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설원이니? 나다.]
“아, 예. 아주머니.”
목소리를 슬쩍 낮추며 설원은 몇 발짝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이 재윤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다른 게 아니고 오늘 재윤이 서울 갔는데 못 만났니? 전화를 안 받길래 설원이 너한테 전화했단다.]
“예? 재윤……씨가요?”
[그래. 우리 아저씨한테 들었는데 며칠 전에 어떤 화려하고 예쁜 아가씨가 설원이 네 친구라면서 섬에 찾아왔었다더라. 그래서 서울 간 거 같다던데.]
“아…….”
“무슨 일이야?”
설원의 심상찮은 표정에 채하가 곧장 물어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설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을 전했다.
그러고는 재윤의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로 얼버무리곤 짧은 전화를 끊었다.
‘재윤 씨가 서울에 왔다고? 나한테 말도 없이?’
게다가 중요한 건 다음 말이었다.
화려하고 예쁜 아가씨……. 거기다 제 친구라고 하면서 섬까지 찾아온 여자.
그건 백사라 말고는 달리 없을 터였다.
끊임없이 설원의 주변을 건드리는 건 백사라의 변함없는 방식이었기에.
“엄마! 할머니예요? 전화 끊었어요?”
“아, 응…… 엄마가 나중에 다시 걸어줄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채하는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