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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남편의 본능 (29/111)


29. 남편의 본능
2022.11.09.



 
내 옆으로 오라…….

주문 같은 그의 말에 홀린 설원이 어색한 걸음걸이로 주춤거리며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두어 걸음쯤 남았을 때였다.


“헉!”

그녀의 손을 냉큼 잡아끌어 채하가 침대 위에 고이 앉혔다.

그러고는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가녀린 어깨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이어 그의 커다란 손이 야무지게 설원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황당한 나머지 설원은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외조.”

“…….”

“기대한 게 아니라 실망했다면, 유감이군.”

“아무것도 기대 안 했어요.”

샐쭉한 설원의 말투에 등 뒤에서 피식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자꾸만 저를 놀려먹는 채하가 못마땅했지만, 의외로 그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섬세한 데가 있었다.

오랜만에 먼 길을 다녀와서인지 사실 온몸이 찌뿌둥하긴 한 상태였다.

게다가 비까지 와서 더 녹초가 되어 있기도 했고.

마치 전문 마사지라도 배운 것처럼 그의 안마는 기대 이상으로 뛰어났다.

통통 두드리고 알맞게 주무르며 근육을 풀어주니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그런 변화를 눈치챈 듯 채하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시원한가?”

“……네. 시원하네요.”

“다행이군. 그럼 이제 누워봐.”

“누우라고요?”

깜짝 놀라 휙 고개를 돌린 설원의 숨이 순간 흡, 하고 멎을 뻔했다.

바로 눈앞에 채하의 진중한 얼굴이 있는 탓이었다.

그가 제 등에 거의 딱 붙다시피 한 채 어깨를 안마 중이란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시선이 피할 곳 없이 서로를 향했다.


“……그렇게 보면.”

채 이십 센티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거리, 그의 눈동자가 일렁이며 까맣게 짙어졌다.

동시에 설원의 가슴도 묘한 충동으로 일렁였다.

얼굴을 서서히 가까이 붙이며 느릿하게 채하가 다시 입술을 뗐다.


“정말로 야릇한 외조가 하고 싶어지잖아.”

“…….”

“알아. 당신은 기억을 못 하고, 아직 그럴 마음도 없다는 거.”

채하의 목소리에는 유혹적이되 재촉의 기색이라곤 없었다.

그저 제 마음이 그렇다는 걸 털어놓았을 뿐이라는 듯.


“자, 누워. 진짜로 당신하고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으니까.”

“……뭔데요?”

“누워보면 알아.”

이번에는 설원도 더는 저항하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곧바로 채하가 목덜미 아래로 팔을 넣어 팔베개를 해주었다.

따뜻한 체온이 목덜미를 타고 느껴지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게다가 왜인지 이런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당연히 그가 팔베개를 해준 건 처음일 텐데도.


 


“하고 싶다는 게 이거였어요?”

“그래. 내가 전에 고백했지. 당신 목덜미 만지는 거 좋아했다고.”

“간지럼 태우면 화낼 거예요.”

“안 해. 지금은 웃을 상황은 아니니까. 진지한 얘길 좀 나눠볼 셈이거든.”

“네?”

“민설원. 당신, 지난 5년간 어떻게 지낸 거지?”

“…….”

그런 뜻이었나. 확실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주제는 아니긴 했다.

여태까지 묻지 않기에 그저 별 관심이 없는 것이겠거니 여겼다.

한데 지금 마주 보고 있는 짙은 눈동자 속에는, 어딘가 가늠하기 어려운 괴로움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으려 애쓰며, 설원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요. 섬에 떠밀려와서 재윤 씨네 가족한테 발견되고, 그분들이 돌봐주셨다고요.”

“우주는 최재윤의 아이로 되어 있는 건가?”

“……아니에요.”

“아니라고?”

예상과 다른 대답이었는지, 채하의 눈썹이 위로 휙 올라갔다.

아마 당연히 그렇게 예상하고도 남았으리라.

하나 사실은 달랐다. 그 안에 있는 이면 또한, 그에게 말할 필요 없는 것이었고.


“재윤 씨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지만, 젊은 남자의 앞길을 망칠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출생 신고를 하지 않으면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을 테니까…… 일단은 재윤 씨의 부모님 밑으로 해두었어요. 나중에 제 밑으로 옮길 생각이었고요.”

“그런데 내가 당신을 찾아낸 거군.”

설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한 대로 재윤의 부모님 밑으로 우주를 올렸고, 이후 적당한 시기를 봐서 법적 절차를 밟아 새롭게 시작할 작정이었다.

이렇게 5년이 지나기 직전, 그에게 발견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시간 동안 어떤 고생을 했고 어떤 가슴앓이를 했는지까지는, 차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설명이라면 이 정도로 충분할 터였다.

더 캐묻는 대신 채하는 아주 단호하게 선언했다.


“실종 처리된 건 내가 바로 해제시켰어. 민설원. 당신은 예전처럼 여전히 내 아내야.”

“권채하 씨. 나는…….”

“저번에 말한 대로 우주도 곧 우리 두 사람 밑으로 옮기도록 하지. 전담 변호사에게 의뢰해둘 테니.”

“그건…….”

“무엇이 우주를 위한 일인지, 엄마인 당신이 가장 잘 알겠지.”

설원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섬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채하의 말도 틀리진 않았기에.

무엇보다 최근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볼 때마다 따끔거리는 가슴은, 그녀에게도 늘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우주에게 아빠의 존재를 모른 채 살아가게 해도 될까 하는.


“피곤해요. 이만 자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이곳으로 돌아올 때 정해둔 답을 거스르게 될 것 같아, 설원은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채하의 다른 한 손이 그녀의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손길이 너무도 다정하고 살가워, 감은 눈꺼풀 안으로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지독한 무심함에도 울게 만들고, 낯선 다정함에도 울게 만들다니.

권채하라는 남자는 설원의 인생에 있어 난제가 틀림없었다.


“그래. 푹 자.”

톡, 하고 머리맡의 조명이 꺼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채하가 제 너른 품으로 설원을 이끌어 가득 안았다.

마치 위로하는 것처럼.

*



“당신, 지금 뭐라 했어요?”

권강호 회장의 재킷을 받아 걸던 허영주가 눈을 부리부리 빛내며 언성을 높였다.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권 회장이 그녀의 호들갑에 무심히 대꾸했다.


“손 회장 아들네 주얼리 브랜드 론칭 파티에 채하랑 설원이를 데려가겠다고 했네.”

“뭐, 뭐요? 설원이?”

“그럼 설원이를 설원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나? 채하한테 기별이나 넣어둬. 이번 주 금요일 저녁이니까 늦지 말라고. 인사드릴 분들이 많이 올 거야.”

“아니! 거기가 어디라고 걔를 데려가요? 그런 중요한 자리에?”

허영주가 펄쩍펄쩍 뛰자, 권 회장이 혀를 끌끌 찼다.


“중요한 자리니까 데려가라는 것 아닌가. 그리고 애초에 부부 동반으로 오라고 연락이 왔어. 아들 며느리 다 데리고.”

“며…… 며느리?”

“그럼, 채운에 며느리가 달리 또 있나? 설원이가 돌아왔는데, 멀쩡한 며느리를 없다고 안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런 상황에 대뜸 민설원을 데리고 가면, 필시 백영과는 척을 지게 될 터였다.

특히 지난번 제 입방정 때문에 백사라의 안부 연락도 부쩍 드물어지지 않았던가.

자존심 강한 그녀인 만큼, 분명 빈정이 잔뜩 상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못마땅해 미칠 것 같았지만, 여기서 백사라 이야기를 꺼냈다간 경을 치리라는 것을 다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은근히 수긍하는 척하며 정보를 캐묻는 쪽을 택했다.

어쩌면 의외로 좋은 기회가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니.

한편 이 뜻밖의 초대를 당혹스러워하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파티라고요?”

“그래. 파티.”

“지금 나한테 파티를 가자고 하는 거예요?”

“방금 말했잖아. 부부 동반이라고.”

동네 뒷산에라도 다녀오자는 듯 쉽게 권유하는 채하를 보며 설원은 귀를 의심했다.

숨어지내기에도 급급한데, 무려 재계의 파티에 참석하자니.

그러나 설원이 거절을 전하기도 전에 채하가 물러설 구석을 막아버렸다.


“알아. 당신 곤란한 일은 시키지 않기로 한 거. 하지만 이것만큼은 나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야. 애초에 지금 3개월 연장된 우리의 계약 조건엔 내 아내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준다, 가 전제되어 있었거든.”

“그건…….”

“너무 걱정할 것 없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냥 내가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

“자랑하다니, 뭘요?”

설원이 떨떠름하게 되묻자 그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연히 민설원, 당신이지.”

“…….”

도무지 이쪽으론 설득이 안 되겠다 싶어, 설원은 다른 빠져나갈 구멍을 모색했다.


“입고 갈 옷이 없어요. 파티 같은 데 가는 건 역시 무리예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건만, 대꾸 대신 채하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돌아온 첫날, 그가 안내해 주었던 드레스룸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벌써 잊어버렸어? 이 방에 있는 게 전부 당신 거잖아. 당신이 다 좋아하던 것들이라니까?”

“아…….”

낭패였다. 좋아하긴커녕 본적도 없는 물건들이건만.

한 번 뱉은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권채하의 계략에 척척 걸려들고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룸 안에 설원을 밀어 넣은 그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마침 잘됐군. 들어온 김에 골라 보지. 지난번 대보았던 빨간 실크 드레스도 잘 어울렸고.”

“아니, 괜찮아요. 그냥 나중에 내가 볼게요.”

“남편이 골라주지 않으면 누가 골라주나. 그러지 말고 이리 안으로 들어와 봐.”

그가 설원을 냉큼 전신거울 앞에 세우곤 세심하게 의상을 고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그가 이것저것 내미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전엔 너무 놀라 대충 훑고 넘겼는데, 지금 보니 이 안에는 없는 게 없었다.

가장 구석엔 빛나는 조명이 달린 탈의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자, 입어 봐.”

채하가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며 그녀를 탈의실로 떠밀었다.

곧 설원은 딱 붙는 실크 드레스에, 평생 들어볼 일도 없을 듯한 보석 클러치를 손에 든 채 어색하게 서 있게 되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살피던 채하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중요한 걸 잊었군.”

곧 채하가 눈부신 장식이 달린 화려한 구두를 가지고 왔다.

그러더니 곧바로 등을 숙이고 앉아 설원의 발을 사뿐히 들어 올렸다.


“내, 내가 신을게요!”

“천만에. 옷도 입혀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은 거야.”

“…….”

한없이 간지러운 손길이 발목의 복사뼈를 지나칠 때마다, 몸이 괜스레 곤두섰다.

발을 닦아줬을 때도 그렇고, 왜 이리 그의 손길이 간지러운지.


“자, 됐어.”

어느새 뒤에 와서 선 채하가 거울 속 설원의 모습을 빠져들 듯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예쁘네.”

셔츠 한 장만 대충 걸치고도 저보다 더 존재감이 뚜렷한 그였다.

그런 그가 오히려 저를 보고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니, 설원의 심장이 속절없이 뛰었다.

이어 채하가 등까지 내려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흰 목덜미와 가녀린 라인이 드러나자, 입고 있는 드레스의 매력이 순식간에 배가 되었다.

다만 너무 화려한 거 아닌가 싶어 설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조금 수수한 드레스가 낫지 않을까요? 주인공도 아닌데.”

“천만에.”

거울 속 채하의 입꼬리가 느른하게 휘었다.

이어 훤히 드러난 목덜미 위로 채하의 커다란 손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움찔 떨리는 설원의 귓가에 그의 억누른 듯한 음성이 새어 들어왔다.


“나한텐 당신이 주인공이야. 그리고 내 아내가 가장 예쁘길 바라는 게, 남편의 본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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