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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파열음 (30/111)


30. 파열음
2022.11.13.


평소 오래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허영주였다.

그런 그녀가 대리석 테이블 위의 파란 공단 상자 두 개를 아까부터 뚫어져라 쳐다보며 드물게 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침에 남편 권 회장이 출근하면서 건네고 간 물건이었다.

오늘 저녁 론칭 파티가 열리는 주얼리 브랜드 ‘라 쁠뤼’의 시그니처 목걸이.

프랑스어로 ‘비’를 뜻하는 브랜드 이름답게, 빗방울을 형상화한 다이아몬드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목걸이였다.

이것을 건네며 권강호는 그녀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오늘 참석하는 부인들한테 선물로 온 거야. 남자들한테는 넥타이 클립을 보냈더군. 이걸 착용하고 가면 알아서 안내해 줄 테니 채하하고 설원이랑 같이 가 있어.’


‘당신은요?’


‘나는 일 끝내고 가면 조금 늦을지도 몰라. 이참에 좀 살갑게 대해주게. 어찌 됐든 우리 며느리가 아닌가. 거기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야.’

 
울화통이 터져 허영주는 혼잣말로 언성을 높였다.


“뭐, 좋은 일?”

남자들이란 이렇게 무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제 속은 알지도 못하고 태평한 소리나 하고 있다니.

지금까지도 가슴 속 응어리로 남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허영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권강호 회장의 첫 번째 아내는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다.

아이도 없던 만큼 젊고 능력 있는 그의 후처 자리를 노리는 여자들은 차고 넘쳤다.

그리고 언감생심 그런 남자와는 인연이 없을 줄만 알았던 허영주에게, 천운이 내려왔다.

당시 한창 떠오르는 TV 스타였던 그녀가 운 좋게 채운 그룹의 광고 모델을 맡게 되면서, 자연스레 권 회장과 연이 닿게 된 것이었다.

재계의 다른 혼담을 모두 물리치고, 권강호는 허영주와 재혼했다.

하나 권강호도 미처 알지 못한 게 있었다.

TV 속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

그녀는 이름처럼 돈과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허영심 많은 여자였다.

외모는 무척 고왔지만, 출신에서 비롯한 욕심과 타고난 열등감은 비싼 옷이나 보석으로도 감출 수 없었다.

허영주의 부모님은 공장일로 생계를 이었고, 그나마 줄줄이 딸린 동생들 탓에 뭐 하나 여유롭게 누리고 살지 못했다.

거기에 여배우라는 명예는 이 바닥에선 오히려 이상한 꼬리표가 되었다.

엄연히 사별 후 재혼한 두 번째 안주인이건만, 늘 첩이라는 흉흉한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당신이 좀 제대로 말해주세요! 예전엔 만난 적도 없는 사이라고요. 다들 나를 두고 얼마나 더러운 소리를 지껄이는지 알아요?’


‘흔한 아녀자들 질투인데 뭘 그런 걸 신경 쓰나.’


‘난 손가락질받는 거 싫어요! 내가 왜 첩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해요?’


‘본인만 당당하면 그만이지. 그렇게 열 올리지 말라고.’

 
다행히 허영주의 천운은 꽤나 강력했다.

머리는 아버지인 권강호를 닮고, 외모는 그녀 자신을 닮은 완벽한 아들을 둘이나 순풍 낳은 것이었다.

그것은 허영주에게 있어 엄청난 프라이드가 되었다.

두 아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늘 시선을 사로잡았고, 덕분에 허영주는 자연스레 외곽에서 중심으로 자리를 옮겨올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아들들에 대한 기대감과 욕심은 커져만 갔다.

장남인 태하와 차남인 채하 둘 다 성인이 되었을 무렵부터, 허영주는 빠르게 혼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둔 저와는 달리, 두 아들은 번듯한 채운 가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제 아들들에겐 부와 명예,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가문의 자제를 짝으로 골라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천운이란 게 영영 이어질 수 없는 법.

애석하게도 장남인 태하가 젊디젊은 나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은 허영주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파열음이었다.

태하는 냉담한 채하와 달리 살가운 아들이었다.

한데 막상 혼담이 오갈 무렵, 웬 가난한 아가씨에게 홀랑 빠져선 통 말을 듣지 않았다.

기껏 좋은 며느리를 골라두었더니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며 난리를 쳤고, 그 여자에게 가던 길에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별것도 아닌 여자 하나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목숨까지 잃고 만 것이다.

오랜만에 그때의 일을 떠올리니 허영주의 몸이 형용할 수 없는 분노로 떨려왔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파란 공단 상자 속에 든 목걸이를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이런 게 언감생심 민설원 같은 여자에게 어울릴 리가 없었다.

하찮은 여자로 인해 인생을 망치는 것은 장남 태하 하나만으로 족했다.

그렇게 결심한 허영주는 얼른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고는 제가 오래전부터 찜해놓은 며느릿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사라니? 오늘 저녁에 말이야.”

 

 


“급한 일이 생겼다고요?”

[그래. 바로 처리해야 해서 아무래도 난 회사에서 곧장 출발하는 게 나을 것 같군. 기사를 보낼 테니 당신 먼저 가 있어.]

“아아…….”

[늦지 않게 도착할 거야. 내 이름을 대고 들어가면 돼.]

“알겠어요.”

[그래. 내가 골라준 걸로 예쁘게 입고 와.]

“네.”

전화를 끊고 나자 설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우주를 맡기고, 채하가 불러준 디자이너에게 헤어와 메이크업까지 끝낸 뒤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런 파티 자체도 꺼림직한데 하물며 또 혼자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예전에도 명색이 ‘부부 동반’ 파티였지만, 늘 그녀 혼자 참석했기에 어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겠다고 약속했으니 지킨 수밖에 없었다.

왠지 시작부터 찝찝한 기분이 들었으나, 설원은 약속대로 ‘라 쁠뤼’의 론칭 파티장으로 향했다.

한편, ‘라 쁠뤼’의 론칭 파티가 열리는 프라이빗 홀.

빗방울 모양의 화려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착용한 채, 허영주와 백사라는 팔짱을 끼고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어머! 허 여사님. 백사라 양. 오늘 어떻게 같이 오셨어요?”

“어. 그 목걸이…… 세상에! 곧 좋은 소식 있는 거 맞죠? 그렇죠?”

“호호. 뭐…… 우리 사라가 오래 기다려 줬죠.”

“두 분이 나란히 목걸이를 하고 있으니 참 보기 좋네요~ 손 회장님 아드님이 정말 심혈을 기울인 브랜드라고 하더라고요!”

“자자, 아직 손 회장님네는 안 오신 거 같은데 우리끼리 샴페인 한잔해요!”

하하 호호 웃음을 지으며 잔을 부딪치는 그들의 머릿속엔 이미 빠르게 계산이 되고 있었다.

채운의 며느리가 실종된 지도 이제 5년이 넘었으니, 언제까지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일 터.

오늘 같이 목걸이까지 하고 나타난 걸 보니 백사라가 곧 채운 가의 일원이 되는 모양이었다.

채운도 채운이지만, 백영은 최근 십 년간 그야말로 급부상해 건설부터 통신, 엔터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를 휘어잡고 있었다.

게다가 백영 자체의 자본력이 워낙 어마어마해 흔들림이 없었고, 다른 기업에 대한 영향력 또한 컸다.

그렇기에 두 가문이 혼인으로 이어진다면, 정말이지 남부러울 것이 없을 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떨어지는 콩고물을 조금이라도 주워 먹기 위해 이 두 여자를 주목했다.

보란 듯 활짝 웃으며 허영주는 힐끔 백사라를 살폈다.

길고 가는 목에서 빛나고 있는 목걸이는,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사람들에게 백사라가 차기 채운의 며느리가 될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허영주는 그녀와 함께 이 자리에 왔다.

빤히 들통날 거짓말로 잠깐이나마 채하의 발목까지 붙잡아 두고서.

오늘 일이 무모한 모험이 되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허영주는 채하와 설원의 계약 결혼이 이미 옛날에 끝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권 회장이 알게 되면 저를 비난할 수만은 없으리라.

노발대발 난리가 나겠지만, 설마 저를 죽이기야 하겠냐는 배짱이 생겼다.

다만…….


‘미쳤어! 여기서 왜 그 꼬맹이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허영주가 정신 사납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차피 채하가 백사라와 재혼하게 되면 오매불망 바라던 혈통 좋은 손주를 안아볼 수 있을 텐데,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과자 고맙습니다. 예쁜 할머니.’

 
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려와, 허영주는 샴페인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때였다.

입구 쪽에서 작은 소란이 벌어진 것이 허영주와 백사라의 눈에 들어왔다.


“아, 저는 초대받은 손님이에요.”

“목걸이가 있으셔야 입장이 가능합니다.”

“……목걸이요?”

“오늘 오실 손님들께는 라 쁠뤼의 시그니처 제품이 전부 하나씩 제공되었습니다. 여성분들은 목걸이를 착용하셔야만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손 회장의 아들은 괴짜라 독특한 일을 꾸미는 걸 좋아한다더니, 아마 채하도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대라고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듯해 설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채운 그룹의 며느리예요.”

“예?”

“아, 그러니까…….”

경호를 맡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봐야 모를 가능성이 더 컸다.

그래서 설원은 조금 더 자세하게 자신의 신분을 설명하기로 했다.


“채운 그룹 부사장인 권채하 씨의 아내예요. 남편…… 은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지침이 내려온 대로 안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손님의 얼굴은 일면식이 없어서요. 채운 그룹의 부사장님과 함께 오시면, 그때 들여보내 드리겠습니다.”

“아…….”

어쩔 도리가 없어 설원의 어깨가 축 처졌다.

여름이긴 해도 어느새 저물어가는 저녁인지라, 휑하니 드러난 어깨에 닿는 찬바람이 제법 찼다.

늦지 않게 온다고 했으니, 복도에서 그냥 기다려야겠다 싶어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찰나였다.

그녀의 앞에 그림자 두 개가 드리워졌다.


“너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니?”

“…….”

설원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허영주와 백사라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리게 차려입은 그들의 목에는 똑같이 생긴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제야 설원은 대충 돌아가는 내막을 눈치챘다.

허영주가 제 목걸이를 빼돌려 백사라에게 준 것이었다.


하지만 설원은 이들과 입씨름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모르는 분들이신데,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몰라? 이렇게 당당히 파티까지 와 놓고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나 권채하 어미 되는 사람이야! 저번에 집에서 봤잖아!”

“……기억이 안 나네요.”

“하! 아주 뻔뻔하기가 그지없구나. 너 솔직히 말해 봐. 기억 못 하는 척 아픈 척하면서 채하한테 또 한 몫 단단히 뜯어내려는 거지?”

“…….”

“이참에 솔직히 털어놔 봐! 너 내 아들하고 무슨 거래를 했니? 어? 뭘 얼마나 받아낸 거냐고!”

설원이 힐끗 파티장 입구를 보았다.

음악 소리 때문에 이곳의 대화가 들리진 않겠지만, 허영주의 목소리가 워낙 커 자칫 소란을 들킬 우려가 있었다.


“저는 밖에서 권채하 씨를 기다릴게요.”

그렇게 통보한 설원이 드레스 자락을 돌려 걸어가려던 찰나였다.

등 뒤로 시원하게 물줄기가 날아왔다.

곧이어 훅 퍼지는 알코올 향기로, 설원은 그것이 백사라가 들고 있던 샴페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허영주의 악에 받친 목소리와는 다른, 차분하면서도 가시 돋힌 목소리가 설원의 등 뒤로 날카롭게 꽂혔다.


“이래도 기억이 안 나?”

샴페인 방울에 얼룩진 드레스 자락을 털며 설원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곧 그녀의 단단한 눈동자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자신을 향한 무한한 증오로 가득 찬 둘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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