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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질투 (33/111)


33. 질투
2022.11.23.



“남자?”

[그래. 남자. 거기서 거의 사실혼처럼 산 모양이던데.]

“더 자세히 얘기해 봐.”

피라미라도 걸리길 바라며 던진 낚싯대였는데, 설마하니 이런 대어가 걸릴 줄이야.

손톱 끝에서 번쩍이는 커다란 큐빅을 톡톡 두드리며 백사라는 핸드폰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아직은 하늘이 저를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고고한 척하는 민설원이 늘 거슬렸는데, 마침내 그 고고함에 커다랗게 흠집을 내줄 기회가 온 것이다.

백재영에게서 대충 자초지종을 듣자 그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앙큼한 계집애 같으니. 섬에 버젓이 기둥서방을 숨겨놓고 권채하한테도 한 몫 거하게 뜯으려 했단 말이지. 기억 안 나는 척 그따위 어설픈 연기까지 해가면서. 어쩐지 날 경멸하듯 보는 게 기억 못 하는 사람 같지 않더라니.”

[어떡할 거냐?]

“뭘 어떡해? 내가 직접 그 기둥서방 면상 좀 봐야지.”

[이 오빠는 그럼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지? 소진이 번호라도 주면 안 되냐?]

“서두르지 마.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라는 거, 몰라?”

새빨간 입꼬리를 씰룩이며 백사라는 방금까지 쥐어뜯던 이불을 바로 펴 놓았다.

오늘 밤은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로소 써먹을 만한 장기 말들이 갖춰지기 시작했으니.


 
서해안, 자그마한 유인도.

그물질이 한창인 어부들 사이로 백사라가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며 부둣가를 걷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발걸음이 ‘대성호’라 쓰인 배 앞에서 멈췄다.

갑자기 드리운 그림자에 한참 배를 손보고 있던 젊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최재윤 씨?”

“……누구시죠?”

백사라가 힐끗 뒤에 서 있던 수행비서에게 눈짓하자, 그가 재윤에게 대신 명함을 건넸다.


“사라 코스메틱 대표?”

“그래요. 백사라예요. 그쪽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 찾아왔는데, 어디 편한 곳으로 가서 얘기 좀 나눌까요? 카페라든지. 아, 여긴 그런 게 없으려나.”

“……저희 부모님께서 하시는 가게로 가시죠. 지금은 손님이 없을 겁니다.”

다행히 재윤은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이런 섬까지 굳이 찾아온 이질적인 손님이라면, 결코 평범한 볼일은 아닐 테니.

덕분에 백사라는 딱히 돌려 말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앞장선 재윤은 곧 사람 없고 조용한 평상 자리로 그녀를 안내했다.

백사라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수행비서를 잠시 물린 뒤 백사라는 그가 내놓은 커피를 느긋하게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 와중에도 눈앞의 최재윤을 찬찬히 뜯어보는 걸 잊지 않으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나는 채운 그룹 권채하 씨와 원래 약혼할 뻔했던 사이예요.”

“예? 약혼이요?”

“그렇게 놀랄 것 없어요. 솔직히 더 놀랄 일은 최재윤 씨, 당신이 이 섬에서 5년이나 민설원이라는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는 사실이죠.”

“무슨…….“

재윤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번져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쯤에서 도발을 멈출 백사라가 아니었다.


“들어보니 당신 부모님도 민설원을 가족처럼 여기면서 지냈다면서요. 그럼 이유야 뻔한 거 아닌가요? 당신하고 민설원이 그렇고 그런 사이…….”

“말조심하십시오!”

옅게 번지던 불쾌감은 이내 활화산처럼 빠르게 폭발했다.

꽤 점잖은, 절대 선을 넘지는 않을 것 같은 바르고 평범한 남자.

최재윤의 첫인상을 그렇게 평가했던 백사라조차 조금은 움찔할 정도였으니까.

그가 거칠게 물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의 말에 반박해왔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민설원 씨와 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면 이미 아실 텐데요? 그 아이…… 그러니까 우주도 권채하 씨의 아들이고요.”

권채하 씨의 아들, 그 말에 백사라의 기다란 손톱 끝이 나무 테이블을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그래요. 그러니까 호기심이 생긴달까요. 다른 남자의 아들까지 낳은 여자를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돌본 이유가 대체 뭔지.”

“그쪽이 알 것 없습니다.”

“훗. 최재윤 씨. 굳이 부정할 거 없어요. 연정이 아니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

“뭐, 반응을 보아하니 민설원 씨는 당신하곤 다른 마음이었던 것 같지만.”

제가 다 아쉽다는 듯, 백사라가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그러더니 휑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다시 운을 뗐다.


“이런 섬은 젊은 사람이 있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네요. 최재윤 씨. 그쪽은 명문대 출신에다 능력도 출중한 인재던데, 여기서만 썩는 건 아깝지 않아요?”

“저에 대해 많이 알아보고 오신 모양이군요. 대체 목적이 뭡니까?”

백사라는 후훗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초조해할수록 우위를 점하는 건 제 쪽이니까.

사실 가장 조바심이 나는 게 백사라 본인이라 해도, 그녀는 그런 것을 감추는 데 능숙했다.

곧 그녀가 준비해 온 하얀 봉투를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그러자 재윤의 차분한 두 눈동자가 희미한 노기로 붉어졌다.

열어보지 않아도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불 보듯 뻔했기에.


“뭐 하는 짓입니까, 이게?”

“안 열어보나요?”

“얼마가 들어 있든, 저를 매수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머. 매수라뇨. 제가 최재윤 씨를 매수해서 뭐에 쓴다고요?”

“그럼 뭡니까?”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백사라가 봉투의 입구를 대신 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수표의 금액에 놀라는 표정을 즐기는 것은 덤이었다.


“제의라고나 할까요? 우리 오빠가 서울에서 큰 엔터 사업을 해요. 최근 들어 계속 확장 중이라 직원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어때요? 최재윤 씨가 와서 일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저는 그런 일은 해본 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안 됩니다.”

“일이야 차차 배우면 되는 거죠.”

“안 됐지만, 전 섬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이 있다면 애초에 떠났겠죠.”

“흐응~. 야망이 없는 남자네.”

단호한 거절에도 봉투를 거두지 않은 채 백사라는 잔을 들어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고는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지금까진 시큰둥하게만 구는 이 남자도, 이 화제에선 자유롭지 못할 터였다.


“우주라는 아이, 보고 싶지 않은가 봐요?”

재윤이 움찔하는 것을 보며, 백사라는 더욱더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5년이나 친아들처럼 애지중지 키웠는데, 그쪽은 싹 잊고 돈 많은 진짜 아빠랑 행복하게 사는 거 안 서운해요?”

“……어차피 곧 돌아올 겁니다.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요.”

“약속이요? 호호.”

소리 높여 웃는 백사라를, 재윤이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보다 노골적으로 그를 비웃으며 백사라가 도발의 수위를 한층 높였다.


“최재윤 씨. 은근 순수한 데가 있으시네. 그 말을 믿어요? 아마 둘 다 안 돌아올 걸요.”

“…….”

“이런 섬 생활과 화려하고 넉넉한 도시 생활. 어느 쪽이 모자에게 편할지 어린애도 단번에 계산하겠어요. 게다가 권채하 씨는 그냥 부자도 아니고 재벌이라고요, 재벌.”

“설원이는 그런 것에 혹할 만한 여자가 아닙니다.”

“하하하. 이거야, 정말 순수한 건지 모자란 건지 모르겠네.”

점점 무례해지는 언사에 재윤이 주먹을 힘껏 말아쥐더니,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만 다시 일하러 가봐야겠습니다. 섬에서도 할 일이 많아서요. 이 돈은 도로 가져가세요.”

붙잡는 대신, 백사라는 여전히 여유롭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내 명함에 번호 있으니까, 마음 바뀌면 언제든 연락해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사람 일과 사람 마음은 장담할 수 없는 거랍니다. 최재윤 씨. 커피 고마웠어요. 저도 바쁜 몸이니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죠.”

말을 끝낸 백사라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재윤보다 앞서 가게를 빠져나갔다.

마침내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재윤은 참고 있던 한숨을 몰아쉬었다.

지나가는 말로 설원에게 들었던지라 백사라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상처를 꼭꼭 숨기고 터놓지 않는 설원이 안타까워 저 혼자 조사해보기도 했고.

분명한 사실 하나는, 백사라도 권채하도 그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란 것이었다.

이름 석 자만 쳐도 인터넷에 수많은 정보가 뜨는, 그런 세상의 사람들이었으니까.


‘아마 둘 다 안 돌아올 걸요.’

 
확신에 찬 백사라의 말이 귓가에 잔상처럼 짙게 남았다.

다시 부둣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재윤은 5년 전 설원을 처음 만났을 무렵을 떠올렸다.

반쯤 다 죽어가는 몰골로 이 섬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재윤은 그녀로 인해 삶의 의미를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민설원, 바로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돕기 위해 이 섬에 제가 있었던 거구나.

그때 꼭 그런 생각을 했었다. 설원이야말로 자신의 운명이라고.

물론 그런 마음을 설원에게 전한 적은 없었다.

그녀의 처참한 비극을 운명이니 뭐니 하는 말로 포장하는 것조차 죄가 되리란 걸 잘 알았다.

그래서 그저 묵묵히 그림자처럼 설원의 곁을 지켰다.

설원이 우주를 낳은 뒤에는 우주에게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려 애썼고,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설원의 눈동자 속 깊은 공허가 언젠가 가시고 나면, 그때쯤엔 제 진심을 전하리라 마음먹고서.


“하…….”

자신 있게 백사라에게 대답한 것과 달리, 두 사람이 정말로 돌아올까 하는 의문이 물결 위의 파문처럼 그의 가슴에 일었다.

고백조차 못 해 봤는데,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토록 무기력하게 설원을 그녀를 상처입힌 남자에게로 돌려보내야 한다면.

저를 아빠라고 불러주던 해맑고 순수한 우주의 눈망울을 다시 마주하지 못한다면…….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재윤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 얼마 전 메모해두었던 것을 확인했다.

우주와 통화를 하면서 전해 들었던, 우주가 새로 다닌다는 어린이집의 이름이었다.

*

이틀 뒤, 잎새 어린이집 앞.

하원 중인 원생들 사이로 밤톨처럼 동그란 머리통이 쏙 삐져나왔다.

뺨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우주가 방글방글 미소를 지으며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변함없이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재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믿고 기다리자 해놓고, 결국은 이렇게 찾아오고 말다니.

백사라라는 여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마음은 없었기에, 재윤은 그저 멀리서 아이만 보고 갈 예정이었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당연히 설원이 우주를 데리러 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린이집 버스로 단체 하원을 시키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재윤은 우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우주가 설원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기에 더욱이 의문이 들었다.

서울로 떠나면서도 혹여나 아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어린이집 앞으로 까맣게 빛나는 고급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이윽고 차 문이 열리고, 거기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재윤도 얼마 전 대면했기에 익히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권채하…….”

진회색의 슈트를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같은 남자가 봐도 근사할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우주의 해맑은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대왕 아빠!”

이윽고 반가움이 흘러넘치는 순수한 얼굴로 우주가 그를 향해 다다다 달려갔다.

권채하의 너른 품으로 뛰어들듯 안기는 우주를 본 순간.

생전 처음 느끼는 묘한 감정이 재윤의 가슴 한복판에서 너울 쳤다.

그것은 질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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