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반지 자국
(3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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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반지 자국
2022.11.20.
“부부의 도리…….”
채하가 내뱉은 그 말을, 설원은 나직이 되뇌어 보았다.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데도 시선이 제 손등에 닿아 있는 그의 입술로 향했다.
부부의 도리라는 게 설마…….
“이런 곳에까지 와서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흠. 이런 곳이 뭐 어떻다는 거지? 어차피 지금은 당신하고 나밖에 없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명색이 부부 동반 파티에 왔는데 남편 혼자만 결혼반지를 끼게 하다니, 너무 매정하지 않나?”
“그건…….”
듣고 보니 그런 듯도 해, 설원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세차게 흔들렸다.
“내 계획은 원래 여기 와서 당신이 내 아내라는 걸 만천하에 공표하는 거였어. 한데 무심한 아내는 반지조차 끼지 않았군.”
“…….”
흔들리는 설원의 눈동자와는 달리, 그의 눈동자는 묘한 욕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내 채하가 그녀의 허리를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왜, 왜 이래요?”
당황한 설원이 붙잡힌 손부터 빼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단단히 깍지를 낀 손은 그의 손아귀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당황하니 더 귀엽네. 당신은 지금 당신 모습이 얼마나 미치도록 사랑스러운지 모르지?”
채하의 직구에 설원의 당황스러움은 점점 배가 되고 있었다.
사랑스럽다니, 이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말문이 턱 막힌 사이, 그가 설원의 손을 깃털처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올라간 손을 따라 채하의 눈동자도 그녀를 향해 올라왔다.
놀란 눈을 끔벅거리고 있는 설원을 빤히 응시하며 채하가 나직이 속삭였다.
“아쉬운 대로 반지를 만들어 주려고.”
그 속살거림이 끝나자마자 채하의 입술이 설원의 손가락 위로 내려앉았다.
“……!”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설원은 홀린 듯이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부드러운 입술이 하나씩 느릿하게 훑으며 옮겨왔다.
이윽고 그의 입술은 유독 여린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 위에 멈췄다.
맹세컨대 어떤 입맞춤도 이것보다 강렬할 수 없을 터였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허전하던 손가락 위에 붉고도 짙은 반지 자국이 생겨났다.
화려한 샹들리에, 우아한 드레스, 파티장을 가득 채운 좋은 향기 때문일까.
손가락 위에 새겨진 그의 진심이 도무지 거짓말이나 연기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샴페인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건만, 설원은 이미 잔뜩 취한 기분이었다.
이토록 숨김없이 소유욕을 드러내는 한 남자로 인해.
*
“왜 그런 눈으로 보니? 너까지 기어이 이 엄마한테 한마디 얹으러 온 거야?”
파티가 있던 다음 날 저녁.
불시에 들이닥친 채하를 보며 허영주는 되레 제가 씩씩거렸다.
안 그래도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권강호 회장에게 잔뜩 욕을 들어먹은 뒤였다.
한데 또 2탄이 시작되려 하는 참이었다.
그것도 아마 남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아들에게.
“잘못한 건 아시나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조부모님 선산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짓말까지 하시다뇨.”
“그래! 내가 조상님 좀 팔아먹었다! 그게 뭐 어때서? 다 채하 너를 위한 일인 거 몰라?”
“하…….”
제게 쌍심지를 켜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채하가 긴 탄식을 뱉었다.
설원과 결혼하지 않았던 때라면 백사라에 대한 집착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어머니 허영주의 타고난 결핍 요소와 형으로 인한 보상심리를 모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를, 채하는 자식으로서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도 진지하게 여쭤보고 싶네요. 대체 멀쩡한 부부를 왜 자꾸 갈라놓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뭐?”
“민설원과 제가 결혼한 게 무려 8년 전입니다. 어머니. 그런데 왜 아직도 포기를 못 하고 계시냐고요.”
“너, 너…….”
허영주의 눈이 해묵은 분노로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가 곧 참지 못하고 그 분을 와르르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래! 말 한번 잘했다. 너, 그 여자 안 사랑하잖아! 결혼하고 나서 3년 동안 어디 들여다본 적이라도 있니? 한방을 쓴다고 다 부부는 아니지! 애정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그런 거 하나 모를 거 같아?”
“…….”
“그리고 또! 걔 죽은 뒤에도 아무렇지도 않았잖아! 너 어디 마누라 죽었다고 눈물 한번 흘린 적 있니? 5년 내내 일밖에 모르고!”
“……어머니.”
채하의 깊게 잠긴 목소리에 허영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거칠게 이마를 쓸어올리는 그의 음산한 눈빛이 허영주를 꿰뚫을 듯 스치고 지나갔다.
그 눈빛에는 어머니를 대하는 일말의 예의나 동정 따윈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어머니는 자식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하긴, 그러니까 형도 그렇게 대했겠죠.”
“뭐…… 뭐?”
크나큰 타격을 입은 허영주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표정으로, 그녀는 애먼 입술만 우물거렸다.
“어머니가 태하 형의 진심에 단 한 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그런 비극은 없었을 겁니다.”
“야! 권채하!”
결국 참지 못하고 허영주가 고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반쯤 이성을 잃은 채 허공에다 팔을 마구 휘둘렀다.
“너 지금 나 때문에 태하가 죽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 말이 그 말이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태하가 그렇게 된 건 그 천박한 계집애 때문이잖아! 그 나쁜 년 때문에……!”
“이게 무슨 소란이야!”
“여, 여보…….”
위층 서재에 있던 권강호 회장이 허영주의 말을 끊으며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그의 낯에는 참을 수 없는 노기가 가득했다.
“당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외출 금지에, 카드 다 뺏은 거로도 부족한가 보지? 어디서 고함이야, 고함이?”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요!”
허영주가 지지 않고 빽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더니만 채하를 향해 마구 삿대질을 했다.
“잘 들어요. 여기 잘난 권채하! 우리 아들이랑 당신이 싸고도는 잘난 며느리, 민설원은 계약 관계예요.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라 짜고 친 거라고요!”
“……뭐?”
뜻밖의 폭로에, 이번에는 채하의 미간이 심각하게 좁혀졌다.
“어머니가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봐, 봐요! 부정도 안 하잖아요! 보나 마나 사라랑 결혼하기 싫어서 일부러 시선을 돌리려고 한 게 분명하다구요! 그 괘씸한 여자한테 두둑이 돈 좀 쥐여주고서 감쪽같이 우리를 속이면서 연극을…….”
“어떻게 아시냐고 물었습니다.”
채하의 시선이 더욱 매서워지자, 허영주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털어놓았다.
마침 권강호도 옆에 있으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자신이 왜 그토록 채하의 결혼 이후에도 백사라를 놓지 못했는지, 이해할 테니까.
“엿들었다! 너희가 그때 난데없이 분가한다고 했을 때 말리러 갔다가!”
“…….”
“둘이서 방 안에서 얘기하고 있던데! 민설원이가 어차피 계약 결혼 날짜가 반년도 안 남았는데 뭐 하러 나가냐고 하면서.”
“하…….”
그런 정황이 있었나. 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원과 처음으로 사랑을 나눈 뒤로, 그는 둘만의 오붓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분가를 강행했었다.
과연 그때 설원이 반대했던 기억이 났다.
굳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면서.
“들었죠, 여보? 제대로 된 결혼도 아닌데 우린 속은 거예요! 완전히 속은 거라고요!”
“……사실이냐?”
묵직한 목소리로 권강호가 채하에게 물어오자, 채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해명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계약을 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도덕한 거래 따윈 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사랑하는 사이고요.”
“뭐, 뭐?”
허영주가 거의 게거품을 물 기세로 채하의 앞으로 몸을 들이밀고 섰다.
“사랑? 사라앙? 하! 기가 막혀서! 기억도 못 한다면서 사랑하긴 뭘 사랑해?”
“사랑합니다. 민설원은 몰라도, 저는 아주 열렬히요. 전 이제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민설원은 하나뿐인 제 아내니까요.”
“너…… 너까지 태하랑 똑같은 소리를 하다니.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어! 아이고, 내 팔자야!”
“시끄러워!”
노발대발하다 울부짖다 아까부터 정신 사나운 허영주에게 권 회장이 호통을 쳤다.
그러자 허영주는 아예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난 인정 못 해! 인정 못 한다고!”
“……따라 올라와라.”
여기서는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권 회장은 아들을 서재로 인도했다.
잠시 후, 채하는 아버지 권 회장과 마주하고 섰다.
엄숙한 얼굴로 권강호 회장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태하의 전철을 밟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버지.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지난 5년 동안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안다. 내가 아비인데, 그걸 모를까.”
권 회장이 서재 책상의 서랍을 열고는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고는 채하에게 그 반짝이는 물건을 건넸다.
“이건…….”
“어제 설원이가 받아야 할 것을 백사라한테 빼앗겼다고 들었다. 내가 특별히 부탁해서 라 쁠뤼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목걸이를 사 왔으니 이걸 갖다 주거라.”
“…….”
“내 며느리가 무사히 돌아온 선물이다.”
“아버지.”
채하가 곧은 시선으로 아버지를 응시하자, 권 회장이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아들의 행복이다. 채하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해.”
*
한편 그 시각, 난리가 난 집이 또 하나 있었다.
와장창 물건들이 깨지는 소리가 온종일 집 안을 울렸지만, 백사라의 속보다 시끄러울 수는 없을 터였다.
“제기랄!”
분노로 몸을 떨며 백사라는 까득 손톱을 깨물었다.
라 쁠뤼의 론칭 파티에서 당한 수모만 생각하면, 지금 당장 민설원의 가느다란 목을 비틀어도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열린 문 사이로 몇 명의 손님들인가가 그 장면을 보았고, 소문은 바람보다 빠른 법이었다.
권채하에게 그런 식으로 개망신을 당하다니.
평소 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사람들에게는 씹을 안줏거리를 던져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아내가 돌아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재혼 의사가 없음을 공공연히 알리기 위해 민설원을 데려온 것일 테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권채하가 민설원을 바라보는 눈빛은 얼마 전 집에서 맞닥뜨렸을 때보다 더 깊어져 있었다.
단순히 아내를 보는 눈빛을 떠나 미친 듯한 갈망이 담겨 있는 눈빛.
더없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다는 눈빛.
“아악!”
던지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백사라는 이불을 미친 듯 쥐어뜯기 시작했다.
마치 이불이 민설원의 드레스 자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때였다.
발작의 틈새로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수신인의 이름을 본 백사라의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마치 매가 먹잇감을 낚아채듯 백사라는 핸드폰을 잽싸게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던 듯, 태연하고도 고고한 평소의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그래. 오빠. 뭐 좀 알아냈어?”
[사라 네가 흥미를 가질 만한 걸 찾아냈지. 그나저나 소진이는 언제 소개시켜 줄 거냐?]
“좀 더 기다려봐. 일단 나도 뭔가 손에 쥔 다음이어야 하지 않겠어? 뭔데? 내가 흥미를 가질 만한 게?”
[네가 시킨 대로 민설원이 지냈던 섬을 찾아냈어. 근데 재미있는 게 딸려 나왔지 뭐냐.]
“재미있는 거?”
어쩐지 예감이 좋아, 백사라의 입술이 오랜만에 쭉 올라갔다.
[그래. 그 여자. 섬에 남자가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