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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부부의 도리 (31/111)


31. 부부의 도리
2022.11.16.



 
채하와 갓 결혼했을 무렵, 시어머니인 허영주는 설원을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했다.

아무리 인사를 해도 무시하기 일쑤였고 식사할 때조차 말을 섞지 않았다.

그야말로 가시방석이었으나 설원은 본디 적응력이 빠른 사람이었다.

마당 귀퉁이의 작은 꽃밭을 가꾸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일상에 위로를 건넸다.

이름뿐인 남편 채하는 늘 바빴고, 그를 대신해 정 비서가 가끔 얼굴을 비춰주었다.

채하가 전무로 승진을 앞두고 있어 정신이 없다며, 정 비서는 늦은 퇴근에 대한 핑계를 에둘러 전하곤 했다.

어차피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니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었는데도.

그렇게 겉으로만 평탄한 나날들이 흘러갔다.

그러나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났을 즈음, 겨우 유지하던 평온마저도 깨지는 일이 벌어졌다.

허영주와는 정반대로 권강호가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 약속했던 설원은 시부모님에게 언제나 깍듯하게 굴었다.

권 회장이 그런 태도를 높이 샀는지, 어느 날 재계의 사교 모임에 설원을 초대했다.

모 기업 회장 사모의 갤러리 개관식이라는 중요한 자리였다.

당연히 허영주의 반응은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얘를…… 같이 데리고 가라고요?”

“그래. 가족을 전부 초대했으니 며느리도 당연히 같이 가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얘가 뭐야. 엄연히 우리 며느리거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그런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요. 아버님.”

“그럴 리 없다. 오며 가며 설원이 널 봤던 사람마다 죄다 칭찬하더구나. 몸가짐이며 학식이며 빠지는 게 없다고.”

“…….”

허영주의 눈이 번뜩이는 것이 필시 불길한 징조였다.

그것을 보며 설원은 이 일이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예감은 적중했다. 처음으로 외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채운의 며느리를 향해, 호기심 가득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것이었다.

더해서 의외의 호평 또한.


‘어머, 전 허영주 여사랑 비슷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완전 다르네요.’


‘그러게요. 없는 집 아가씨란 소문이 돌더니 그냥 소문인가 봐요. 별반 꾸미지도 않았는데 귀티가 좔좔 흐르네요.’


‘분위기가 우아한 게, 과연 채운의 작은 안주인에 손색없네요. 백영 그룹 딸이 괜히 밀린 게 아닌가 보네.’

 
그것이 지옥의 입구를 알리는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졸지에 들러리 신세가 된 허영주는 그날 이후로 단 한 순간도 설원을 무시하지 않았다.

늘 경계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모질게 타박했다.


“너, 일도 안 다니는데 집에서 빈둥거리지 말고 안산댁이나 도와라.”

“네?”

“귀가 먹었니? 일하라고! 난 손빨래한 옷만 입으니까 세탁기 돌리지 말고. 이불에 먼지 많이 쌓였던데 이불부터 싹 모아서 빨아.”

“……네.”

안산댁마저 불편하게 만드는 언사였으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허영주의 타박은 날이 갈수록 과감해지고 지독해졌다.


“어머님. 혹시 정원에 꽃들, 어머님께서 다 뽑으셨어요?”

“그래! 내가 뽑았다! 어차피 죄다 시들시들하더구만, 뽑으면 안 된단 법이라도 있니?”

“시들시들하다뇨. 이제 갓 꽃봉오리를 틔운 꽃들인데…….”

“그래서? 너 지금 나한테 그깟 꽃 좀 뽑았다고 뭐라고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내 집 정원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어디 눈을 똑바로 뜨고 또박또박 시어머니한테 따져?”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설원의 유일한 위로이자 안식처였던 정원은 이내 허영주 취향의 알록달록 화려한 꽃들로 채워졌다.

그나마도 보란 듯 반발심에 한 행동이었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시들어버렸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유치한 괴롭힘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가장 기함할 일은 따로 있었다.


“어머님.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못 들었니? 3개월에 한 번씩 윤 실장하고 산부인과에 가라고 했다.”

“……산부인과엘 왜요?”

“그새 까먹었니? 나랑 약속했잖아. 절대 임신하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검진 결과 분기마다 보고해. 내가 널 뭘 믿고 그냥 두고 보겠니? 덜컥 애라도 가졌다간 그땐 정말 일 날 줄 알아!”

“…….”

지옥이 따로 있을까.

땅이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아도, 바로 이곳이 설원에겐 지옥이었다.

채운 가. 권채하의 옆자리가.

*



“그 눈빛을 보니 우릴 모르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백사라의 시선이 설원의 매끄러운 드레스 자락을 못마땅한 듯 훑어 내렸다.

설원에게는 아주 익숙한 시선이었다.

너 따위에게 가당키나 하냐는 의미가 담긴, 늘 둘에게서 받아온 시선이었으니까.

사실 오늘 파티에 오기 싫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두 사람을 마주하리란 것 때문이었다.

과거 갤러리 행사에서 심사가 뒤틀린 허영주는 이후로 꼭 백사라를 동행해 나타났다.

덕분에 정작 설원은 자동으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대답해 봐, 너 우리 알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지?”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왔지만, 설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둘을 철저히 무시하기로 마음먹었기에.

기억이 없다고 공표한 이상, 상대가 시어머니든 누구든 중요하지 않았다.

둘이 제게 한 짓을 생각하면 말을 섞는 순간 설원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를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서슬 퍼런 음성이 설원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

순간 두 여자의 낯빛이 동시에 희게 질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등 뒤에 서 있는 남자는 제 남편, 권채하라는 것을.

터벅터벅 발걸음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의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그녀의 뒤에 와 선 채하가 드레스에 잔뜩 튄 샴페인 얼룩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새 파티장 입구의 열린 문 사이로 사람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곤란해질 것을 예감한 설원이 슈트를 차려입은 채하의 팔을 붙들었다.


“권채하 씨. 일단 우리 저쪽으로 가요. 가서 얘기해요.”

“아니.”

채하가 설원의 팔을 차분하게 빼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얼어붙어 깨지기 직전의 호수 같았다.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기서 들어야겠어. 말해 봐. 백사라. 그리고 어머니, 대체 제 아내한테 무슨 무례한 짓을 한 겁니까?”

“너, 너. 채하 너……!”

허영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재빠르게 눈치를 살폈다.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아 차마 시원하게 욕을 내지를 수도 없었다.

반면 채하는 그런 것 따윈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가 설원을 뒤로 보내 지키듯 선 뒤, 백사라와 허영주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한없이 음습한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


“백사라. 이제 이따위 유치한 짓은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채하의 시선이 백사라의 번쩍거리는 목으로 향했다.

마치 졸라버리기라도 할 듯한 눈빛에 백사라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빼앗긴 목걸이 따위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그가 할 말을 이어갔다.


“있을 자리 없을 자리 구분 못 할 처지는 아닐 텐데. 내 아내는 민설원이라는 걸 그새 까먹기라도 한 건가?”

“…….”

“얘! 채하 너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어머니도 마찬가집니다. 제가 분명 말씀드렸죠. 어머니의 도리를 하지 않으신다면 저도 어머니 대접을 해 드리지 않겠다고요.”

“내, 내가 언제 도리를 안 했다고 그래?”

“그럼 제 아내의 목에 있어야 할 목걸이가 왜 백사라에게 가 있는지 설명해 보시죠.”

허를 찔린 허영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오싹할 정도로 빙긋 미소를 지으며, 채하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뭐, 상관없습니다. 그깟 목걸이 없어도 제 아내가 제일 예쁘니까.”

“권채하 씨. 그만, 그만 해요.”

당황한 설원이 그를 말리기 위해 다시 팔을 붙잡으려 했다.

한데 채하가 먼저 그녀의 손을 낚아채선 제 손 위에 에스코트하듯 사뿐히 얹었다.


“자. 나랑 같이 들어가지. 5년 만에 돌아온 아내를 모두에게 소개해야 하니까.”

“…….”

뒤에서 허영주와 백사라의 노기 어린 시선이 쏟아졌지만, 채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대로 서 있을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설원은 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옥의 연장선 같았는데.

채하의 듬직한 손을 붙잡고 있는 지금은 어쩐지 다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그를 알아본 직원은 두 사람을 저지하지 않고 들여보내 주었다.

이쪽을 향하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뒤로한 채, 곧바로 채하가 설원을 파티장 가장 구석의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왔다.


“이리 와. 일단 젖은 데부터 닦아줄게.”

“벌써 다 말라서 괜찮아요.”

“아쉽군. 다정한 남편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였는데.”

능청스레 말하며 채하가 찬찬히 살피듯 설원을 내려다보았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가 우아한 실크 드레스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다만 목걸이가 없는 자리가 조금 휑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당신 목걸이를 빼앗겨 버렸군. 목걸이를 하지 말고 오라는 게, 이런 뜻일 줄이야.”

“전 그런 거 없어도 괜찮아요. 분수에 맞지도 않고요.”

“흠. 그 말은 틀렸지. 당신만큼 잘 어울릴 여자가 또 어디 있다고.”

민망함에 설원은 말없이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예전에는 제가 힘들 때마다 곁에 없던 채하였다.

설원은 늘 그가 없는 곳에서 아팠고, 슬펐고, 또 외로웠다.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채하는 그녀를 완전히 방치하다시피 했다.

아무리 계약 관계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교감을 바랐건만, 정말이지 어리석은 기대였다.

그는 언제나 차갑고 무심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는 언감생심 나눈 적도 없었고, 되레 그녀와 마주치기를 피하는 듯 보였다.

집에서 힘든 일은 없는지, 혹여 문제는 없는지. 당연하게도 채하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로서는 틀린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보상으로 그가 설원과 거래한 조건은 엄연히 ‘총알받이’나 다름없었으니.

총알받이가 어떤 총알을 매일 어떻게 받고 있는지까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원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채하의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랬는데, 예전에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도 쓰지 않았던 그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중요한 손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무엇도 괘념치 않고 그녀를 최우선으로 감싸주었다.

신기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권채하라는 남자에게 이끌리면 안 되는데.

그때였다.


“지금 보니 목만 휑한 게 아닌 것 같군.”

채하가 설원의 목에서 시선을 떨어트리더니, 천천히 손가락으로 옮겨왔다.

가녀린 손마디를 하나하나 뜯어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번에 분명 반지를 돌려준 걸로 기억하는데, 왜 끼고 다니지 않는 거지?”

“……반지요?”

“그래. 반지. 봐, 난 이렇게 늘 끼고 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채하가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과연 곧게 뻗은 손가락 위에, 결혼반지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옛날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설원이 잠시 말문이 막힌 찰나였다.

그녀의 손등에 채하가 제 손을 부드럽게 얹었다.

곧이어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설원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빈틈없이 파고들었다.

그 행동에, 순식간에 손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야릇한 손깍지를 낀 채로 그가 그녀의 손을 제 입술로 가져갔다.


“아내가 반지를 안 껴서 몹시 서운한데, 지난번 미처 못 끝낸 부부의 도리를 지금 해주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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